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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의 우렁각시

시아버지의 파김치

by 예담

‘뭐 해? 뭐 해? 카톡의 알림음이 요란하게 울린다. “어머님 저 파김치가 완전 먹고 싶어요. 아버님 파김치요.”결혼 6년 차인 며늘아이가 처음으로 먹고 싶은 걸 부탁한 카톡이다. ‘헉! 이 아이가 웬일이지? 혹시!…’하는 기대도 해보았다. ‘덥고 지친 여름이라 힘들어 밥맛을 잃어 맛난 김치가 먹고 싶은가?’ 그간 퇴직하고도 이것저것 바쁘게 생활하는 나에게 이야기 못하고 시아버지의 파김치가 먹고 싶다 한 건가?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에 잠시 혼란스럽다.

김치를 썩 즐겨 먹지 않는 터라, 올여름 나는 묵은 김장 김치나 간단히 먹는 양파김치, 양배추김치 정도만 담갔을 뿐 제대로 된 김치를 한 번도 담그지 않았다. 나 자신은 큰 불편함이 없었지만, 문득 아이들은 집에서 해준 김치가 그리웠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맞벌이에 2세 계획, 게다가 대학원과 자격증 공부까지로 늘 바쁜 아이들에게 김치 한 번 제대로 못 해 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퇴직 후 시간도 많은데 뭔가 더 해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들은 대학 1학년인 스무 살에 만나 서른 살이 되도록 십 년을 친구로 지내다 결혼했다. 아이들이 사귀던 시기에 백종원 셰프의 요리가 방송에 나오면서 유명했다. 그 덕에 요리랑은 거리가 멀었던 칠 대 종손인 남편이 요리와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레시피를 보며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걸 좋아했다. 결혼 전 아들의 여자 친구인 지금의 며늘아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마침, 백종원 레시피로 남편이 담근 파김치가 맛있게 익었다. 그 친구는 파김치가 맛있다고 잘 먹었다. 그 모습이 예뻐서 작은 반찬 통에 파김치를 조금 나누어 주었다. 집에 가서 지금 사부인이 되신 며늘아이의 어머니와 맛있게 먹었다는 이야기를 요즘도 종종 했다. 불현듯 그 맛이 생각나 먹고 싶단다.

하지만 내가 퇴직하고는 요리와 또다시 담을 쌓은 남편이다. 남편에게 일단 그의 요리 실력을 칭찬해 주고 “며늘아이가 당신의 파김치가 먹고 싶데요” 말했더니 다행히 남편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내심 자기의 요리 솜씨를 알아주니 기분 좋은 듯했다. 주말 아침 남편과 함께 농산물 판매장으로 갔다. 먹기 좋을 만한 크기의 쪽파, 네 단을 샀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파를 다듬었다. 눈이 매워 눈물이 났다. 안경을 써봐도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더운데 파김치 담그려니 서럽쑤?”하며 얼른 선풍기를 가져다 틀어준다. 매운맛을 바람에 날리며 파를 다듬으니 눈물 흘리지 않고 다듬을 수가 있었다. 신기했다. 남편의 재치 덕분에 눈물 없이 파를 다듬을 수 있었다. 내가 파를 다듬고 씻는 사이 남편은 알아서 척척 찹쌀풀을 쑤고 멸치액젓과 새우젓을 넣고 양념을 만든다. 그 정도 보니 믿음이 간다. 나는 파를 다듬어 씻어놓고는 “나는 여기까지야 알아서 맛난 파김치 부탁해요.” 하고는 탁구장으로 휑하니 가버렸다.

두 시간 남짓 탁구를 신나게 즐기고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코끝을 찌르는듯한 김치 냄새, 액젓의 비릿함과 고춧가루의 매콤함, 쪽파의 알싸한 향이 어우러져 온 집안에 군침 도는 파김치 향이 가득하다. 작업대 위에는 김치통 두 개가 나란히 올려져 있다. 얼른 열어보니 쪽파가 양념으로 곱게 치장하고 가지런히 담겨있고, 위에는 통깨까지 얌전히 올려져 담겨있다. 두 통의 김치를 보며 마음이 든든하고 흐뭇해진다. 새삼 고맙다. 하지만 문득 내가 먹고 싶다고 했다면 과연 이렇게 정성스레 담가줬을까? 살짝 의문이 든다. 역시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구나 싶다. 예전 나의 시아버님께서도 내 부탁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셨었는데…

한 사나흘 먹기 좋게 익힌 후 한 통의 김치를 아들 집에 배달까지 마쳤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텔레비전 앞에 나란히 앉았다. 그때 며느리에게서 전화가 온다. 얼른 전화를 받고 스피커폰으로 모드를 변경했다. “어머님 밥도둑이 따로 없어요. 아버님 파김치와 저녁 맛있게 먹었어요. 너무너무 감사해요.” 전화기 너머 며느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남편은 “또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부탁해라.” 말한다.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시아버지 없는 사람 서러워서 못 살겠네” 하고 웅얼거리며 눈을 살짝 흘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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