배나무

2

by 한운후

*이야기는 현재(지구에서)와 과거(달)가 번갈아 가며 진행됩니다.




[지구에서]


이른 아침, 검은 바위산 위로 안개 뭉텅이가 정체되어 있었다. 한 방향으로 흘러가 다시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매서운 겨울이 지나고, 광활한 땅 속에 갇혀있던 습기가 이끼 사이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땅이 뿜어낸 숨은 흰색 실크처럼 두드러진 주름을 만들었고, 높은 바람을 맞으며 숲으로 퍼져나갔다.
하나는 올해 들어서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날들을 세어보려 했다. 그 수는 자기 손가락과 발가락을 합한 것보다 조금 더 많았다. 물이 반쯤 찬 텀블러를 풀에 내려놓고서 담소하게 펼쳐진 부채 모양의 배나무 잎을 만졌다. 잎표면에 미세한 잔털처럼 덮여있던 습기는 서리와 이슬의 중간쯤 되었는데 손바닥이 닿자마자 단숨에 본래의 선명한 색을 드러냈다.
나무는 전날 밤의 추위를 고스란히 쥐고 있었다.

그녀는 매번 둥근 반달 벽 앞을 지날 때마다 어린 나무가 홀로 서 있는 게 못마땅했다. 나무의 열매는 고사하고, 나무가 심어진 정원의 묘미라 할 만한 게 하트 모양의 노란색 삽 손잡이가 전부였다. 두어 달 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난 조엘 삼촌은 배나무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장소는 없을 거라며 쇳소리 섞인 너털웃음을 보이곤 했었다.(재활원의 지대가 다른 데보다 높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려도 걱정하지 말라면서.) 하나는 이 모든 게 고작 스스로의 고집 때문이 아닐까 하면서도, 그가 말한 것처럼 거센 바람이 언덕을 타고 올라 나무를 깨워주길 기대했다.
대충 허리까지 오는 나무 한 그루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마지못해 연명하는 게 아니길 바라며 멀찌감치 우뚝 서있는 검은 바위를 보았다. 재활원 앞, 늘 수분에 촉촉이 젖어 있는 검은 바위는 사람들에게 산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산을 보면 오르거나, 속을 파헤치지 않고서 못 배겼지만, 겉에 조금의 빈 틈도 보이지 않는 검은 바위를 기꺼이 등반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말 그대로 그건 커다란 돌이었다. 달에서 지구로 귀환해 울릉도로 넘어온 이후로 매일같이 바라본 바위는 마치 세상의 끝처럼 인식되기도 했고, 지금 있는 곳을 늘 상기시키는 표지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다시 뒤돌아 재활원을 바라보았다. 검은 바위를 정면으로 마주한 건물면엔 테니스 코트만 한 넓이의 거대한 황동 판이 박혀있었다. 그 위엔 재활원을 지은 설립자가 오래전 남긴 글이 한 편이 새겨져 있었다.



산소, 질소, 수소, 황, 인, 탄소들로 흠뻑 젖은 신비로운 붓 하나가 지구의 겉을 스친다. 한 획으로 그려진 경이로운 그림은 누구를 위해 그려진 것인지, 도대체 누가 그린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가 까만 하늘에게 매혹되고, 놀림을 당하는 동안, 조용한 누군가는 붓을 들고 아주 먼 곳에서 우릴 기다린다. 다채로운 물감들은 이미 희미하고 무한한 방울이 되어 우주의 온갖 곳에 흩어진 구름과 같고, 그림은 단지 하나가 아니니, 반짝이는 그림들은 언제나 저 높은 곳에서 함께 한다.


