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야기는 현재(지구에서)와 과거(달)가 번갈아 가며 진행됩니다.
[지구에서]
사람들은 감청색 하늘 아래에서 밤새 찬 공기를 맞았다. 새벽의 습한 추위는 살을 베는 고통이었다. 그들이 목을 움츠린 채 건물 안으로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서리 내린 듯 굳어버린 외투를 벗어던지는 것이었다. 턱을 오들오들 떨었고, 주먹 쥔 손은 풀기 힘들어 보였다. 먹먹한 약품 향기가 도는 새벽의 라운지엔 계단을 오르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하나는 그 소리에 둔탁한 것에 한없이 두들겨 맞는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성의 없이 툭툭 바닥에 던져지는 사람들의 발걸음엔 사실 아무 의미도 담겨있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에 문턱을 밟은 그녀는 재활원의 임시 출입구를 잠갔다. 손잡이에서 손이 떼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모두가 똑같은 시간, 똑같은 생각을 겪으며 서로를 닮아 있었다. 누구도 더는 앞장서서 황량한 공백을 채우거나 미래에 대한 잡담조차 꺼내려하지 않았다. 바깥의 짙푸른 하늘은 희미한 구름들이 조각조각 찢어져 얼룩처럼 남아, 도무지 씻겨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요.”
그녀는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멈추고는 그들을 불러 세웠다.
“제가 소중한 하룻밤을 전부 빼앗은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합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어둠 속에서 지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모든 방향에서 발걸음 소리들이 들려왔다. 계단에 서있던 사람들 마저 전부 바닥에 내려왔다.
"미안할 필요 없어요."
그들이 하나를 꼭 껴안았다. 각각의 포옹이 마치 날 끝에 달콤한 맹독이 묻어있는 단검 같았다.
차갑게 말라버린 새벽. 딱히 뭔가를 찾기 위한 건 아니었지만, 하나는 재활원 곳곳을 거닐었다. 주위에 발목을 잡아끄는 좋은 게 남아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예고도 없이 누군가 자신을 떠나버린 날이라도, 그녀는 걸음을 하는 곳마다 기쁨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큰 걸음으로 벽화 앞을 지났다. 흰 고래와 검은 파도가 한데 어우러진 장면이었다. 고래의 어두운 눈이 그녀를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남색 눈 안에 고요한 힘이 있었다. 고래는 몸을 돌려 아래로 더 깊이 헤엄쳤고, 요동치는 물살에 고집 센 괘념들은 풀어진 실타래처럼 이리저리 흩어졌다.
떠나간 고래를 뒤쫓을 수 없었다. 뒤에 남겨질 것들이 곧 떠나갈 것들에게 기억되려 안간힘을 쓰는 건 이토록 자연스러웠다.
어둠보다 조금 더 밝은 공간에 드러 선 그녀는 드넓은 아래층을 살폈다. 기다란 타원형 나무 테이블 옆 바닥에 뭉툭한 타원형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는 소리 없이 모습을 바꾸었다. 옅푸른 새벽의 빛 속에서 누군가가 혼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난간에서 몇 걸음 물러섰고, 눈을 찌푸렸다. 다른 모든 게 죽은 듯 멈춰 있는 중에 뭔가가 제자리서 커졌다가 움츠러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엔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더 이상 서 있는 것도, 앉은 것도 아니었다. 그건 위층의 하나를 올려보았다. 역시 몸짓에 비해 대단히 조용한 누군가의 형체가 아무리 흐릿할지라도, 하나는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하나? 너야?” 아미르가 희뿌연 달빛 속으로 걸어왔다.
“너희 무리는 방금 도착했구나.”
“아미르?”
“응.”
“우리도 방금 돌아왔어. 숲에 하도 갈래길이 많아서.”
“수고했어.”
그가 짧게 말했다. “우리도 산에서 조금 헤매긴 했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탈출한 흰 꼬리들이 이 지역 주변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미안해, 내가 정말 바보처럼 굴어서 모두의 마지막날 밤을 빼앗아 버렸어.” 하나가 착잡한 숨을 뱉었다.
