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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 Jul 16. 2024

아픔을 닮아버린 나 7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에 아이와 나 둘 뿐이었다.

친정 식구들은 그렇게 분리되어 살면서 가끔 만나 나를 위로하고 도움을 주려 했지만 몸이 멀어지면서

결국 나와 아이는 거인나라 소인으로 적응하는 듯 살아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많이 두렵고 무서웠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살로 나의 생명이 부정을 당했다는 상처는 불쑥불쑥 나를 찾아와 힘들게 했다.  

이혼 후 늘 바쁘게 살던 내가 육아를 오롯이 맡아야 하니 일을 하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한편으로 우울한 나의 감정은 나를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집안에 붙잡아 놓는 듯했다.

 

영화데이트 후 계속 만나지 않았던 그 남자를 그렇게 스스로 만나지 않겠다 했지만 지속적으로 연락 을 해왔고 그를 만나 이야기한다는 것이 결국 한 번의 만남이 가끔 그를 만나 커피를 마시거나 그가 만들어준 반찬이나 음식을 받아 아이와 함께 먹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오랜 시간 그 남자는 나와 아이에게 다가왔다.

이후, 자주 아이가 엄마친구 그 삼촌이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 남자와 결혼을 원치 않았다. 그 남자가 싫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안주하는  삶을 또다시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당시 너무나 두렵고 힘든 마음이 그의 사랑을 외면하며 받기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나를 만들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집에 살던 사촌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그때 언니는 00 대학 행정실에서 근무를 할 때인데....

편입을 권했다. 그 대학은 대학교 근무하는 직원들 복지를 위해 별관에 어린이집이 있었다.

뭐든 그때 당시 나는 하고 싶었다. 해서 편입을 준비했고  합격하면서 학교 입학을 앞두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공부해 보고 싶던 사회복지과였다.

그렇게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지내던 어느 날 나는 숨이 안 쉬어지기 시작했다. 죽을 것 같았다. 그럴수록 숨을 쉬려고 하니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100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시도 때도 없이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찰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아… 나는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게 되는구나 싶었다.

병원에 갔다. 심장 폐 검사를 하고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정신과를 가보라고 했다.

아무래도 공황장애인 거 같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결국 마음의 병이 나의 육신까지 병들게 만들고 나를 더욱 집안에 꽁꽁 가두어 버렸다.


가슴을 부여잡고 대학에 갔다. 언니의 도움으로 학교 담당 교수님?? 학장님?? 만났다. 입학을 하고 바로 휴학이 안되지만 나의 사정을 들으시고 휴학 처리를 해주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눈물을 참으려 하니 가슴이 쪼여오듯 더욱 고통스러웠다.

저주받은 삶 같았다.


이후 공황발작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 늘 정신이 혼미했다. 현실과 꿈이 시간이 지나면서 구분이 안될 정도로 나는 그렇게 영혼과 육체가 죽어 가고 있었다.

아이에게 엄마는 늘 아픈 사람으로 되어가고...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러면서 우울한 나의 감정은 나를 더욱 지옥으로 끓어 당겼다. 아이와 있는 시간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와중에 감사한 것은 아이는 잠이 많아 저녁을 먹고 씻고 나면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 남자는 나를 도와 주려 많은 노력을 했다 우선 아이가 먹을 간식이나 반찬을 늘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힘들어할 때 아이를 데리고 공원이나 놀이터에 가서 아이와 함께 놀아 주었다.

마치 그 남자는 나와 아이의 보호자 같았고 나와 아이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나는 그 남자와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어 갔다.

나는 우선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나의 정신 건강을 많이 배려한 산 아래 작은 단독 주택이었다. 아이가 잠들기 전 늘 기도 하던 그런 집... 마당 있는 예쁜 집이었다. 하나님은 아이의 기도에 보너스로 마당에 이쁜 은행나무와 앵두나무 작은 화단까지 주셨다.

남편은 지인에게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을 해서 데려왔다. 아이가 너무 좋아했다. 늘 혼자 집에 있는 나를 위해??라고 했지만 남편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산아래 집은 늘 새소리가 크게 들리고 바람이 불면 초록풀향기와 흙내음이 내 영혼을 달래주는 거 같았다.

조금씩 나는 회복하고 있었다.


이사하고 그 남자와 한 가족이 되면서 나와 아이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나의 기타 소리를 좋아했다. 나는 남편에게 기타 연주를 남편은 나와 아이에게 음식을 해줬다.

식사 때 모든 음식을 남편이 했다. 들깨 수제비, 황탯국, 해물탕, 오꼬노미야끼, 나가사끼, 가락국수, 소고기타다끼, 깐풍기, 탕평체, 전골..... 정말 이름도 알 수 없는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 이였다.

여름에 해주는 일본식 모찌는 정말 어느 아이스크림보다 맛있었다.