당신이 눈을 감는다면, 깊게 물결치는 심장에서 선조들이 꼬아온 실의 끄트머리를 만질 수 있을 것이다. 낡고, 여러 갈래로 벌어져서 더 이상 하나처럼 보이지 않는 실 한 가닥은 어느새 천 개로, 백만 개로 나뉘어 기꺼이 남아있는 공간을 메운다. 수많은 황혼의 빛에 노쇠한 선조들의 실타래가 다음 세대의 땅으로 이어지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촛불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거리낌 없이 상처를 입는다. 틈새는 반드시 발견되고, 여명의 빛은 우악스레 파고들길 주저 않으리.


붓과 실, 우리와 그들.



재활원은 크고 복잡한 구조였지만 시문이 적힌 장소만큼은 그녀가 나무와 함께 하루도 빠짐없이 찾는 곳이었다. 어지간히 희끄무레한 구름들로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이 없는 약국 앞의 정원은 건초 같은 황색의 풀과 연두색 잔디로 지저분했다. 청소부들은 운영을 멈춘 가게나 시설을 죽은 사람처럼 대했다. 또한 직사각 정원을 대각으로 가로지르는 잔디 뿌리줄기들은 포장도로까지 기어 나와 있었다. 오늘 그녀의 계획은 잘려나간 나무뿌리 주변에 남아있던 정원 장식들을 자기 배나무 주변에 옮기는 것이었다.

허리띠와 눈 부분에 흙먼지가 낀 난쟁이 조각상 넷이 마치 위업을 달성한 것처럼 서 있었다. 그중 하나는 머리가 없었고, 어쩌면 백설공주는 용의 불보다 절망적인 질투의 독에 당하는 바람에 진작에 가루가 되었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난쟁이의 수염을, 반대 손으로 녹은 뿔 모양의 모자를 잡은 채 뽑아 들었다. 크게 고민하지 않았고, 모형의 구석진 틈에 작은 고무호스의 물줄기를 뿌렸다. 그리고 바늘처럼 모양을 잡은 손수건으로 닦아내길 반복했다.



오전 8시를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소리는 탄성 있는 쇠붙이 조각들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빨간 조끼를 입은 난쟁이는 하나의 동료, 아미르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는 검게 때가 탄 그의 흰 유니폼을 보더니, 미안한 듯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이 난쟁이들도 깨끗한 새 장소로 이사할 자격이 있을 것 같아서.”
그녀가 옆으로 피하며 아미르에게 길을 내주었다.

“아니야, 여기 자리가 훨씬 낫지. 나는 저길 지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지더라. 그 머리 없는 녀석은 약국 안에 넣어놨어.”

세 난쟁이들은 각각 다른 방향을 바라본 채 나무를 애워쌌다. 악기를 연주하고, 골똘히 이마를(묘책을 꾸리듯) 긁고, 곡괭이를 어깨에 짊어진 채로. 아미르는 청명한 하늘로 고갤 들었고, 소매와 배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허공에 웅크린 대기는 잠시 움직임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태양은 찬 기운에 알알해진 그의 얼굴을 해변의 모래처럼 부드럽게 문질렀다.

하나는 손으로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 새하얀 재활원을 바라보았다.

“설문조사가 이번 주말까지 맞지?” 그녀가 물었다.

“응.”

아미르가 입을 다문채 가로로 넓게 만들었다. 의문과 웃음이 섞인 표정은 누군가를 재촉하지 않으려는 배려 때문이었다. “오늘 오후에 공군 부대에서 담당관이 재활원에 또 들릴 거라는 얘길 들었어. 그리고, 그거 알아? 내일이 내가 여기에 온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야. 자발적 일꾼 일에 지원했을 땐 내가 울릉도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벌써 끝이 코앞이란 사실이 믿기지가 않네.”

“벌써? 호주로 여행을 간다고 했나?”

“먼저 뉴질랜드, 그리고 그곳에서 내 친구들을 만나서 브리즈번로 넘어갈 생각이야. 근데, 잠깐. 생각해 보니 옷이 깨끗하지 않아도 상관없겠는걸? 어차피 오늘 다시 더러워질 게 뻔한데.”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옷자락을 아래로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어떻게 그런 사람을 매일 같이 상대할 수 있는 거야?”
일자로 곧은 그녀의 앞머리가 살짝 내려가자, 얼굴은 반으로 줄은 듯 보였다.