“아니야, 너도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잖아. 그러니 사과할 필요는 없어.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좀 자는 게 어때? 수송기가 도착하기 전에 한 번 더 스타를 찾으러 나가 보자. 그래야 확실히 하고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녀는 아미르가 두툼한 어둠 속에서도 미소를 짓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같은 길도 여러 번 살피면 좋잖아, 그렇지?”
평소 아미르의 모습대로 차분하고 무거웠다. 그녀의 과열된 생각 회로와 공통점을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따라 마음 한편에 그의 평온을 향한 의심이 한 가닥 피어올랐다. 하나는 그의 앞에서 처음으로 팔짱을 꼈다. 묻고, 따지고 싶은 말들이 안에서 끓어올랐고, 딱히 이유도 없이 불편한 마음은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그녀를 찔러댔다.
그녀는 철제 계단을 밟고서 그가 있는 마루 바닥으로 내려갔다. 방금 전 시간들이 필름에 맺힌 상처럼 눈앞에 지나가는 순간인 듯 잠잠했다. 아미르는 기도를 멈추고, 바닥에 펼쳐진 매트 양쪽 끄트머리를 잡고 돌돌 말고 있었다. 평소 매일 같은 시간 겨드랑이에 매트 두루마리를 낀 채 재활원의 빈 방을 찾던 그의 모습이 떠올렸다.
“근데, 왜 아직 여기 있었어? 나를 기다린 거야?”
아미르가 바지 무릎에 진 주름을 툭툭 털며 장난스레 물었다.
“혹시 그렇게 기도하면, 알고 싶었던 것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모든 것들에 말이야.”
하나는 검은 허공에 대고 말을 꺼냈다.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한 것 같아 곧바로 입을 꽉 다물었다.
“글쎄, 이건 뭔가를 얻기 위한 게 아니라서. 그리고 당장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아미르가 고갤 기울인 채 느긋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네가 만드는 요거트가 아니라면 말이지.”
“그렇구나. 나는 기도를 해 본 적이 많지 않아서 너 만큼 잘 알지 못해. 근데 만약에 신이 있다면... 우리에게 이토록 차갑게 굴 수가 있을까?”
그녀의 목소리는 버틸 수 있는 무게의 한도를 초과한 것처럼 억눌려 있었다.
“우리가 뭘 잘못했길래, 종말을 맞이해?”
“하나, 우린 잘못한 것 없어. 그런 말 하지 마.” 아미르가 당황한 듯 손을 저었다.
“무서워도 일부러 괜찮은 척했던 때가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어. 조금도 나아질 낌새는 없고, 모든 건 끔찍하게 변해 가.”
하나는 흐릿해지는 의식을 단단히 붙들기 위해 이마를 짚었다. 어둠 속에서 아미르가 그 특유의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걸 생각하니, 더 어두컴컴한 구석을 찾고 싶었다.
“왜 지금일까? 말해 줘.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말로 차마 꺼낼 수 없는 생각들로 충분히 괴로웠어. 더 나아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게... 속으로 뭘 생각하고, 뭘 붙잡아야 해?”
탁한 한숨 소리가 들려오자, 하나는 심장이 목구멍을 때릴 듯이 뛰는 걸 느꼈다. 두 팔로 온몸을 웅크린 채 앉았다. 알지 못하는 걸 죽일 듯 노려 보려 본 탓이었다.
“하나, 나는 그런 식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어.”
평소의 아미르 답지 않은, 풀 죽은 목소리였다.
“부탁이야... 아미르, 네가 기도할 때마다 얻는 게 뭔지 말해줄래?”
그는 바닥에 움츠려 앉아있던 그녀에게 걸어갔다.
“뭔가를 얻으려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지금 갖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다 말했어. 그게 다야.”
어떤 아침은 다른 날들 보다 새의 지저귐이 더 멀리 퍼졌다. 높고, 가느다란 새들의 지저귐은 말다툼, 혹은 존재의 중심을 유지하려는 몸부림 같았다. 아이들이 뛰놀며 내지르는 비명도 근처에 있었다. 남은 시간에 개의치 않는 춤과 노래가 이어졌다. 미닫이 유리문 너머에서 바닷물처럼 밀려온 햇빛이 하나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는 피로를 핑계로 온기 속에 좀 더 오랫동안 묶여 있고 싶었다. 어제저녁부터 새벽까지의 시간이 모두 씻겨 내려갈 때까지 그 온기는 몸을 숨길 은신처였다.
