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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눈을 헤치며 나아가는 힘

by 별총총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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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3주 만에 완독했다. 일 년 전 이 책을 읽으려다 중도에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그사이 나의 독해력이 조금은 나아졌기를 기대하며 다시 책장을 펼쳤지만, 이야기 초반 화자가 겪는 심각한 악몽 장면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난해한 작품을 접할 때마다 내 문해력을 의심하곤 한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읽어가며 깨달았다. 이 난해함은 단순히 복잡한 서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깊이와 무게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특히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섬세한 묘사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진한 감정은 내가 작가의 의도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했다. 이 작품을 단순히 눈으로만 훑고 지나친다면, 작가에게 예의를 다하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5.18 광주항쟁에서 비롯된 경하의 트라우마와 4.3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인선 어머니의 고통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상상조차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작품에서 인선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겪었던 트라우마를 가까이에서 보고 들으며 성장한다. 어머니의 고통과 상처는 딸인 인선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되었고, 이는 그녀의 삶을 조용히, 그러나 깊이 흔들어 놓는다.




경하는 인선의 부탁을 받아 새를 구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인선의 어머니가 제주 4.3사건 당시 겪은 참혹한 고통을 알게 된다. 이는 경하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실종된 오빠의 행적을 찾기 위해 수십 년간 포기하지 않았던 정심의 마음은 딸 인선에게, 그리고 경하에게로 전해진다.




이 책은 고통이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어떻게 세대를 거쳐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인선은 결국 4.3의 아픔에 다가서게 되고, 이는 그녀가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걸으며 회복해 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싸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는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작별하지 않는다 1부 새 133쪽




작품 속에서 ‘눈’은 고통을 직시하는 상징으로, 인물들이 상처와 마주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심이 부모님의 얼굴에 남은 눈을 치우는 장면은 과거의 기억을 직시하는 과정이며, 경하가 눈을 헤치며 인선의 집으로 향하는 모습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여정을 상징한다. 인선과 경하는 촛불 하나에 의지해 눈을 헤치며 고통 속에서도 연대와 희망을 찾고 회복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 나는 살아 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 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 속에 번질 수 있나.

작별하지 않는다 2부 밤 194쪽






나는 사실 트라우마와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작품을 통해 고통은 단순히 ‘있었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겪지 않은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마주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힘은 내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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