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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 클라라 May 09. 2023

‘신노인’이 되기 위해 나는 계속 달린다!

러닝 크루에 가담하고 말겠어!

  

한강변을 달릴 때 러닝 크루(Crew) 들을 보게 된다. 대부분 20~ 30대의 젊은이들이지만 드물게 중년의 남녀도 있다. 달리기 인구가 증가하면서 러닝 크루들이 많이 결성되어 있어서 서울에만도 20~ 30여 개의 크루들이 주 1~2회 정기적으로 또는 비정기적으로 모여 함께 달린다고 한다. 달리기라는 하나의 공통분모 하에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기도 하고,  지역별, 연령별로 세분화된 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인터넷 카페나 인스타그램 또는 ‘소모임’이라는 어플에서 모임을 검색해서 가입할 수 있고 다양한 달리기 챌린지 등에 도전해 볼 수도 있다.

    

9개월 동안을 혼자서 잘 달려왔는데 겨울이 되니 사정이 달라졌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피해 실내의 트레드밀로 들어오고는 강가로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이 겨울이 무사히 지나가고 봄이 오면 나를 바깥으로 끌어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나의 거주지에 기반을 둔 한 크루를 찾아내어 대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의 나이와 달리기 이력을 소개하고 참여가 가능한지의 여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정기 모임의 요일과 시간과 함께 가능하다는 답변이 왔지만 나는 답변 문자의 단어 하나, 토씨 하나, 행간의 숨겨진 의미까지 분석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 대장의 마음에 있을지 모르는 예순이 다 된 초보 달리기 여자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미운오리새끼가 되고 싶진 않다. 시니어들을 위한 우리 동네의 달리기 모임은 정말 없는 걸까? 젊은 사람들만의 영역이라고 하기에는 달리기가 시니어에게도 너무 좋은 운동이다. 모임을 직접 만들어보려는 생각도 잠깐 해보았지만 ‘이 나이에 뭐 하러 굳이 새로운 일을 벌여. 이제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자유가 생겼는데’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브레이크를 걸어버렸다. 많은 시니어들이 나 같은 마음인가 보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구하고 성취하는 것에 서툴고, 그 작업이 번거롭고 민폐가 된다 싶으면 포기도 빠르다.

      

‘노인’ 하면 떠오르는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신체적으로는 쇠약하고 초라하고, 이성적 또는 긍정적인 사고는 감퇴되고, 성격이나 습관은 고착화되어 고집스럽고, 책임이 따르는 업무는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떨어지고, 즐거움을 추구하면 주책맞아 보이고, 가족이나 사회로부터는 대접받기를 원하고, 젊은 세대와는 교류가 안되고, 라떼를 외치면서 가르치려고 들고...


이런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는 ‘신노인’ 들이 물론 있다. 하지만 여려 면에서 스탠더드 한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 이미 이런 노인의 이미지대로 나이를 먹고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노인’을 뛰어넘는 ‘신노인’ 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남들보다 더 큰 용기를 내야 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힘들다고 시도를 안 할 수는 없다. ‘노인’ 행세를 하기 시작하면 주체적인 사회인으로서의 삶은 포기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6개월의 나이 차이에도 세대차를 느끼고 1년에 삼성 스마트폰의 신상이 2개 이상 출시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과거의 불완전한 경험을 통해 얻은 어설픈 지혜를 과시하며 ‘나 때는 말이야’를 외치면 사회적 왕따가 되어버린다. 60년 가까이 살면서 터득한 지혜나 교훈들이 유튜브의 10분 길이의 동영상만큼의 값어치도 안된다는 걸 어서 깨닫고 나는 얼른 입부터 다무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다.

     

큰 딸아이가 사회 초년생이 되었을 때 엄마가 아닌 인생선배로서의 역할이 하고 싶어 져서 충고를 몇 가지 해주었다. 딸은 ‘엄마나 나나 한 번밖에 못 살아본 인생인데 잔소리 좀 그만하시죠~’ 하면서 단칼에 나의 삶의 지혜를 쓸데없는 잔소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래도 나는 이미 한번 가본 길이라서 딸 너보다는 잘 안다~’라는 최소한의 항변도 못해보고 나는 깨갱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입은 다물더라도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고 골칫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빠르게 변하는 새로운 세상을 온 마음과 몸을 열어 배워야 한다. 스마트 폰 하나만 쥐고 있으면 우주선도 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위대한 발명품을 나는 통화하고 문자 하는  용도로만 주로 사용하고 있다. 새로운 기능을 하나씩 배우는 게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버겁지만, 세상에 민폐가 되고 세상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로 열심히 배우고 있다.