잠시 후 팔에 고통이 일었다. 어둑한 새벽엔 없었던 죽은 나무가 그녀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해골의 손가락 뼈처럼 흉측한 가지들이 눈앞까지 다가왔을 때 그녀는 어깰 흔들며 눈을 떴다. 소파는 다리를 쭉 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붉은 체크무늬 담요가 발 끝까지 덮여 있었다. 생기가 다 빠져나간 듯한 공간에 그녀는 혼자였다. 정지한 물건들 위로 쏟아지는 빛 역시 모양 그대로 굳어버린 듯 보였다. 질책이나, 죄책감도 그런 공간 속에선 제힘을 드러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담요를 걷었고, 철로 감싸인 것 같은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다양한 기구들로 가득한 보행 교정실의 공기는 따스했고, 떠다니는 먼지로 가득했다. 아미르와 나눴던 대화는 희미하게 사그라져,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순수한 태도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이해하긴 어려워도, 결코 낯설고 이질적이지 않았다. 지구의 땅을 밟을 수 있는 여분의 시간 동안 그녀가 다시 찾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햇살 깔린 마당에서 한 여자아이가 두 팔을 벌린 채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균형이 불안정할 때마다 팔을 날개처럼 내렸고, 목을 확 움츠렸다. 앞섶에 두 개의 주름진 흰색 주머니가 달린 남색 치마를 입은 아이는 잔디와 보도 사이를 가르는 매끄럽고 길쭉한 돌 위로 한 걸음씩 걷고 있었다. 축제 한 복판을 가로질러 다녀도 이상할 게 없는 고운 옷차림이었다.
하나는 문가 앞에 섰다. 가장 가까운 기둥 옆에 아이 엄마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은 일부 금속 부품들이 떼어진 재활 기구 침대 위에 마치 해변 호텔의 피서객들처럼 앉아있었다. 들판의 남자아이들은 평소에 손도 덴 적이 없던 쇠 파이프를 검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그토록 폭력적인 놀이를 엄마들 앞에서 행하는 건 아주 처음이거나, 마지막일 게 분명했다. 특별한 날이 그걸 가능케 했다.
어른들의 대화가 웅웅거렸다. 불만 가득히 투덜대는 음색이었다. 철사로 놋쇠 그릇을 비비듯 성가신 소리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흐릿할뿐더러, 내용도 불분명했다. 하나는 유리문에 귀를 가져갔다. 더 뚜렷하게 듣고 싶었다.
“흰 꼬리 폭도들이 무슨 성대한 모임이라도 열 작정인가? 멧돼지들처럼 용케도 때를 잘 맞춘 것도 신기할 따름이네. 나는 스타가 마지막으로 크게 야망을 한 번 가져보려는 거라 확신해요.”
“그 어린아이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이제 와서 그 폭도들을 찾으러 갔겠어요?”
"어리다니? 그도 따지고 보면 어엿한 십 대 남자예요."
바깥엔 대부분 여성들과 아이들만 남아있는 듯했다. 타오를 포함한 나머지 일꾼들은 그곳에 없었다. 엄마들 중 한 명이 아이들에게 어떤 손짓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하나는 재빨리 나무 널빤지벽 뒤로 몸을 숨겼다. 숨을 이유를 단 하나도 떠올릴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넬 수가 없었다. 다른 곳을 둘러보았다. 건물 반대편엔 주로 흙길을 맨발로 거니는 노인들이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세찬 물줄기가 끊인 지 오래인 작은 분수대에 걸터앉아 자기 못다 한 삶의 이야기들을 번갈아가며 나누고 있었다. 마치 볕 아래서 일광욕을 즐기는 비둘기들 같았다.
