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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 Jun 25. 2024

아픔을 닮아 버린 나 4

나는 나의 아픔이 있는 그곳으로 가지 못했다.

 누군가 나의 뺨을 때리는 거 같다. 목구멍 안으로 무언가 들어온다. 그리고 나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하얀 물 같은 것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었다. 해독제라고 하는 검을 물약을 간호사가 가져왔다. 나는 마시는 즉시 그 또한 토해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환자실이었다.

동생이 찾아온 듯하다. 나는 동생을 볼 수 없었다.(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내 동생은 내 귀에 이어폰을 끼워주고 나갔다. 잔잔한 찬양이 흘러나왔다.


이후 나는 퇴원을 하고 멍하니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무런 생각도 욕구도 없는 상태였다.

그때 당시 우리 집에는 책이 많았다. 책욕심이 많아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책을 샀다. 그러다 보니 다 읽지 못한 책도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책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고 글이 나에게 약이 되기 시작했다.

동생 책도 많이 봤다. 동생 책은 보통은 기독교 서적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봤고 100권이 넘어가면서 나는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고 있었다. 책 중 에는 자서전도 있었는데 어릴 적 불우한 환경은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책을 보며 울고 웃고… 제목이 가물거리지만  삼청교육대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끌려들어 간 한 목사님 이야기는. 책을 읽는 내내 많이 울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인간으로 살 수 없었던 그곳의 이야기는 나의 억울함은 비할 수 없었다. 감사라는 책을 볼 때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 감사를 하면 일어나는 삶의 변화들이 지편 되어 있었다.

책을 보다 저녁 무렵 동네 한 바퀴 걷는 것이 전부인 일상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걷고… 책을 보며 나를 찾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겨울을 좋아하는데…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고 무작정 춘천으로 향했다. 그 때 부터 겨울 여행을 즐겨 다녔던 거 같다. 대부분 호수나 강이 있는 곳을 많이 다녔다. 나의 여행은 끝없이 걷는 것뿐이었다. 가끔 허기를 치우는 빵 하나면 충분했다.

살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춘천.... 무작정 그곳이 가고 싶었다. 기차를 타고 춘천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공지천호수로 갔다. 호수가를 한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한겨울 햇살은 여름 못지않게 따사롭고 햇볕이 비추는 호수는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아름다웠다. ( 내가 강이나 호수를 좋아하는 이유가 윤슬을 볼 수 있어서다. 보석보다 빛이 나고 아름다운 하나님께서 만든 보석이라고 생각한다.) 어둑어둑 해가 지고 호수아래로 정처 없이 걷는데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카페 안에 들어가 커피 한잔을 시키고 앉아 가방에 연습장을 꺼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구석자리 화초가 워낙 많아 내가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기에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참을 있는데 카페 주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네이크로버를 모아둔 상자를 가져와 보여 주셨다. 그리곤 가장 크고 이쁘게 생긴 코팅이 된 크로버하나를 내게 주셨다.

나에게 행운이 오면 좋겠다고 하셨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감사했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찾아와 주시는 손님에게 수많은 크로버 속 네 잎 클로버를 찾아 예쁘게 코팅까지 해서 복을 빌어 주는 마음은… 어느새 내 마음에 작은 불씨를 피워 주시는 것 같았다. 따뜻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일어나야 헸다. 카페에서 나와  하루종일 호수 근처를 걸으며 작은 산장을 본 기억을 더듬어 산장으로 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 서니 나의 발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산발 안으로 작은 모래알들이 들어가 피부를 누르고 혈관을 터트린 모양이었다.

방안에 침대, 화장대, 티브이가 있었고 산을 바라보는 테라스가 있었다. 습하고 눅눅한 냄새가 났다.

문단속을 한 번 더 하고 의미 없는 티브이를 틀어 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그때 나는 왜 눈물이 흘렀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걷는 내내 길가에 흙내음…비릿한 호수 냄새, 따스한 햇살, 호수에 반짝이는 윤슬... 코등 찡하게 차가운

공기... 모든 것이 너무 좋았다.

나는 서울 여자라 늘 시골에 대한 환상이 있는 듯했다... 길을 걸으며 저 산아래 어딘가 작은집 지어 작은 마당에 예쁜 꽃들을 심어놓고 산에 오르고 하루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그렇게 사는 상상도 했다.


하루는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는데 나는 바다로 향했다. 겨울바다.... 파도칠 때마다 보석을 토해내듯 모래사장 위로 하얀 얼음 조각들이 쌓여 갔다.  추운지도 모르고 나는 겨울 바다를 걷고 또 걸었다.

나의 방황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게 1년 즈음 지나  나의 일상은 낮에는 학원에서 일을 하고 보통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무엇이 날 이곳까지 오게 하였누...


그저 깊은 곳 내 등 떠밀었나...


지저귀는 새소리 그저 가슴 후비듯

내 마음 적시고...


울화가 차올라 숨 몰아 쉬면

약골이듯 찬바람 콧등 스쳐 지나가고....


길 잃은 아이처럼 갈피 못 잡고

이리 돌아 치는구나....


-오끼리 낙서-


나의 아이는 외할머니의 큰 사랑과 이모의 아낌없는 선물공세로 하루하루가 늘 행복했다. 이 말은 이제는 커버린 나의 아픈 아픈 손가락 큰아들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엄마 나는 그때 가장 행복했던 거 같아" 아이에게 늘 미안했기에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노력했다.

나의 시간은 늘 아이와 함께 했다. 아들은 나의 친구였다. 함께 영화도 보고 대형 팬시점에서 귀여운 인형이나 사탕을 사고 함께 파스타집을 갔다. 여느 소녀들처럼 나와 아들은 늘 함께 했다. 말이 없던 아들이 어느 날부터 수다스러워지기도 했다. 이모는 교회 교육 전도사였기에 여름 성경학교나 그밖에 교회에서 하는 행사에는 조카를 데리고 함께 했다.  가끔 아들을 데리고 함께 쇼핑몰에 가서 이 옷 저 옷을 입혀보며 아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옷을 양손 가득 플렉스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친정식구들의 사랑과 도움으로 회복되어 갔다.

늘 벗어나고 싶고 늘 귀찮고 싫었던 나의 가족... 엄마와 동생은 날 위해 늘 기도 했다. 그 기도가 너무 싫었는데 점점 그들의 기도가 나에게도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동생이 나에게 "언니 나는 요즘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나에게 주실 복이 있다면 그 복도 다 우리 언니에게 주세요" 어찌 하나님께 서 나에게 동생의 복까지 주시겠는가.... 그러나 그 마음이 늘 고맙고 감사했다.

내 동생은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비밀을 몰랐다. 그러나 늘 아버지가 없다고 기가 죽거나 낙심하지 않았다. 동생의 아버지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 한분이면 충분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 음악카페 할 때 늘 밖에서 만나자고 했던 여자단골손님이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뇌수술을 할 수 있는데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나를 만나고 싶다는 전화였다. 여러 번 밖에서 만나고 싶다고 전화가 왔었지만 적당히 거절을 했었는데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뭐라고 수술 전 그렇게 만나고 싶다는데 그리도 냉랭하게 거절하는가 싶었다.

추운 겨울이었고 함박눈이 펑펑 날리는 날이었다. 대충 외투를 걸치고 나섰다. 그날을 나는 아주 가끔 생각한다. 내가 나가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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