“그 수다쟁이 아저씨,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굶주림 때문에 온 관절이 다 굳은 것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어. 기억나지? 그가 처음 기운을 차린 날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가까이만 다가가면 팔다리를 휘두르는 게..” 그가 고갤 저으며 말을 이었다. “불안 증세 때문이야. 같은 병실을 썼던 환자들도 떠나면서 했던 말이, 그냥 같이 있기가 너무 힘들었데. 마치, 우리를 탈출한 유인원과 함께 있는 기분이라 했었나..?”

“정오만 지나면 가까이 아무나 붙잡고서 이상한 교리를 끊임없이 얘기하는 허풍쟁이 설교자를 누가 견디겠어? 네가 도와주려 할 때마다 그가 매번 발길질이나 해대는 게 참 싫더라. 보라색만 보면 행복해하는 것도 이상하고.”

하나는 흙이 엉겨 붙은 신발 앞코를 내려다보며 텁텁한 입을 꿈틀댔다. 촉촉한 흙속에 딱정벌레의 날개 껍질 같은 갈색 잎이 섞여 있었다.

“벌써, 봄이네.”

“그러네, 여기서의 우리 임무도 슬슬 마무리 져야지.” 아미르가 말하고는 손가락으로 파란 문을 가리켰다. 문 가운데에 호화스러운 방패 모양 자국이 남아있었고, 십자가 모양대로 일정한 못 구멍들이 나있었다.

“그러니까… 저 문은 이제 쓰지 않기로 했던가?”

하나는 힘차게 끄덕이며 흰 벽의 아치형 구멍을 가리켰다. “응, 이제 하나밖에 없어. 우리는 돌아서 옆문으로 들어가야 해.”

“그래. 근데 저 나무는 키우려고 가져온 게 맞아?” 그가 뒤돌아 물었다. “조엘이 여기까지 소형 굴삭기를 끌고 왔을 때까지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저 나무를 지금 보니까 정말로 정원 느낌이 나는 것 같아, 진짜 손길이 닿으면서 살아 숨 쉬는 정원처럼.” 그는 풍경화를 위한 구도를 잡는 것처럼 한쪽 눈을 감은 채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예쁘잖아. 그런데, 나도 이 나무의 열매를 보지 못할 거란 걸 알아. 그래서 이런 간단한 장식만 하고, 비료나 아무것도 뿌리지 않으려는 거야. 조엘 삼촌과 친분이 있는 어떤 미국 농장에서 이 나무를 갖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그렇구나. 근데 이건 얼마나 특별한 나무길래 난쟁이 친구들을 곁에 세 명이나 둔 거지?” 아미르가 장난스레 물었다.

“그냥. 배나무.”

하나는 손가락으로 세 난쟁이를 각각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중요해,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더라도.”



‘50% 세일 중’이라 쓰여있는 빨간 천막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하나는 천천히 한 발씩 앞으로 내밀었다. 수레의 나무 바퀴가 한 바퀴 돌 때마다 옆으로 휘청거렸다. 만약 바닥 타일에 조금이라도 솟아오른 턱을 밟는다면 결과는 뻔했다.(재활원 사람들의 불쾌지수가 오르고, 초봄은 예상보다 더 일찍 끝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양옆으로 당근처럼 튀어나온 바퀴 축을 번갈아서 보았다. 사실, 장식용 수레가 그 정도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기대 이상이었다. 환한 햇빛이 비치는 복도는 인근 공군 부대의 마크가 새겨진 미트볼 도시락 냄새로 물들었다. 나란히 비어 있는 병동을 지나, 야외로 이어지는 휠체어 전용 풀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수레를 끌었다. 얕은 수영장 건너편 병실에서 조곤조곤 대화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굳이 수레 기둥에 달린 금색 나팔을 울리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덜컹이는 아침 식사의 소리를 잊지 않았다.