정원 한쪽 모퉁이엔 설교자가 고개만 들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 두 눈은 반짝였고, 입을 크게 우물거렸다. 그는 때에 찌든 보라색 망토 밖으로 뭔가를 단단히 움켜쥔 왼손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에 든 뭔가를 입가로 가져갈 때마다 누가 빼앗기라도 할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특정한 목적을 가진 듯 나무 그늘 안에만 머물렀다.
아이 엄마들의 따가운 눈초리 때문일 수 있었다.
하나는 재활원 사람들의 아침 식사를 생각했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가장 적절한 명분이었다. 그녀는 공 모양 영사기 앞에 다가가 양팔을 벌려 전신을 스캔했다. 두툼한 미닫이 문이 옆으로 움직였다.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은 잠시 멈추었고, 청명한 기운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귀와 코 끝이 기분 좋게 알알했다. 곧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사뿐히 들추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햇빛은 그녀의 눈가에 황금빛 붓 자국을 남기며 얼굴에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눈만 크게 뜨고서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발 안 시려요?”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있던 여인이 갈색 머리를 뒤로 넘기며 하나에게 물었다. 햇볕에 만들어진 얼굴의 손 그늘 속에서도 불만과 연민이 반쯤 섞여있는 표정이 두드러져 보였다.
하나는 고갤 숙였다. 하얀 두 발에 핏기가 다 빠져있는데,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떠올릴 수 있던 건 어제 스타가 사라질 무렵, 그 아이도 맨발이었을 거란 사실뿐이었다.
“우리 다 간식 같은 것들로 간단히 해결했으니 식사 준비는 걱정 마요. 매번 우릴 위해 숭고한 일을 해 왔는데 괜히 당신을 마지막 날까지 고생시킬 수 없으니까.”
“맞아요. 저기 의자 위에 비트 주스랑 믹스너트 통을 올려놨는데, 조금 드시겠어요? 제가 아까 병실 위층을 마지막으로 돌아다니다 수납장에서 발견했어요.”
그들은 말없이 미소만 보였다.
팔걸이에서 다리까지 이어진 형태의 정원용 의자 위에 다양한 종류의 견과류가 반쯤 찬 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나무 탁자엔 빅토리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노트 앞에서 하는 일엔 변함이 없었다.
“타오랑 나머지 사람들은 언제 나갔어요?”
“두 시간 전쯤? 타오가 안 보이길래, 당신도 이미 함께 나간 줄 알았죠. 어디에 있었어요?”
“어제 새벽에 저기 소파에서 잠이 들었어요. 주위에 절 깨워줄 사람이 없었나 봐요. 그들은 아마도 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몰랐을 거예요.”
하나는 시선을 내린 채 등을 돌렸다. “저도 나갔다가 그들이랑 함께 돌아올게요.”
갑자기 누군가가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
“하나, 가지 마세요. 제발. 이런 말을 해야 해서 안타깝지만, 이미 늦었어요. 아까 스타를 찾으러 나갔던 두 무리가 곧 돌아올 때가 됐는데, 지금 당신마저 밖으로 나간다면 우리가 언제 여길 벗어나죠?”
“네?”
하나는 나무 벽에 짚은 손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렇지만, 스타에게 무슨 일이...”
“부디 우리 마음도 신경 써주세요. 우리와 함께 있어 줘요, 하나. 부탁할게요.”
갈색 머리의 여인이 입으로만 꾸며진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갤 돌렸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걸 바라는 눈초리였다.
하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빅토리아의 손에 들린 만년필은 종이 위에서 춤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폐쇄 도시의 전장 한가운데서도 지금과 같은 글 쓰기를 계속했으니, 어떻게 보면 그 펜은 엄중한 칼의 끝부분과 닮아 있었다.
“어젯밤에 네게 별일 없어서 참 다행이다.”
빅토리아는 공책에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하나는 여전히 억누르기 힘든 의문으로 가득했다. 빅토리아의 남색 공책조차도 끔찍한 과제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저지르고, 지껄이는 모든 게 답이 될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녀는 변할 수 없는 시간들로 채워진 공책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었다.
“도로와 계곡 사이 길을 따라서 내려가려 했는데…”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멀리서 아이들이 한 차례 흥에 겨운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떨었다. 타오와 대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가 입구 쪽 자갈밭 위로 터벅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의기소침한 미소들이었다. 손은 전부 비어있었다. 타오는 어떠한 대답을 대신하려 멀리서부터 고갤 저었다.
