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추억이 포동포동 영글던 밤

세 자매 이야기

by 예담

여름의 끝자락인 친정어머니의 기일 쯤이면 봉숭아꽃 잎처럼 붉고 짙은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형제자매 모여 어머니의 산소를 찾곤 한다. 큰 올케가 돌아가신 후로 제사는 따로 모시지 않지만, 대신 마음을 모아 산소에서 어머니를 기리는 시간을 갖는다. 팔순이 머지않은 큰언니, 칠순이 코앞인 작은 언니, 그리고 육순과 칠순 사이의 나, 세 자매가 오빠 집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자매끼리만 모이게 되었다. 오빠 집 거실에서 바라본 돌담 틈에는 빨강과 분홍 봉숭아꽃이 탐스럽게 피어있다. 그 봉숭아꽃을 보니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돌린 듯 빛바랜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한꺼번에 재생됐다.


이맘때쯤이면 고향 집 뒷마당의 아주까리 열매에 오돌토돌 돌기가 돋고 잎은 아버지 손바닥만큼 자란다. 앞마당 장독대 옆에는 풍성한 가지의 봉숭아가 붉고 탐스러운 꽃을 한가득 품고 앉았다. 큰언니, 작은언니 그리고 나 세 자매는 봉숭아꽃 잎을 한 움큼씩 딴다. 씻어 장독 위에 널어 물기를 말린다. 물기 빠진 봉숭아꽃 잎을 우물가 넓적한 돌에 올려놓고, 백반을 섞어 동그란 돌멩이로 질근질근 찧는다. 봉숭아 찧는 풋풋한 향기는 지금도 코끝에 맴도는 듯 선명하다. 아주까리 잎도 따서 손가락 하나씩 싸매기 좋은 크기로 다듬고, 엄마의 손때 묻은 반짇고리에서 명주실을 꺼내 두 뼘 길이로 잘라 가지런히 챙겨 놓는다.


그날은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저녁을 먹고 잠자리 준비까지 미리 마친다. 그리고는 툇마루에 등잔불 하나 밝힌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세 자매를 중심으로 칠 남매가 옹기종기 모여든다. 큰언니는 낮에 찧어서 준비한 봉숭아꽃을 손톱 하나만큼씩 떼어 동생들 손톱 위에 가지런히 올린 뒤, 아주까리 잎으로 싸매고 잘라 놓은 명주실로 묶는다. 내일 아침 손톱에 빨간 물의 마법을 보여 달라고 기원하면서 꽁꽁 매듭지어 묶어준다. 남자 형제들은 봉숭아 물을 들이지 않거나, 더러는 새끼손가락 하나만 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손가락 열 개부터 시작한다. 다음 차례는 작은 언니다. 그리고는 작은 언니가 자기 손톱을 다 묶은 뒤 큰언니 손톱을 해주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다.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한 엄마가 나와 거들어 주신다.


그런 날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혹시라도 묶어 놓은 아주까리 잎이 빠질까 봐, 이불에 꽃물이 드는 것보다 더 두려웠던 건 손톱에 곱게 물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또 너무 단단히 묶으면 손이 저리고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붉게 물든 손톱을 꿈꾸며 꾹 참고 조심하며 설 잠을 잔다. 여느 때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나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손가락부터 확인한다. 자던 중 이미 손톱을 싸맨 아주까리잎이 통째로 빠져 이불속에 나뒹굴기도 한다. 그럴 때는 손톱이 선명하지 않고 흐리게 물들어 여간 속상한 일이 아니다. 서로 누구 손가락 물이 예쁘게 잘 들었는지 확인하며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그런저런 추억을 이야기하다 “ 봉숭아 꽃잎 따서 손톱에 물들일까?” 하자 “야! 이 나이에 뭔 물을” 하고 언니 둘이 동시에 합창하듯 외쳤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언니들과 꼭 한 번쯤은 해보고 싶어졌다. 얼른 일어나 돌 틈 사이 봉숭아꽃과 잎을 따서 씻어 널었다. 물기가 거치자 납작한 도마에 비닐을 깔고 지근지근 빻았다. 이제는 아주까리 잎도 명주실도 필요 없다. 크린랲으로 꽁꽁 묶으면 그만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빻아 놓은 봉숭아를 가져오자 큰언니는 “난 됐다. 안 할 란다.” 말하며 티브이를 켜고는 소파에 벌러덩 누워버린다.


어릴 적엔 손톱에 들인 봉숭아 물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설레했지만, 나이 들어선 저승길이 밝아져 안 아프고 편안히 갈 수 있다더라며 근거도 출처도 없는 말까지 지어내며, 누워 있는 큰 언니에게 양쪽 엄지발톱 두 개만 하자고 어르고 꼬드겼다. 엄지발톱에 찧어놓은 봉숭아를 올려놓고 크린랲으로 꽁꽁 싸매줬다. 이어서 작은 언니는 양쪽 엄지발톱과 새끼손가락까지 네 개를 싸맸다. 언니들을 다해주고 나서 작은언니가 내 엄지발톱과 검지 발톱 두 개와 새끼손가락과 약지까지를 묶어주었다. 크린랲 덕분에 실도 필요 없이 간단하고 쉽게 물들일 수 있었다.


봉숭아 물 때문인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때문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어릴 적 추억에 젖어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요즘 자식들 집에 자주 안 와 보고 싶은 손주도 마음대로 못 보는 아쉬움 등 자식들에 대한 못다 했던 서운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화재가 바뀌었다. 새삼 자매가 있어 감사함이 느껴졌다. 부모 형제나 자식에 대한 그 어떤 허물도 가감 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다. 모든 허물조차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존재, 그게 바로 자매라는 관계인가 보다. 오랜만에 배우자와 남자 형제 없이 세 자매가 다시 뭉쳐 옛 추억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깊은 속내를 털어놓은 행복한 밤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 이 밤이 포동포동 영근 추억이 되어 다시금 우리를 위로하겠지…

keyword
이전 12화며느리의 우렁각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