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을 하면 뭐 하나
여행을 시작한 지 얼추 80일은 넘은 것 같다. 시작할 때는 먹구름 잔뜩 끼여있는 겨울이었는데, 지금은 구름 한 점 없는 날이 많다. 분명 파리에 상륙할 때는 이렇게까지 긴 여행을 갈 생각이 없었는데 계속 반복되는 여정 속에 온 김에 마시고, 먹고, 구경하고 별 짓을 다하면서 슬슬 정신줄을 놓아가는 것일까? 정신 차려보니 벌써 슬로바키아까지 와있다.
중간중간 바뀌어버린 계획도 많았다. 원래는 스위스를 갈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온 김에 유럽 정상 한번 찍어봐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서 벨포트(롱샹 성당)에서 바로 인터라켄으로 직행해 버렸다. 정보도 하나 없이 그냥 가서 융프라우 패스를 4일 치를 결제하고 피르스트, 융프라우, 멘리헨, 라우터브루넨, 그린델발트 등 근교를 미친 듯이 순회했다.
스페인도 원래는 한 달이나 투자해서 둘러볼 생각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바르셀로나만 둘러보고 바로 프랑스 남부로 다시 넘어오는 게 목표였는데, 이왕 온 거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는 보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남하하기 시작한 게 계기다. 덕분에 지상낙원 같은 스페인 남부를 즐길 수 있었다.
스페인에 투자한 한 달 때문에 남프랑스는 기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본래의 계획은 바르셀로나 이후 몽펠리에, 카르카손, 아비뇽, 마르세유, 칸, 생트로페, 니스 등등을 즐기는 것이었으나 남프랑스에 시간을 투자하면 동유럽까지 못 갈 것을 우려하여 마르세유와 니스만 보고 넘어갔다. (니스의 바다는 천국이다)
이탈리아는 계획대로 잘 다니긴 했으나, 미리 예약해야 하는 "최후의 만찬"을 예약을 안 하고 간 탓에 못 본다거나, 머리에서 피가 터지거나, 마약쟁이랑 실랑이를 벌이거나, 바가지를 당하는 등 하도 사건사고를 달고 다녀서, 시달리는 여행이었다. 특히 로마에서 첫날부터 걸린 승모근의 담을 베네치아, 류블랴나, 부다페스트를 거치는 동안 무려 보름 동안이나 달고 살았다. 담 초반이었던 로마에서는 매일 아침 기상할 때마다 관광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고는 했다....
동유럽의 초반 계획은 베네치아부터 출발해 트리에스테를 거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7일 안에 보고 헝가리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의 주요 관광지가 남부 해안에 몰려 있는 것을 알고 계획에서 배제하여 류블랴나에서 부다페스트로 직행했다. (기차 10시간 탔다.)
무수한 수정과 첨삭, 계산과 즉흥 속에 도시들의 여왕, 파리에서 시작한 나의 여행은 조용하고 고즈넉한 동유럽의 작은 도시, 브라티슬라바까지 왔다.
나는 잠시 이 순간 우연히 시작한 여행이 마치 인생을 닮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갑자기 와서 두서없는 다양한 경험을 하며 나아간다. 기분 좋은 일도, 분노가 치미는 일도, 가슴 아픈 일도 "나"라는 노트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겨가며 다음 장을 써 내려가는 것이 마치 인생의 축약본 같지 않은가.
(대부분의 이미지 출처는 부다페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