“그러니까, 빅토리아... 제가 말하려 했던 게 뭐냐면...”
하나는 다시 말을 이어가려 했다. 커다란 거울 앞에 모인 까치떼처럼 시끄러운 아이들의 말소리에 이성이 꺼져갈 것만 같았다. 생각이 전부 달아나는 듯했다.
“계속 얘기하렴. 듣고 있으니.”
빅토리아는 그저 종이 위에 얌전한 물줄기를 흘리듯 뭔가를 적고 있었다. 줄에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독일어 글자들이었다.
“저는 계속 살아있고 싶은데... 스타를 그곳으로 데려가지 못해서 그게 저를 두렵게 만들어요. 이게 한 번만 주어지는 삶인데, 제가 망할 실수를 저지른 거예요... 이 섬은 곧 텅 비어버릴 텐데, 내가 아이를 그렇게 놓쳐버렸어요.”
빅토리아는 펜을 내려놓았고, 광채가 담긴듯한 눈으로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가에 힘을 주어 탁자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는 지팡이가 옆으로 쓰러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하나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러고는 작은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등을 다 감쌀 것처럼 쓸어내렸다.
하나는 그녀의 손에 얼굴을 묻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는 내 생각 속에 영원히 있을 거예요, 그래서 도저히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하나는 누군가가 바람도 불지 않는 살굿빛의 따스한 공간으로 자신을 데려간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시 눈을 뜰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빅토리아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 모든 건 계속되는 거라고. 그리고 끝이 사실은 더 높은 차원에서 다음 시작을 뜻하는 실마리인 거라고.”
하나는 다른 이를 실망시키거나, 누군가에게 실망하기도 싫었다. 오래된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더 이상 듣고만 있기 어려웠다.
“너도 잘 알다시피, 달에 있을 때 하늘을 보면 무한의 검정뿐이잖니? 그런 우주에서 우리가 얼마나 위태로운 점 한 개에서 기적처럼 매일을 살아왔는지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 모든 정성을 들여야만 겨우 겉껍질을 관찰할 수 있을 것처럼 매우 조그마한 점 말이야. 정말 특별하지. 그렇다면, 온통 새까만 우주가 우리에게 숨김없이 나타내는 게 죽음 말고 뭐가 있을까?”
“네. 맞아요. 근데 저는 그 작은 점 위에서 소중한 걸 구해내지도 못했고, 되려 떠밀어 버렸어요.”
빅토리아는 두 손으로 탁자를 짚은 채 하나의 대답을 곱씹었다. 그녀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
“나도 내가 지금 희망을 믿는 건지, 아니면 그저 순진한 아이가 그러듯 스스로 눈을 가리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녀는 한 손으로 허릴 짚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삶에서 여러 번의 겸허한 결정들을 내려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이성이었다.
깃털 모양 구름이 지나가자 아침의 빛이 탁자 위에 올려진 노트를 비추었다. 겉표지에 새겨진 문양에 맞춰 하얀빛이 차올랐다. 그걸 지켜보던 하나가 탁자에 한 손을 올렸다.
“이 노트에 쓴 것들 중에 제게 도움이 될 만한 구절이 있을까요? 가상 세계에서 이걸 읽을 때까지 못 기다릴 것 같아서요.” 그녀는 목소리의 떨림을 숨기려 다른 손으로 다리를 붙잡았다.
빅토리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곧 자기 노트를 다시 집어 들었다. 재활원의 지난날들이 담긴 종이들을 손으로 넘기는 듯했다.
“여기, 바로 이 구절이다. 여길 읽어봐, ‘과연 나를 포함한, 이들 모두 결국엔 고요히 반복하는 회오리 속에서 반짝였다가 또다시 잊히는 먼지 알갱이라 할 수 있을까?’라는 부분을.”
하나는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갤 틀었다.
“네. 그것 말고 뭐가 더 있겠어요? 이대로 잊히는 것만큼 같잖은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아니야. 하나.”
