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경계밖의 나
나는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는
여러 개의 눈이 동시에 떠졌다.
어느 곳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는 곳에서는 바람이 불고
회색 콘크리트 위로
가벼운 눈송이들이 떨어지고
나는 그 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어딘가 좁은 공간 안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나는
끝없이 펼쳐진 흰 터널 속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
나는 멈췄다.
아니
우리가 동시에 멈췄다.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서로 다른 나들이
같은 순간
같은 감각을 느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 감각은
처음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다른 나들을 '보는' 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누군가가
이 모든 나를
한 번에 바라보고 있었다.
—
순간
은줄들이 흔들렸다.
온 세계를 연결하던
가느다란 선들이
마치 눈보라를 맞은 거미줄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알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서 있는 곳,
지금 나의 세계가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니라
세계가 나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는 걸.
돌돌말린 세계들이 보이지 않는 차원속에서
하나둘씩 펼쳐지듯.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하지만 그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 겹의 형체가
겹쳐져 있었다.
어떤 세계에서는
남자였고
어떤 세계에서는
아이였고
어떤 세계에서는
지금의 나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 존재는
천천히 나를 바라봤다.
"너도… 이제 알았구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말했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야."
잠시 침묵
"우리는… 겹쳐진 세계들의 중심이야."
내 머릿속에는 순간
수많은 기억들이 밀려왔다.
내가 살지 않은 삶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
내가 포기했던 순간들
갈림길들이 분기하며 갈라지고
그 앞에 펼쳐진 또 새로운 선택의 길.
그 모든 것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단 한 사람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들의 교차점이었다.
—
그때
저 멀리서
또 다른 흔들림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세계 전체가 아니라
밖에서 부터 전해져오는 진동이었다.
경계 밖.
내가 아직 가지 않은 곳.
아니면.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곳.
그곳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
그 존재가 말했다.
"너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
나는 물었다.
"뭘?"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우리는… 만들어진 세계 안에 있는 게 아니야."
잠시 정적,
"세계가… 우리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있어."
—
그 순간
은줄 하나가
툭—
끊어졌다.
그리고
그 세계 하나가
조용히 사라졌다.
—
나는 숨을 멈췄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선택해야 해."
"뭘…"
"어떤 나를 남길 것인지."
—
그 때
또 하나의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가… 세계를 지우고 있다는 사실이.
—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나는
다른 나들과 달랐다.
'그 것'의 눈은 모든 걸 이미 알고 있는 눈이었다.
"이제… 진짜 세계로 갈 시간이야."
—
은줄들이 한꺼번에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가 파도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8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