갈색의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온 여자가 문 밖으로 고갤 내밀었다. 하나는 수레 손잡이를 잠깐 놓은 채, 두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여자는 간드러진 눈웃음을 지으며 걸어왔고, 고장 난 수레의 앞부분을 잡아 주었다.

“도와줄게요.”

“아이들은 아직 자고 있나 보네요? 애기 호랑이들.” 하나가 말했다.

“걱정 마요, 얘네들 오후부터 또 외계인 사냥을 하러 시끄럽게 나돌아 다닐 테니까요.”

“이건 제가 며칠 전에 만들어둔 요구르트예요. 조금 신맛이 날 수도 있는데, 아직 상태도 꽤 좋고, 어제 빅토리아는 마음에 든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오늘 메뉴는 미트볼이에요. 일꾼들이 수력 발전소랑 우리 주소를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은 소리 없이 입을 열어서 웃었다. 하나는 수레 맨 아랫칸에 손을 뻗고는 낱개로 포장된 초콜릿 두 개를 꺼냈다.
“둘 다 안에 아몬드가 들어 있어요.”

“고마워요, 정말로. 저번에 애들한테 초콜릿 젤리가 다 떨어졌다 말해도 투정을 멈추질 않았거든요. 감으로 만들어진 푸딩은 소용이 없었거든요. 어쨌든, 제가 다 해치웠는데.”

“그랬나요? 감 푸딩은 탕비실에 양이 넘쳐나서 아마도 우리가 떠나기 전에 다 못 먹을 거예요. 이제야 올해 보급품 상자를 뜯었 거든요. 이 초콜릿들은 분실물 보관소 서랍에 있었어요, 열쇠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예요. 호랑이들이 말을 잘 들었을 때 줘야 해요. 언제 또 찾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괜찮아요. 이제 곧 초콜릿이 뭐였는지 기억도 못 할 텐데요. 아 참, 우리 아이들도 베루마스에 가는 걸 기대하고 있어요. 벌써 주말이 코 앞이네요.”

하나는 좋아하는 음악이 끊긴 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삶의 독특한 연장이 왜 이리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인지 스스로 물었다. 활발한 기억 속, 재활원 뒷마당에 있는 녹슨 시소가 움직임을 멈추고, 까르륵 대는 7살 개구쟁이들의 웃음소리는 마치 새벽의 바람 소리로 뒤바뀌었다.

“하나 씨, 갑자기 이런 말을 하기가 조금 어렵긴 한데, 이제 우리도 스스로를 돌봐야 해요. 내 앞으로 뭔가가 왔다고 해서 다 짊어지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무슨 얘기인지 알죠?”

갈색의 긴 머리 여자는 하나에게 대답을 기대하듯 먼저 고갤 끄덕이고 있었다.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에요... 우리는 오히려 그 아이가 원치 않는 걸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

돌발적인 물음을 얇은 유리 같은 표정으로 막아내기란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하나는 허리를 펴 그녀와 눈높이를 똑바로 맞추었다.

“안 그래도, 오늘 다시 물어보려 그랬어요. 목요일에 실행했던 미세 인지 반응검사에서 로필라가 말하기를, ‘스타’의 청각과 시각은 물론, 사고력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대요. 그 말은, 어쩌면 제가 그를 설득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가상 세계에 가서 새 삶을 찾아내자고 말이에요.”

하나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에 걸치고는, 자기 신발을 내려보며 계속 말했다. “절대 그 아이가 재활원에 남아있게 두기 싫어요. 그도 분명 속으로 뭔가를 원하고 있을 거예요. 장담하긴 어렵지만, 그는 어른이 되어보기도 전에 친구와 가족만 잃은 게 아니에요. 그 아이는 자기 삶 전체와, 오른팔을 잃었어요.”