빅토리아가 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아니야. 내가 말하려던 건 우리가 그저 그런 먼지가 아니라는 거야. 새까만 우주가 오직 죽음으로 가득한 게 아닌 것처럼 말이지.”
하나는 괜히 햇빛에 눈이 부신 척 손을 이마에 가져갔고,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에 옥죄여 이도저도 못 하는 스스로를 향한 분노였다. 해결되지 않는 굴레를 조금 전 빠져나왔지만, 같은 길을 처음부터 다시 걷는 상황이었다. 눈물이 밀려오는 건 말도 안 되게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먼지가 되어 끝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지구에 대책이나 뭔가가 더 남아 있다거나, 아니면 그 망할 우주의 돌덩어리들이 지금이라도 마법처럼 방향을 틀 것이라고 말해주세요. 제발요.”
하나는 일어서 있을 힘조차 없는 것처럼 힘겹게 숨을 쉬었다.
"하나."
옆에서 타오가 다가왔다. 따듯한 기계 팔이 천천히 하나의 어깨를 감쌌다. 빅토리아 역시 사랑을 기억하는 손으로 하나의 손목을 꽉 잡았다. 그리고 활짝 펼쳐진 노트를 내밀었다.
태초부터 우주는 언제나 생명의 꽃을 피울 준비로 가득했다. 우리는 역동 치는 회오리 속에서 먼지로 태어나고, 언젠가 다시 그 안으로 돌아가 별이 된다.
탄소라는 열쇠로 움직이는 거대한 순환을 누가 감히 멈출 수 있을까? 내가 잊혀도, 그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우주에서 별, 별에서 또 우주로.
그렇게, 우리는 끝없는 여행을 이어간다.
하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재활원 건물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정원의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하나!”
뒤에서 날아오는 힘겨운 목소리도 하나에겐 두꺼운 솜에 감싸인 자장가처럼 뿌옇게 들릴 뿐이었다. 눈물로 왜곡된 시야는 정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비틀린 나무로 이루어진 숲처럼 만들었다.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현실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구석에 있던 설교자도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지만, 몸은 구겨진 종이처럼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조슈아는 그녀가 지나갈 때 눈을 피했고, 옆쪽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프란츠는 기울어진 고개로 그녀의 걸음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이 엄마들은 마지막 날의 기대한 적 없었던 순간들을 견디기 위해 기도를 읊듯, 소리 없이 입만 움직였다.
발이 닿는 곳이 더는 익숙한 바닥 타일이 아니었다. 재활원에 처음 왔던 날부터 겪은 모든 날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그녀는 우두커니 멈춰 섰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짚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그녀는 절실히 듣고 싶은 선명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하지만 시커먼 뭔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결국 상상은 끝났다. 그녀는 한 번도 스타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볼에서 무겁고,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푸르스름한 하늘 가운데에서 여러 빛줄기들이 피어나는 듯했다.
“하나, 진정해 봐. 아직 다른 무리가 돌아오지 않았잖아, 그렇지? 이리 와서 나랑 얘기 좀 더 해.”
뒤에서 타오가 외쳤다. 하나는 고갤 저었다.
“난 괜찮아. 애들한테 가봐, 타오. 걔네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야지.”
“잠깐만. 이 꼬마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하나는 방금 전까지 깔깔대던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화단 쪽에 있어. 내가 데려올게.”
매 걸음이 진흙탕처럼 질척대는 느낌이었다. 몸은 주인의 말을 거역하는 것처럼 무거웠고, 마음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흰색 아치 통로를 지나자, 그녀는 나무 주위를 둘러선 채 머리를 갸우뚱대는 아이들을 찾을 수 있었다.
“얘들아, 어서 어른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얼른.”
한 남자아이가 손으로 나무를 가리켰다.
“그런데, 이 나무는 왜 이렇게 생긴 거예요? 잎도 전부 다 떨어졌고, 가지들도 다 휘어 있어요.”
하나는 아이의 손가락 끝이 향한 화단으로 고갤 돌렸다.
