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트렁크」는 ‘배우자 임대 서비스’라는 도발적인 설정을 통해 결혼과 사랑, 그리고 인간관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노인지는 계약결혼을 반복하며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성’의 틀과 부딪힌다. 작가는 이를 통해 사랑과 폭력이 맞닿아 있는 경계를 날카롭게 조명한다. 2024년 넷플릭스 드라마로도 제작된 「트렁크」는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 리마스터판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노인지는 결혼정보업체 웨딩라이프의 비밀 자회사 NM에서 VIP 회원을 위한 기간제 아내(FW)로 활동하는 6년 차 차장이다. NM에서는 계약 결혼을 ‘출장’이라고 부르며, 인지는 고객의 요청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부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녀의 직업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어 가족과 친구조차 알지 못한다. 인지는 네 번째 결혼을 마친 시점에 작곡가인 전남편의 재결합 신청을 받고 다섯 번째 결혼을 시작한다. 소설의 한 축을 이루는 인물인 엄태성은 주인공의 일상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폭력적 존재로서 김장감을 더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다섯 번의 계약 결혼을 경험하며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녀의 주변에는 ‘정상적’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계약결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결혼의 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그런 관계 속에서도 결국 사람들이 사랑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꼭 일반적인 형태를 띠어야만 할까? 작가는 다양한 관계를 보여주며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이고 있는 ‘정상적인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트렁크는 작품의 핵심적인 상징이다. 나는 이를 ‘계약결혼’의 짐을 싸고 푸는 과정과 같다고 느꼈다. 여행을 떠날 때 짐을 챙기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야 하듯, 노인지의 결혼도 일종의 일시적인 여정처럼 보였다. 결혼은 ‘정착’을 의미하는 제도인데, 그녀의 결혼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결국, 트렁크는 노인지의 삶 그 자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 아닐까?
소설에서 보여지는 인간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부부 간의 사랑, 동성 간의 사랑, 계약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감정 등 다양한 관계가 등장하지만, 그 속에서 ‘진짜 사랑’이 존재하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모든 인물이 사랑을 원하지만, 그것을 쉽게 얻지 못하고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주인공의 불안정한 시선은 그녀 개인의 문제이기 보다 세상의 불안정한 본질성을 반영하는 듯 하다.
“그런 교육을 받고 그렇게 자라 그래야 하는 줄 안다. 같거나 비슷한 모습의 사랑,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NM은 분명 기이했지만, 당시에는 내가 어머니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이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걘 더 더러워.“
내게 했던 저 말을 제발 그에게만은 하지 않았길 바랄 뿐이다.
p.78
작가는 작품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은 무엇인가?’, ‘사랑은 꼭 특정한 형태를 가져야 하는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정말 옳은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소설을 읽으며 정상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일 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만약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이 사회가 정한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과연 숨기고 감추는 것이 해결책이 될까?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강한 주장이나 직설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마음속에 이러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정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동적인지 생각하게 한다. 작품은 정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 스스로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