“알겠어요. 저는 단지 당신을 아끼니까 하는 말이에요. 그 아이가 우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이토록 자신을 생각해 준다는 걸 분명 알고 있을 거예요.”



돌아오는 길의 수레는 더 무거웠다. 설명하기 힘든 도시락의 냄새는 하나의 코를 톡 쏘는 듯했다. 상황이 어찌 되든 베루마스 참여 시기를 놓치지 말라는 아이 엄마의 부탁이 반복해서 머리를 맴돌았다. 재활원 사람들은 모두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어깨를 으쓱이며 어쩔 수 없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 또한 시기로 미루어볼 때 쉽사리 눈물을 드러내는 게 그리 현명하지 못한 처세라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들 그걸 안 바랄까.’

위에서부터 흘러내린 밝은 주황색 녹이 유리창이 끼워진 철골 표면에 스며들어 있었다. 담쟁이 모양의 장식용 야외 조명이 있는 곳곳마다 이끼 같은 흔적들이 쉽게 보였고, 수레바퀴는 평화로운 메아리를 계속해 퍼뜨렸다. 하얀 벽에 미쳐 닦이지 않은 연회색 신발 자국은 깨진 도자기로 뒤덮인 산등성이가 추상적으로 드러난 모양 같았다. 하나는 그걸 앞을 보고 걸어 다니라는 경고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테라스로 이어지는 넓은 복도에 천진난만하고, 형형색색의 장난이 묻어 있는 것이 공간을 더 풍요롭게 바꿀 거라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당시 아이 엄마들 중 한 명이 크게 반대를 했다. 그 이유는 과거 벽에 고정된 빨간색 소화기 아래로 작고 빨간 점 한 개가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걸 재활원 바깥의 ‘어느 집단’과 연관 지어 그걸 핏방울이라 해석한 것이었다. 작고 사소한 생각이 주변에 전파되어, 진실로 인식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시기가 그걸 가능케 만들었다. 하나는 그들을 보며 불안과 의심은 서로를 잡아먹기도, 밀쳐내기도 한다는 걸 두 눈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재밌는 건, 나중에야 그것이 케첩 소스였다는 게 밝혀졌을 때였다. 이미 사람들은 여전히 핏방울이라 믿고 있는 상태였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일을 시답잖은 유머로 웃어넘길 줄 알았다.

하나가 보기에 역시나 벽은 하얗고, 따분했다.

위층엔 삶은 감자 냄새와 비슷한 따듯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유리 경계문 너머에 서로를 환자이자, 친구, 또는 특별한 가족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작은 호버크래프트가 착륙할 수 있을 만큼 널찍한 테라스에 휠체어를 탄 두 남성을 제외하고, 서른 명이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서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샛노랑 등받이 철제 의자들이 화단의 조그만 울타리처럼 긴 테이블의 흰 냅킨이 깔려 있는 자리마다 놓여 있었다. 덮개로 씐 난로 옆에 여분의 노랑과 검정 의자 몇 개가 쌓여 있었다. 그들이 손을 움직이며 열띤 이야기를 나눌 때 주위를 떠도는 감정은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을 바꾸는 자개처럼 풍요로워 보였다. 그들의 얼굴 위에 자연스레 생겨난 주름이 화기애애한 시선과 박수로 변해갔고, 복잡한 주제를 단번에 가로지르는 어떤 이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더 큰 웃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타오가 유리 너머로 하나를 발견하자 서둘러 다가왔다. 그녀는 청소도구함을 개조시킨 새 행정실에서 홀로 통신 업무를 담당하는 베트남 여인이었다. 하나가 유리 앞에서 주위를 경계하는 ‘엄마 플라밍고’처럼 곧게 목을 세우자, 금색의 ‘R’이라 돋을새김 된 공 모양의 영사기가 그녀의 전신을 스캔했다. 속이 조금 비치는 양쪽의 반투명한 기둥에 각각 ‘OPEN’이라는 글자 버튼이 나타나더니, 율동적인 부드러운 여러 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로필라, 여성 1명, 인증 완료.”