세 난쟁이들은 간 밤에 무슨 일이 벌어진 줄 모르고 포대자루, 삽, 칼자루만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엔 촘촘한 주름과 곰팡이 같은 끈적한 회백색의 미세 기포들로 온 표면이 뒤덮인 배 나무가 있었다. 괴담 속, 땅에서 솟아난 시체의 손뼈를 눈으로 직접 보는 기분이었다.
“풍선으로 만든 나무 같아. 바람이 빠진 것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저기를 잡아당기면 고무처럼 쭉 늘어날걸?”
“아니, 이 나무는 지금 아픈 거야. 몹시 심각한 감기에 걸렸어.”
아이들이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잔혹한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현장에서나 발견될 수 있을 법한 형태였다. 온갖 방향으로 가지가 비틀어져 있었다. 추악한 지옥에서 그리 멀리 달아나지 못한 손이나, 참혹한 비바람이 치는 날 하늘에서 번쩍인 번개가 그대로 굳어진 모습이었다. 심지어 아이들의 눈에도 그 나무는 땅 속 뿌리까지 생명을 거머쥘 힘이 없어 보였다. 죽은 뒤에도 뻣뻣한 갑옷을 두르고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쓰러지지도 못하는 병사 같았다.
하나는 나무줄기에 손을 뻗었다. 모든 촉감이 고양이의 혀처럼 까칠했다.
어른들의 부름에 아이들은 부리나케 달려갔다. 하나는 나무에서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심장에 이어진 질긴 핏줄이 모두 끊어져 제멋대로 박동하듯 가슴이 아팠다. 한꺼번에 많은 생각들이 들이닥치고, 그중 하나가 갈고리에 걸린 것이었다.
아치형 통로 너머에서 타오가 나타났고,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는 검은 방울들처럼 부풀어 오르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듯했다. 타오에게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다. 다른 건 모두 사라지고, 애타는 기분만 남아 있었다.
“수송기가 울릉도에 거의 다 도착했데! 다른 무리도 지금 바로 앞이야!” 타오가 엄지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하나는 생각을 멈추기로 다짐했다. 그녀는 검지 손가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고, 잠깐 시간을 달라는 손짓을 보였다. 그리고 곧장 아치 통로 반대편에 난 벽돌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야!”
하나는 우거진 수풀을 무시하고 달렸다. 곧 알아들을 수 없는 갈라진 목소리들이 뒤에서 두세 번 더 메아리쳤지만, 무성하게 자란 나뭇가지와 수풀을 뚫을 수 없었다. 볼과 손등은 따갑고 쓰라린 상처들로 점점 붉어져 갔다. 길을 잃거나, 흰 꼬리들을 정면으로 마주칠 가능성도 한 무더기였다. 그러나 걱정을 모두 다 내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계속 숲 속을 달렸다. 지구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머지않아 이름을 잃게 될 공간에서 어떤 관계에도 발목을 잡혀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어디에도 겁에 질려 숨어들 수 있는 그늘은 없었다. 고통조차 희미했다. 희미한 숨이 의식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이마가 깨질 듯이 진동했고, 땀에 젖은 상처는 통증을 배로 키웠다. 먹구름처럼 커다랗고 깊은 어둠이 하나의 시야에 나타났다.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길을 막는 두꺼운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천천히 퍼지는 공기의 파동이 그녀의 귓가를 다정하게 만졌다. 하늘에서 날렵한 비행체가 하나를 마주 보는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끼로 덮인 채 오래전 부러진 통나무 위로 올라갔다. 땀방울이 얼굴에 비처럼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늘에 남은 흔적들만 가만히 응시하고 싶었다. 수송기가 지나간 자리의 양옆엔 아침의 일출에 버금가는 밝은 금빛 가루들이 선명한 직선 자국을 남기며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멀리 날아갔지만, 하나는 빛의 형체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이 고혹적인 소리를 냈고, 눈부셨으며, 달콤한 것이었다.
Epilogue
길고 어두운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서 태양, 혹은 데이지 꽃잎 모양으로 빛이 뻗어나갔다. 아희는 오래전부터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걸어왔다. 지치거나 목이 마르지 않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계가 있을 리 없었고, 그 시계를 걸어둘 벽이나 천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 처음부터 함께 걷기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키가 어른의 허리까지 오는 아이부터 자세가 바른 노인들까지, 다들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듯했다. 당당하고 차분한 그들의 발걸음은 긴 행렬의 선두에서부터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 확실했다.
