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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 Jun 18. 2024

아픔을 닮아버린 나 3

나의 첫 번째 결혼에서 나는 아픔을 만났다.

나는 이후 음대에 들어갔다. 오롯이 엄마의 바람이었다. 나의 대학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연습실이며 레슨이며 일찍 유학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난 알아듣기도 힘든 수업에 지쳐가고 있었다. 유일한 낙은 커피숍에 앉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거였다.


집 근처 24시간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새벽 손님들이 없는 시간에 여러 가지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가족이 하는 식당이었다 늦은 저녁부터 새벽 4시까지 사장님 아들과 둘이 일을 했다. 사장님 아들은 재미있고 늘 유쾌한 성격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빠동생처럼 친하게 지냈다. 더러 손님들은 우리를 남매로 알기도 했다.

늘 나를 챙겨주는 아들 사장님이 편했다. 나는 매년 겨울에만 3개월씩 그곳에서 일을 했다.

이후 몇 년이 지났을까… 난 그 아들 사장님과 결혼을 했다. 그때당시 나는 가난이 싫었고 무엇보다 가족을 떠나고 싶었다. 내가 클수록 나에게 집착하는 엄마가 나를 더욱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연극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나에게 " 넌 너 자신을 너무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결혼을 반대했다. 차라리 외국에 함께 나가자며 워킹홀리데이를 제안하기도 했다. 유일한 나의 친구였다. 그러나 그때 당시 나는 친구의 말이 들리지 않았고 친구는 며칠을 화를 내며 결혼을 말렸다. 나는 결혼이 나의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결혼생활은  지옥 같은 생활에 시작이 될지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당시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나는 그 집 식모로 들어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매일 커다란 2층집을 청소해야 했고 기름진 빨래하고 시간이 되면 가게 나가 장사를 도와야 했다.

시아버지는 일요일 내가 교회 가는 것을 싫어하셨다. 한 번은 단체주문이 있는 날인데 내가 교회에 갔다는 이유로 "너의 집이 교회를 다녀서 그렇게 사냐며" 욕을 하셨다. ( 우리 친정집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집이었다) 그때 나는 임신 7개월 즈음되는 시기였다. 생활비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가끔 남편이 주는 오백 원짜리 한주먹이 나의 생활비였다. 그 오백 원짜리 한주먹은 아이를 낳고 매달 필요한 생리대를 살 돈이 없다고 하니 주는 돈이었다. 생활비를 주지 않은 이유는 너무도 당당했다.  쌀도 있고 김치도 있는데 생활비가 왜 필요하냐는 말이었다. 그밖에 생활용품은 늘 어머니께서 사다 놓으셨고 어쩌면 난 그 집의 식모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지냈던 거 같다. 가끔 시어머니는 용돈이라며 만 원짜리 몇 장을 주셨는데 그건 마치 직원에게 주는 보너스 같은 느낌이었다.


남편은 결혼한 이후에도 낮이고 밤이고 가게일을 했고 늘 술 마시고 집에 들어왔다. 나는 결혼을 하고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내가 늘 울고 있었기에 남편은 나를 피하기 시작했고 불편해했다.

그리고 첫째 아이 출산 했다. 임신 중에 몸이 무거워지면서 가게는 나가지 않았는데 하루는 시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집에 들어오셔서 나를 찬 거실바닥에 무릎을 꿇게 하고는"밥만 먹고 똥만 싸는 쓸모없는 인간 이라며 주정을 하셨다" 그 주정은 3시간 정도 되었던 거 같다. 그렇지 않아도 임신하고 다리가 부어서 힘들었는데 점점 마비가 되어 갔고 머리는 무겁고 이명이 시작되었고 눈앞이 노랗게 시야가 흐려졌다. 그때 나는 엉뚱하게도 어릴 적 독립문 견학 갔을 때 보았던 일제강점기 고문을 당하는 독립운동가를 생각했다. 나라를 위해 고문을 당하는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라지만 나는 무엇을 위해 이리도 모진 고문을 당하나... ( 독립운동가 분들에게 너무나 죄송하지만 내 그때 심정은 그 비참함과 슬픔이 그 못지않았다) 속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은 비참하고 처참한 나의 시간을 조금은 피할 수 있는 몽상이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분은 그렇게도 나를 미워하셨다. 나를 싫어하신 이유는 한 가지 내가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는 이유였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시아버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고 숨 쉬는 게 힘들었다. 결국 난 엄마를 피해 결혼을 해서 벌을 받는구나... 숨 쉬는 모든 시간 나는 후회했다. 나는 누구보다 사랑스러웠을 내 아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모정이 없는 미친 여자... 내 모습이 그러했을 것 같다.