타오는 문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열리자 그녀에게 뛰어갔다. 무너지기 직전의 수레를 잡고 있는 가여운 행상은 사랑스러운 울상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아침마다 진작에 이렇게 한 곳으로 모여 있었다면, 네가 일일이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렇지?” 그녀가 흥얼대며 한 손으로 수레를 잡았다. 그리고 검은색 금속성 섬유로 덮인 반대쪽 팔로 도시락을 한 보따리 감싸 안았다. 태양빛에 반짝거리는 그녀의 이두박근에 ‘경고: 고온주의.’라는 황금색 글씨가 깜빡이고 있었다.

“고마워, 타오.” 하나는 마치 레몬즙을 들이켠 표정을 지었다. “원래 아이스크림 장수처럼 멋지게 끌고 다니고 싶었는데, 바퀴가 나무젓가락으로 만들어졌는지, 조금이라도 휘청이면 다 쏟아질 것 같더라.”

“멋진 수레야.”
타오가 미소를 보였다. “끼니때마다 전부 여기서 먹었으면 좋았을 것 같지 않아? 봐봐. 저 독특한 검은 바위산도 멋들어지고, 매 끼니마다 파티를 여는 분위기잖아.”

하나는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수레를 밀어 문턱을 올랐다. 수레의 지붕 아래에서 폴폴 피어올라, 바깥으로 날아가는 먼지는 햇빛 때문에 타오르는 작은 산불 연기처럼 보였다. 타오는 익숙한 것처럼 포크가 들어 있는 원통형 나무 뚜껑을 열었다. 일회용 플라스틱 포크들은 벌써 여러 번 쓰인 듯 색 바랜 흰색, 혹은 상아색을 띠었다. 그녀는 화려한 빨간색 다섯 손톱을 어지럽게 움직이며 포크들의 개수를 세었다.

하나는 테라스에 모든 사람이 모여 있는 걸 확인했다. 재활원 사람들은 그녀의 어깨를 다정한 사촌이나 조카처럼 쓰다듬었고, 다정한 인사로 맞이했다. 부메랑 던지기를 좋아하는 제일 나이 많은 환자부터, 숫자 15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선형 계단에서 매번 넘어지는 과부, 그리고 가장 큰 목소리를 가진 시인까지.

“달의 여신님이 오셨군요. 저도 식사 준비를 도와줄게요. 딸애는 아내한테 잠깐 부탁하면 되니까.” “저기 파란 하늘에 떠있는 달 봤어요? 너무 아름다워요.” “하나 씨, 우리도 ‘그곳’에 간다면, 누구나 달을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소원이 없을 텐데 말이야.”

하나를 향한 기계적이고 반복되는 말이었지만, 줄어드는 법이 없었다. 대부분 달에 관련된 자신의 경험으로 재활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당기곤 했다. 달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달에 누워 잠에 드는 경험담은 누구에게나 환상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달의 기지에서 의료인으로 일하는 동안 봤던 특별한 일들을 기억했다: 땅에 지진이 일 때마다 번쩍이는 수 십 개의 푸른 경고등, 일주일에 단 한 번 허락된 월면 선회활동(EVA), 직원들이 지구에서 가져온 개인 물품들이 모여 있는 기억 농장, 검은 하늘의 푸른 구슬을 바라보며 듣는 애청곡 등. 마치 예쁜 리본이 묶여있는 단지에서 암석의 파편처럼 생긴 초콜릿 조각을 꺼내어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선생님 같았다. 달 기지에 있는 식탁에서 물컵을 떨어트렸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현실의 모든 상처를 씻어낸 사람들처럼 굴었다. 육체에 실재하는 속박이나 불편함에 조금의 곁을 내어주지 않는 결연한 사람들처럼, 어떤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만으로 ‘상처’라는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 탓에 테라스 마루 바닥이 덜그럭거리는 높고 낮은 소리를 내었다. 건조 옥수수 팩을 들고서 입을 우물거리는 타오는 두 아이가 각자 자기 로봇 팔과 다리에 매달려서 노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하나는 검은색 필름으로 덮여있는 유리 난간에 두 무릎을 붙이고 있던 젊은 남자에게 걸어갔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난간에 붙은 뭔가를 관찰하듯 자라처럼 목을 쭉 내밀고 움직이지 않았다. 쭈글쭈글한 파란색 스판덱스 바지는 그의 육중한 상체에 비해 턱없이 가녀린 다리뼈를 가리고 있었다.