몹시 기분이 좋아 보이는 큰 키의 백인 남자가 자신의 팔에 난 털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그는 털이 여전히 자신의 것이란 게 믿기지 않는 듯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친구에게 격양된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배, 옆구리, 그리고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매끈한 뺨을 차례로 문지른 그는 오늘 자식이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걷는 내내 싱글벙글했다.
하나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보았다. 예전엔 그 근처에도 머물지 못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했다. 이제는 그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흐릿했지만, 중요한 건 지금 당장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를 이리로 데려왔을 때 그녀는 마치 바다에 표류하다 올라가 쉴 수 있는 나무 널빤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왜요?"
하나는 수평선처럼 고운 그의 눈썹을 보았다. 맑은 눈동자, 엄지손톱 같은 귓불로 시선을 옮겼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머뭇거리는 중에 그는 다시 고갤 돌려 앞 행렬을 기웃거렸다. 분명 그는 스타였다. 창백한 안색으로 치과 의자처럼 생긴 1인용 소파에 누워 천장에 달린 빨간 조명들의 수를 세던 그 소년이었다.
그가 하나의 왼손을 잡아당기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바깥이에요."
어느새 터널 끝의 빛은 그들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넓은 날개 같은 빛이 지나쳤다. 익숙한 모양의 풀과 나무들로 가득한 숲의 한가운데였다. 하나는 첫 발을 내민 순간 발가락들이 케이크처럼 부드러운 흙 속으로 파묻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터널 안에서 빛만 보며 걷느라 맨발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멀리서 새들의 지저귐이 울려왔다.
스타는 거칠게 고갤 돌려가며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지 못했다. 온갖 것들이 만지고, 맡고, 탐구할 대상이었다. 하나는 소년이 낯설었다. 그를 처음 만난 사람처럼 여기는 자신과 그런 두려움들이 평안했던 마음 한 구석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흥에 겨워 자신의 진짜 이름이라도 알려주려 한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귀를 틀어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사기극에 목적도 모른 채 소모되어 버린 단역이 되는 상상만으로 부끄러움이 목구멍을 꽉 틀어막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정신은 마침내 그녀가 청소할 수 있던 방처럼 공허했기 때문에, 작은 먼지들이 이제 주의를 빼앗을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잠에 들기 전 입었던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들에게 배정된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터널을 나와 베루마스에 진입한 순간부터 행진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상 세계에서 태어나는 건 잠들 때와 다른 장소에서 깨어나는 것이었다.
"저기로 가보고 싶어요." 스타가 손으로 내리막 언덕을 가리켰다.
먼 아래에 파인 골짜기는 거대한 호수의 반짝이는 가장자리와 맞닿아 있었다. 물이 높은 산과 그 뒤로 우뚝 세워진 도시 건물들을 거울처럼 비춰 마치 위 아래가 뒤바뀐 두 세계가 공존하는 듯 보였다. 호수의 윤슬처럼 매끄러운 연두색 잔디밭에 하나는 빈 심장을 다시 뛰는 걸 느꼈다. 허릴 숙여 손 끝으로 이파리를 스치자 따스한 잔디에서 상큼한 하늘의 향이 피어올랐다. 부모님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까지 갈 길이 멀었지만, 그녀는 잠시 푹신한 풀 위에 앉아 뒤로 땅을 짚었다.
소년이 맛보고 싶은 꽃을 발견한 나비처럼 언덕 위를 노니는 걸 보니 입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원래부터 그런 아이였던 것처럼, 상처나 연민이 다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는 뛰고, 넘어지고, 두 손으로 땅을 밀며 다시 일어섰다. 더는 검은 하늘에 뜬 푸른 지구가 없어도 그녀가 느낄 수 있는 소중함이 있었다.
근심은 그런 순간에야 사라지는 거짓이었다.
작디 작은 푸른 점 위에서,
<블루닷 이펙트>
The Blue Dot Effect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