다행인 것은 그때 나의 아이는 아기인데도 잘 울지 않고 잘 먹고 잘 자는 순둥이였다. 임신 중에 시부모님께서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 울기 시작하면 될 일도 안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 하셨고 나는 혹여 아이가 태어나 미움받을까 봐 늘 배를 만지며 아이에게 울면 안 된다고 말을 했는데 아이는 정말 신기하게도 울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울지 않는 아기가 신기하다며 일부러 발바닥을 때려 울리려고 하셨지만 아이는 양손을 더욱 꼭 쥐고 몸에 힘을 주며 참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점점 발라갔다. 우울증이 오면서 가끔 환청이 들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나를 욕하는 소리가 자꾸만 들렸다. 지옥을 벗어나는 일은 집을 나가는 것이었다. 매일 유모차에 기저귀, 분유를 한가득 챙겨 동내를 떠돌아다녔다.

어린 시절 동네를 떠돌고 학교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 어린 소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되었지만 또다시 어린 아기를 유모차에 싣고 돌아다니는 꼴이었다.

한 번은 거실에 있는 시아버지가 너무 무서워 화장실이 없는 방에서 용변을 참고 참다가 아이 기저귀를 꺼내 용변을 보며 엉엉 운 적도 있다. 여자로서 수치심은 당연했고 사람이 아닌 짐승이 되어버린 나는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죽음보다 가혹한 시간이었다. 나는 이혼을 결심했다. 이후 오랜 시간 남편을 설득하고 나는 이혼을 했다.


이후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나의 아픔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남편은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다시 나와 재결합을 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내가 너무 힘들다고 이혼을 해달 애원을 하니 이혼을 해주고 나중에 아이가 조금 크면 부모님도 바뀔 거라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일방적인 그의 생각이었다.

지인이 운영하는 방과 후 학원에서 일을 했고  아침에 아이와 함께 출근을 하며 학원 1층에 있는 어린이집에 아이들 등원시키고 2층 방과 후 학원으로 출근을 했다. 친정식구들이 도왔지만 아이와 자립을 하려면 일을 해야 했다.

 저녁에는 알고 지내던 피아니스트 분이 운영하시던 음악카페를 싸게 인수받아 운영을 했다.

엘피음악을 틀어주는 가게였고 두 타임 ( 40분 정도 작은 무대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다.

나의 우울증은 음악 카페를 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말이 좋아 음악카페이지 술집이 아닌가... 술을 파는 곳이니.... 직원은 1명 군대를 막 제대한 학생이었는데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라 불편함 없이 일할 수 있었다. 처음에 내가 카페를 인수받을 때 오던 손님들은 나의 냉랭함에 다시 찾지 않았고 조용한 손님들이 찾아와 주셨다. 그렇게 일 년 즈음 지날 무렵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은 생각이 조금씩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음악 카페 할 때 동네 친구가 찍어준 사진


유난히 화창하고 새소리가 아침부터 요란한 어느 날 아침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니 무엇에 홀린 듯 학원으로 출근을 하지 않고 카페로 갔다. 그리고 그때 당시 내가 좋아하는 정택 춘 씨 엘피를 틀었다. 서러움도 원망도 아무런 감정이 나에게 없었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동안 모아놓은 수면제 80알을 꺼내 내가 좋아하는 와인과 함께 먹어 버렸다.


그때 나는 나의 아픔이 그랬던 거처럼 나의 사랑스러웠을 자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의 꿈 높은 산 정상에 오르면…

내 흰머리 세월을 말해줄 그때

사랑하는 그대 손 잡고 넓고 푸른 바다로

내려갈 줄 알았건만…


돌아보니 아무도 찾지 않는

구불구불 어느 냇물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한없이

흘러가는구나…


흘러 흘러 바다로 가면

보고픈 당신 만날 수 있으려나…

그리운 당신 만날 수 있으려나…


-오 끼 리낙서-


손님이 없을 때 나는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때 당시 쓴 글을 보고 한 지인이 슬픔이

가득해 곧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원망했던 나는 나의 아픔을 닮아 목숨을 어찌 그리도 가볍게 버리려 했는지...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어쩌면 살 용기가 없었던 것이 맞는 말인 거 같다. 죽는 거보다 사는 것이 더 큰 용기가 필할 때가 가끔 나를 찾아오는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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