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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맑음 Sep 12. 2024

[에세이] 엄마와 부산 여행을 가기로 했다.

10화 엄마와 부산 여행을 가기로 했다.


2024. 06. 17 일에서 06.18일. 1박 2일의 부산 여행을 엄마와 다녀왔다. 때는 수술을 일주일 앞둔 어느 평일이었다.


엄마와의 여행이 놀라운 이유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엄마는 늘 일하는 중년이었고, 우리는 함께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엄마는 늘 이야기했었다.


“엄마는 매번 일만 한다고 여행도 못 다녀보고.”


엄마가 가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늦둥이로 나를 낳은 엄마의 나이는 국가 공인 노령자로 대우받은 65세가 훌쩍 넘어있었다. 오빠와 나는 엄마를 데리고 여행을 다니기로 몇 년 전 결정했다.


해외에 가 본 적이 없는 엄마를 위해서 우리는 일본에 다녀왔다. 바다가 예쁜 통영, 수목원 안에 바다가 있던 태안, 그리고 대한민국의 수도를 보지 못했다는 엄마를 위해서 서울에 다녀왔다. 청와대에서 찍은 엄마의 독사진은 아직도 엄마의 프로필 사진이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다녀오고 싶은 장소로 부산을 뽑았다. 고향은 아니라고 했다. 엄마의 20대와 30대가 있는 곳, 우리가 태어나기 전 엄마의 삶이 있던 도시였다.


결정은 빨랐다. 나는 KTX 열차를 예약했고 호텔을 예약했다. 마음 먹은 지 2시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떠나기 전부터 설레하는 엄마를 보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긴 여행을 부담스러워하는 엄마는 꼭 출발 전 투덜거렸기 때문이다. 그날은 달랐다. 부산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이미 신나서 젊었을 때의 일화를 털어두는 엄마가 있었다.


당시 나는 오랜 시간 움직이는 것이 어려운 컨디션이었다. 부산 여행은 수술을 앞둔 나에게 사실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이 있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울렁거리는 속, 아픈 배를 부여잡고 해운대에 발을 디뎠다.


아직 성수기가 시작하기 전의 해운대 바다가 보였다. 시장에 들러서 해물파전과 생선구이를 먹었던 것을 기억한다. 부산에서 처음 파전을 먹어본다는 내 말에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현지인들은 연신 질문을 쏟아냈다.


“그래서 맛있어요?”

“동래에선 파전 안 먹어요?”


부산인들의 외향성에 조금 놀랐었다. 그들은 해물파전 맛집을 소개해주었다. 엄마는 부산에서 파전도 먹어보지 못했던 내 말에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렀다. 아직 6월의 바다, 그래도 올해는 유난히 더웠다. 벌겋게 등이 익은 관광객이 보였다. 나는 엄마와 연신 수다를 떨었는데 우리의 옆 테이블에서 대화하나 없는 모녀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이 여행 온 걸까? 왜 말을 안 할까?”


엄마의 물음에 나는 작게 속삭였다.


“우리처럼 친하지 않나 봐.”


우리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속닥였다. 체크인 시간이 되자 호텔에 들어갔다. 떨이로 잡은 방이지만 바다 경치가 훤하게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감탄하는 엄마를 재촉해서 호텔의 수영장으로 들어섰다.


나는 새로 산 하얀 원피스 수영복을 입었고, 엄마에겐 몸을 가리는 래시가드를 주었다. 친구들에게 카톡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랑 여행을 간다고 해서 요양을 할 줄 알았는데 호텔 수영장에 가서 놀랐다고 했다.


막상 수영장에 오고 나니 둘 다 수영을 할 줄 몰랐다. 그리고 물은 너무 찼다. 재빨리 사진을 찍고 우리는 온수탕으로 들어가서 수영하는 젊은이들을 구경했다.


틀에 박힌 효도 여행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수술 전에 가지고 싶은 추억여행이었다.


엄마의 20대와 30대를 그토록 깊게 엿본 적은 처음이었다. 해운대의 해변에서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수박 주스를 마셨다. 엄마는 해운대에서 헌팅했던 이야기, 그리고 일을 했던 20대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20대의 엄마는 나와 오빠를 낳으면서 부산을 떠나고, 70이 다 되어 갈 때쯤 이 도시로 돌아올지 알았을까?’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다. 20대, 지금의 나보다 어린 엄마는 꿈에 찬 청년이었고 인기가 많은 여자였다. 일만 하다가 여행도 다니지 못하던 삶, 아픈 딸과 함께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그땐 몰랐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끌고 인생네컷을 찍으러 갔다. 친구들과는 심심하면 찍는 인생네컷을 왜 엄마와 찍을 생각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낯설어하던 엄마는 분할된 컷 안의 앙증맞은 웰시코기 인형 탈을 쓴 나와 개구리 탈을 쓴 엄마의 사진을 보고 웃었다.  인생네컷의 묘미는 사진을 찍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던가.


우왕좌왕하는 동영상을 카톡으로 보내고 다운받아주자 엄마는 여행을 마칠 때까지 틈틈이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밤이 깊으니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섰다. 우리는 산책을 하며 그들을 구경했다.


나만 지친 줄 알았더니 나보다 피곤한 엄마와 밤이 늦게 들어와서 수다를 떨다가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푹 잠들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많은 곳을 두고 부산의 찜질방을 찾았다. 바다가 보인다는 찜질방을 기대했는데 잘못 찾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야외에 실외 족욕장이 있었기에 탁 트인 곳에서 족욕을 할 수 있었다.


수술 전에 때를 벗기는 나를 보면서 엄마는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마저도 목욕탕의 룰을 알지 못하는 어느 외국인의 등장으로 엄마는 자리를 빼앗겼고 ‘쏘리.’를 외치는 외국인에게 화를 냈다.  


택시를 타기 싫다고 엄마는 말했지만 내 면역력은 바닥 수준이었다. 알지도 못하고 투정을 부리는 엄마를 택시에 욱여넣고 부산역으로 향했다. 골목을 누비는 택시 안에서 기사님은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엄마를 위해서 택시기사님은 본래 이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지나가고 있는 이곳이 어딘지에 대해서 떠들었다. 엄마는 상기된 얼굴로 연신 밖을 쳐다보았다.


나는 ‘엄마는 또 왜 해보지도 않고 싫어하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빠의 고향인 도시에서 아빠가 다녔던 고등학교도 볼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모르는 아빠의 학창 시절을 이야기해주었다.


피곤함에 역에서 잠든 나를 보면서 엄마는 미안해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수술대에 눕기 전에 간직할 추억을 가지게 되었다.


엄마와 여행을 다녀왔고, 엄마의 20대를 만났다. 둘이서 인생네컷 사진도 찍었고,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수영복 차림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내가 수술대의 차가운 베드에 누웠던 것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춥고 외로웠으며 정신이 없었다. 수술실 앞에서 헤어진 아빠와 남편이 그리웠다. 울고 싶었는데 울 정신도 없었다. 묻는 것이 많았기 떄문이다.


내리쬐는 수술실의 조명과 숫자를 세는 마취과 교수님. 그 불빛을 응시하면서 그저 부산에 다녀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 필요했던 시간은 1박 2일뿐이었는데 너무나 오래 기다린 것은 아닐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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