하나가 조심히 그의 휠체어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그늘로 뻗은 나뭇가지처럼 그의 얇은 목이 덜렁거렸다.

“우리가...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이곳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일까요?”
젊은 남자가 눈이 시린 듯 부르르 떨다가, 위로 치켜떴다. 하나는 가슴 주머니에 있던 분홍 손수건을 꺼내 침으로 흥건한 그의 손을 닦아냈다. 아침 바람에 차게 식은 그의 손가락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은 채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의지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프란츠. 우리가 여길 떠나는 이유는 더 이상 가슴 아픈 이별을 겪지 않기 위해서예요.” 하나는 그의 호기심에 익숙했다. “저는 그곳이 달과 비슷할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 초대받은 사람들이고.”

휠체어 뒤쪽에서 두 무릎을 꿇은 채, 바퀴가 잠기도록 금속 레버를 힘주어 눌렀다.

프란츠가 턱에 힘을 주며 얼굴을 부르르 떨었고, 힘겹게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맞아요. 그리고, 저는 저 나무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는 바로 앞에 있는 하나를 외면한 채 다시 배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때 타오가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요구르트는 내일도 충분히 먹을 만큼 남아돌고, 도시락은 몇 개가 남아. 빅토리아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글쎄, 아마도…” 하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유리문이 열리고는 아미르가 들어왔다. 그의 바지 무릎 부분엔 녹갈색 풀물이 스며들어 있었다. 뒤로는 촉촉한 얼굴로 한가득 웃음을 짓고 있는 6살 쌍둥이 자매가 뒤따랐다. 그들은 아직 흥이 덜 사그라든 것처럼 소리를 질렀고, 방금 고양이 세수를 한 것처럼 앞머리와 손에 물이 흥건했다.

“배 나무 가지 한 개가 부러져 있었는데, 도대체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네?” 아미르가 커다란 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으며 눈에 뻔한 메시지를 담아 하나를 쳐다보았다. 가방엔 황색 잔디와 진흙이 묻어 있는 작은 삽, 장난감 불도저, 그리고 화난 얼굴을 한 노란 고무공 같은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나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보였다.

“아 참, 설교자는 아직 자고 있었어. 이따가 점심쯤에 내가 다시 확인할게, 지금 깨우면 또 골치가 아파질 테니까. 빅토리아는 식욕이 없다면서 옥상으로 갔고, 그리고 스타는…”

아미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생했어. 얘네들은 추운 데서 한 바탕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나 봐.” 타오가 휠체어의 남자 옆에서 조심스레 숟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하나는 더 넓은 공간을 위해 수레를 기둥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한쪽 발로 살짝 틀어진 바퀴를 툭툭 찼다. 남은 도시락들을 한 꾸러미 챙긴 뒤, 공 모양 영사기 앞으로 걸어가 똑바로 고갤 들었다.

“얘들아, 맛있게 먹어. 나는 빅토리아한테 다녀올게.”

그녀가 뒤돌아 말했다.

프란츠는 뭔가를 가리키듯 전보다 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

하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갤 들어 올렸다.




작디작은 푸른 점 위에서,

<블루닷 이펙트>

The Blue Dot Effect

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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