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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 Jun 11. 2024

아픔을 닮아 버린 나 2

이젠 상상 속 멋진 아빠는 아픔이 되었다.

내가 아빠의 죽음을 알게 된 때가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던 거 같다.

어린 마음속 세상이 밉고 모든 것이 싫어지는 그때... 그때부터였다.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떠돌이가 된 것이... 늘 이유 없이 동내를 돌아다니고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학교 앞 문방구에서 200원짜리 작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둥 마는 둥  남은  나무토막으로 땅바닥 흙을 이리로 저리로 휘저으며 아빠를 수 없이 쓰고 다시 흙으로 덮고 반복을 했다.

그러다 보면 흙구덩이가 생겼고 다시 흙으로 덮고 한참을 의미 없는 흙을 휘휘 저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어쩌다 학교 운동장에 아빠 손잡고 놀러 나온 어린아이들을 볼 때면 속에서 천불이 나듯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곤 정신 나간 아이처럼 주절주절 혼잣말을 했다.

어떻게 아빠가 돼서 자식을 두고 죽을 수 있어… 대답 없는 질문을 하고… 그것도 화가 풀리지 않으면 흙 뭉치를 한주먹 쥐어  내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삶을 포기할 만큼 아빠는 사는 게 괴로웠나? 엄마가 너무 싫었나? 누군가 우리 아빠를 죽인 건 아닐까? 온 세상이 나에게만 가혹한 것 같았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그래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했었다고  들었다. 아빠는 할아버지 등살에

법대를 나오셨지만 기타 치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사진기 들고 사진 찍으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셨다고 들었다. 늘 부족함 없이 자랐고 결혼을 하고 할어버지께서 작은 사진관을 차려주셔서 사진관을 하며 그 당시 어려운 신학생들을 돕기도 하며 신앙생활도 하셨다고 들었다. 내 사진첩에는 아빠 사진관에서 아빠가 찍어 주신 사진이 남아있다.


어릴 적 내 기억의 엄마는 조용하고 말이 없고 늘 슬퍼 보였다. 엄마는 그저 두 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는 여자로만 보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자매에게 사랑을 주기에 엄마의 삶이 너무나 무겁고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러나, 엄마가 우리에게 늘 집작처럼 신경 쓰시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깨끗한 옷을 입히고 늘 단정하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신경을 써 주시는 거였다. 먹을 것이 없어도 남이 어떻게 보는지가 엄마에게는 중요하셨던 거 같다. 집에 쌀이 떨어져도 우리 형편보다 비싸고 좋은 옷, 좋은 신발을 사주셨다. 나는 커서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옷, 신발에 집착하셨는지... 엄마 말은 우리가 밖에 나가 무시당할까 싶어 그러셨다고 하셨다.


그때 당시 나는 마음이 병들어 가고 먹지 못해 심각한 영양실조였지만 엄마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거 같다.  어느 날부터 나는 밤새도록 코피를 쏟고 어지러워 일어설 수 없는 지경까지 간 적이 있다.

의사 선생님께서 영양실조라고 말씀하셨고 엄마는 나에게 뭐가 가장 먹고 싶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임절미 떡이 먹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우리 집에는 커다란 빨간 대야 한가득 임절미 떡이 배달이 왔다. 몇 개월 동안 그 떡은 동생과 나의 간식이 되었다.


나는 가끔 용돈이 필요하면 할아버지집에 갔는데 할아버지집에는 나보다 3살 많은 사촌 언니가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사촌 언니는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갑자기 고아가 되어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포도나무가 있는 정원 있는 큰집 식탁에는 늘 음식이 있었고 그때 당시 집안일을 봐주시는 아주머니도 계셨기에 나의 집과는 너무나 다른 풍족하고 따뜻한 집이었다. 난 할아버집에 놀러 가면 늘 언니랑 놀았다. 언니는 나를 정말 이뻐했다.  이뻐했다는 말이 맞는 것이 늘 내가 가면 언니가 선물 받은 학용품이나 액세서리 같은 것을 주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언니도 그때 당시 많이 외롭고 어쩌면 두려웠을 것 같다. 언니랑 나는 1년 같은 중학교를 다녔는데 쉬는 시간이 되면 우리 반에 와서 간식도 주고 동생이라며 친구들에게 인사도 시켰던 기억이 있다.

오후 5시가 넘으면 할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늘 저녁을 먹고 용돈을 주셨다.

그런데 그 용돈을 받으려면 난 할아버지 눈물과 긴 나의 아빠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나하고 똑같이 생겼다는 나의 아빠.... 밥 먹는 습관, 행동, 말투, 표정, 성격....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냐며 나를 보면 우셨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집에서도 늘 듣는 말이었다. 엄마는 나를 보며 "어쩜 밥 먹는 것도 지 아빠랑 똑같아"

"웃는 게 어쩜 지 아빠랑 똑같아"....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은 나의 가족들에게 아빠를 보는 아픔이었던 거 같다. 명절에 할아버지 집에 모일 때면 더 알 수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쩐지 슬프고 아파 보였다.


이후 난 해가 지날수록 할아버지 집을 찾지 않았다.

엄마와 동생이 있는 나의 집에도 어두운 밤이 돼서야 들어갔다. 아빠와 연결된 모든 것이 싫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냥 마음이 불편했다.

도서관에서 잠을 자거나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고 자주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동네 작은 커피숍 구석에 들어가 음료수 하나를 시켜놓고 몇 시간씩 책을 보거나 연습장을 꺼내 그림을 그리고 끄적끄적 낙서를 했다.( 이런 나의 습관은 결혼을 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이 힘들고 불편해지면 하는 행동이다.) 가끔 용돈을 받으면 커피숍에서 파는 돈가스를 사 먹었다.

지금은 컴퓨터 메모리카드에 글을 저장하지만 30대 초반까지 나는 노트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많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마음속 빨강머리 앤이 다시 나를 찾아와 준 것이....

나의 상상 속에는 아빠는 이제 더 이상 없지만 다시금 파란 하늘, 매일매일 모습을 바꾸는 구름, 나무 위에 새들, 초록잎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길가에 수줍게 핀 민들레

너의 그 노란 잎을 내 옷에 물 드리면

나도 너처럼 꽃이 될 수 있을까…


너의 향기 한 움큼 꺾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향기 품은 너처럼 꽃이 될 수 있을까…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마음먹고 찾아보면

어느새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 민들레

나도 너의 옆에 앉아 인사 건넬 친구를 기다려 본다.


-오 끼 리낙서-




가끔 아이를 무등 태워 지나가는 아빠들을 볼 때.... 교회에서 유난히 딸바보 아빠들을 볼 때 꺼내어지는 나의 아픔이 생각나긴 했지만 이네 아픈 생각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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