내가 컨디션이 좋을 때마다 우리는 집 근처 대형마트에 갔다. 아이와 카트를 끄는 일은 행복했다. 태어나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남편과 아이 그 옆에서 간식거리를 사는 일이 이리도 행복할 일인가….

나의 일상은 늘 아이와 남편이 함께 했다. 저녁이 되면 아이가 좋아하는 과일이나 간식을 사들고 들어오는 남편 늘 남편의 퇴근길은 양손 가득 아들과 나를 위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우리 가족이 여름휴가를 갔을 때 일이다. 우리는 바닷가로 가기로 했다. 아이와 나는 마치 천국에 가는 열차라도 탄 듯 들떠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나오는 휴게소마다 들렀다. 휴게소마다 파는 맛있는 음식을 사 먹고 여행을 하는 여행객이 되어 이곳저곳을 눈에 담으며 행복했다. 바닷가에 도착을 하니 많은 가족들이 와있었다. 남편은 바닷가 근처에 탠트를 치고 커다란 고무보트에 바람을 넣었다.


나는 사실 바닷가 도착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가 죽어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엄마들이 멋진 몸매를 뽐내듯 비키니를 입고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나의 마음을 읽었을까 나와 아들을 보트에 태우고 커다란 골프 우산을 씌어주고는 여름날 그 뜨거운 태양아래 나와 아들을 위해 바다 위 보트를 띄우고 이리저리로 끌고 다녔다. 여왕이 된 기분이었다.

그뿐인가 바닷가에서 쉽게 먹을 수없는 일본식 꼬치 요리를 숯불에 구워 아이와 나에게 주었다. 젊고 이쁜 엄마들에게 부러움의 시선을 받았다.  마치 내가 티브이에 나오는 신애라 하이라가 된 기분이었다.

남편은 아이와 바닷가에 들어가 아이를 무등을 태워 한참을 놀아주고 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말에 바닷가 근처 커피숍에서 맛있는 커피를 사다 주었다.

바닷가 노점에서 파는 맛없는 커피를 사다 줄수도 있지만 남편은 나에게 늘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했다.


남편은 함께 교회도 나가고  하나님께 늘 기도 했다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남편을 만나 나는 많은 것들을 해볼 수 있었다. 나와 아들을 데리고 늘 여행을 다녔고 나중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많이 가지고 싶다며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을 하기도 했다.


어린 날 나의 상상 속에 초록지붕 2층 집은 아니었지만 내가 늘 상상하던 행복한 가정이었다.  가끔 남편은 잠을 잘 못 자는 나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기도 했고 답답하다고 하면 늦은 밤이든 새벽이든 나와 아들을 차에 태우고 한강에 가나 함께 걸었다.

남편은 우리 가족에게도 너무나 착한 자장한 사위이며 형부였다. 동생은 형부 같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남편을 좋아했다.

동생이 내가 재혼을 하고 1년 즈음 지나 중국에 기독교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형부 선물을 보내줄 정도로 늘 형부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보내신 선물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늘 나와 살고 싶어 했다. 너희 가정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는 말씀을 늘 하셨다. 마치 나는 행복하지 않아라고 하시는 거 같았다. 결국 남편의 설득으로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남편은 넉살 좋게 엄마에게 잘 맞춰드렸고 엄마 교회에서 체육대회 한다는 이야기에 엄마 옷과 모자 선글라스를 선물을 해드릴정도로 엄마에게 아들 같이 행동했다


불같은 사랑을 하고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고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 같았다.

나는 모태 신앙인이다. 모태신앙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살지는 않지만  늘 오래된 시계 추처럼 왔다 갔다 하며 가끔 찬양의 가사에 감정을 실으며 울고는 은혜를 받았다고 착각을 하기도 하며 그렇게 무지한 교회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무지한 신앙생활이라고 할지라도 주일 교회 가는 일은 처음으로 가져본 달콤한 삶 속에 초코시럽 한 스푼을 추가하는 일이었기에 나는 주일 아침이 되면 어린 날 엄마가 나에게 해주시던 것처럼 가장 이쁘고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남편과 아이손을 잡고 뽐내듯 교회를 출석했다. 완벽한 내가 상상한 가족의 그림이었다.


이후에도 한 번씩 공황 발작이 있었지만 자주가 아니었고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어쩌다 가끔 한 번씩 악몽을 꾸고 새벽에 일어나 울고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이불을 꽁꽁 싸매고 나를 압박해야 했지만. 그렇다 하여도 나는 회복되어 가는 중이었다.

오랬동안의 영혼을 갉아먹는 나의 마음의 상처는 그렇게 내 안에서 조금씩 모습이 사라 지는 듯했다.


남편은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다. 그중에 해외 한 화사에서 연락이 왔다. 외식사업부를 새롭게 만드는데 총괄 셰프로 와달라는 거였다. 스카우트 제의는 거절할 수 없을 만큼 괜찮았다.

남편과 나는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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