공과금을 내겠다고 은행 지점을 찾아가서 바쁜 은행원의 시간을 허비하게 하고, 길가는 사람을 잡아 세워서 길 위치를 물어보고, 임영웅 공연 티켓을 구해달라고 자식들을 괴롭히고, 음식 주문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음식점 주인들을 비난하는 ‘구노인’의 길을 걷는 것만은 안 하려고 한다.

     

5년 전쯤 미국 뉴욕의 한 공항 내 맥도널드 매장에서 키오스크를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외국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건 고난이도의 작업이지만 맥도널드에서는 누구나 무난히 해낸다. 그러나 그날 그곳의 맥도널드에는 주문받는 사람이 없었고 자판기 모양의 기계만이 내 앞에 있었다. 영어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메뉴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수많은 버튼을 눌러대다가 결국 주문에 실패했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되는 키오스크는 주문 절차가 매우 간단하지만 내게는 그 기계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감이 있다. 고를 수 있다면 사람이 주문받는 음식점으로 가고 싶다.

      

나를 포함한 내 주위의 시니어들은 변화해 가는 세상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그런데 한계가 있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던 머리와 감성으로는 도저히 따라잡기가 힘든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우리가 누렸고 경험했던 것에 대한 향수도 있다. 현금과 명세서가 들었던 월급봉투를 받으면 은행으로 달려가서 적금을 붓고 통장을 확인하면서 뿌듯해하던 것, 고대하던 공연의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고 티켓을 획득하면 천하를 다 가진 것 같았던 것 (그때는 몸만 부지런하면 티켓을 못 구할 경우가 없었다) 등을 우리들은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급속도로 노령화된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노인들의 지위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그들에게 아날로그 방식의 사회 시스템이 함께 운용되기를 당당하게 요구할 자격쯤은 있지 않을까? ‘우리는 사람에게 묻고 사람과 대화하고 싶어~’ ‘나는 내 눈으로 확인된 안전한 거래만 하고 싶어~’라는 시니어들의 바람에 사회는 긍정적으로 응답해야 할 의무 또한 있을 것 아닐까?

    

어떤 세대든 억울하다. 386세대라는 우리도 많이 억울하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자식들을 키우며 열심히 살았지만 그 스토리를 조금이라도 말하려고 하면 ‘라떼’ 타령한다고 공격받는다. 60여 년간 살아오면서 형성해 온 가치관이나 철학도 부정당한다.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하고 자손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무심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작은 아이에게 말했다가 큰 주의를 받은 적이 있다. 엄마의 발언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의미이고 공공연한 장소에서 이런 말을 하면 공분을 사게 되고 더 나가서 차별금지법을 위반하는 범법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게 딸의 주장이었다. 나의 의견이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거라고 하니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가지도 못했다.

     

자신의 의견도 함부로 말할 수 없고, 가르치는 것도 훈계하는 것도 안된다면 우리가 젊은 세대에게 해줄게 정말 없는 걸까? 우리의 사회적 역할이나 의무는 이제 포기해야 하는 걸까? ‘보고 배운다’ ‘ 百聞이 不如一見’이라는 말로 대답하고 싶다. 젊은 세대들은 현재 자신이 잘 살고 있는 건지, ‘행복’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건지, 열심히 살만큼 인생이 가치가 있는 건지를 자신하지 못한다. 불안하고 자신이 없다 보니 인생의 고비마다 맞닥뜨리는 시련과 고난에 쉽게 절망한다.

     

우리는 안다. 그래서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 겪고 있는 실패와 좌절이 인생 전체를 무너뜨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기어이 봄은 오고 긴 밤 끝에는 새벽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하루하루의 성실한 삶이 위대한 성취로 이어진다는 것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우리의 인생 목표는 ‘성숙한 사람으로 행복하게 살다 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목표를 향해 살아온 삶의 끝 날에는 감사와 만족이 남는다는 것을...

      

우리 부모세대들은 미사여구 없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단 한 구절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우리는 성숙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신노인이 되어야 하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젊은 세대들이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인 것 같다.

       

이쯤에서 나는 많은 반성을 해야 한다. 나이 제한이 없는 러닝크루에 문의하며 누가 뭐라고 그러기도 전에 내가 먼저 내 나이로 주눅 들었다. ‘신노인’은 세상에 없던 새로운 세대이다. 내가 그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첫 세대일 수도 있다. 불편함과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신노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임무 하나쯤은 감내해 내야 할 것 같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정기적으로 달린다고 하니 크루에 합류해서 달려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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