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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맑음 Sep 17. 2024

[에세이] 나의 팔레트에 담긴, 버건디

13화 나의 팔레트에 담긴, 버건디


오늘 소개하고 싶은 색깔은 내가 팔레트에 담기로 결정했던 버건디이다.


버건디: 프랑스 지방인 부르고뉴의 영어 이름이자 그 지방에서 나오는 와인의 이름, 그리고 그 와인의 색인 짙은 빨간색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내가 담은 버건디색은 다가오는 가을의 색을 닮았다. 쌀쌀해지는 날씨에 옷을 갈아입은 나무는 단풍을 피우고, 나뭇잎은 바닥으로 떨어져서 거름이 된다.


내가 팔레트에 담은 버건디는 속칭 ‘최루루.’씨다.


최루루씨는 본인을 한정판이라고 표현한다. 여러모로 특이한 이력이 많은 그녀였는데 이름도 특이했던 그녀는 이중국적자이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혼혈인 그녀의 삶은 평범하진 않았다.


나의 버건디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씩씩했다. 그리고 용감했다. 씩씩하다는 말은 그녀를 만나고 재정의되었다.


어려서 희귀 뇌 질환을 앓았던 그녀는 여러 번 뇌수술을 받았고 고비를 넘기면서 더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버건디와는 특별한 채널로 만나게 되었다. 인간관계에서 문을 반쯤 닫고 사는 나의 문을 활짝 연 것은 그녀였다.


재미 삼아서 사용하던 한 사진 애플리케이션. 그곳에서 초청한 VIP라고 부르고, 체험단이라고 읽었던 오픈채팅방. 그곳에서 나와 그녀는 처음 만났다.


나는 신중했으며 공공영역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유로웠으며 전문직이었다. 성격도, 하는 일도 둘은 달랐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하나의 공통점 때문이었다. 서로가 좋은 사람임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따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곧 연락처를 교환했다. 하루에도 몇십번 이야기하면서도 만나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나는 수술을 앞두고 나서야 최루루씨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그녀를 만나러 서울로 향했다. 936만 400명이 사는 특별시. 그러나 지방이 고향인 나에겐 유독 먼 거리였다. 걱정이 많은 나는 기차 안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실제로 만나면 어색하지 않을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그녀와 만나기로 했던 스타벅스의 간판을 얼마간 응시하다가 문을 밀었다. 메신저로 이야기할 때 그녀는 2층에 앉아있다고 했다.


그녀를 한눈에 알아본 나는 대뜸 그녀의 앞에 털썩 소리를 내면서 주저앉았다. 놀란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떻게 저인지 알았어요?”

“그냥 알겠던데요.”


멀리서 봐도 그녀는 최루루였다. 이야기를 나누고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내가 걱정했던 것들이 쓸모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랜 친구처럼, 혹은 가져보지 못한 언니처럼 푸근하고 다정했다.


나는 잔망 루피 캐릭터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서 인형을 선물했는데, 그녀는 손으로 만든 팔찌와 귀걸이를 선물해주었다.


사진작가인 그녀의 안목은 내 취향을 관통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즐거웠고, 그녀는 누군가에게 용기를 폭포수처럼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수술이 무섭다는 나에게 그녀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도 체력이 없고 힘든데, 전신마취 수술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돼요.”

“으음! 한국에서 병원에서 수술 중에 죽기? 쉽지 않은 도전이에요. 병원에 가면 수액도 맞추고 어떻게든 살려주니 괜한 걱정하지 말아요.”


열 두 시간이나 되는 뇌수술을 견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굉장히 신뢰가 되었다. 그녀는 불안해하는 나를 연신 다독거려주었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응원과 마음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를 알게 된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무서운 게 없어 보이던 그녀도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는 사실 무서웠다고 한다. 그녀는 고양이 [루루.]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야기해줬는데 그것이 인상적이었다.


루루는 갈색 털에 짧은 다리를 가진 유튜브 ‘크집사’채널의 고양이다. 크집사의 많은 고양이 중에 루루를 특히 좋아한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이유가 있을 줄은 몰랐다.


왜냐면 고양이는 다 귀엽고, 루루는 특히 귀여웠기 때문이다. 루루를 사랑하는 것은 나에겐 당연해 보였다.


이쯤에서 루루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수컷, 크집사 고양이 중 인지도 1위, 생일은 2017년 1월. 먼치킨 고양이다. 식탐이 엄청나다. 바닥에서 밥을 달라고 야옹을 크게 한다. 보라색 빗을 보면 깨물려고 한다.  별명으로 선장님, 루람쥐, 용맹한 호랑이, 루틴 아메리카, 루꺽정, 냥충이, 루랑이, 루저씨, 돼냥이 등이 있다.]


루루가 성체로 다 자란 직후, 2017년 8월 집사는 라이브에서 루루의 이야기했는데, 먼치킨 킬트의 유전병으로 인해 둥근 꼬리와 뭉툭한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심하게 다리를 저는 증상이 발생했다고 한다.


방송상으로 오른쪽 앞다리를 거의 펴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다리를 절었다고 한다. 집사는 루루의 유전병이 발병한 뒤 방송을 그만둘까 했었지만, 루루가 아픈 고양이가 아니라 용감하고 호랑이 같은 고양이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방송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또 자신과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스코티시 폴드의 양육자들을 위해 관련 정보를 알아보고 공유하겠다고 했다.


수술 후, 최루루씨는 중환자실에 누워있어야 했고 머리를 절제하면서 주변 근육이 끊어져서 말을 할 수도 식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유튜브 [크집사]채널을 매일 봤다고 한다.


중환자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서로의 얼굴은 알 수 없지만, 옆에서 숨을 쉬던 그들은 어느 날 “삐-.”소리와 함께 퇴실했다고 한다.


용감한 그녀도 하루하루 무섭지 않았을까. 그때 루루를 보았다고 한다. 조그마한 고양이도 병을 극복하고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최루루씨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녀는 나에게 색깔이 되었다. 내가 본 버건디는 하루하루 싹을 틔우면서 오래된 낙엽을 떨어트려서 거름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싹이 자라지만 낡은 잎은 버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낡은 잎은 거름이 되어서 누군가에겐 희망이 되었다.


다르다고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와 나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지만 하나의 주파수가 되어서 서로 소통했다.


그것은 우리가 좋은 사람인 이유였거나, 혹은 같은 고양잇과의 외모를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기꺼이 내 팔레트에 버건디를 담기로 결정했다.


버건디는 나에게 익어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낡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익어갈 것이고, 우리는 후대에 클래식이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에게 익을수록 사랑받는 클래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심어준 사람이었다.





버건디씨는 사진작가입니다. 저의 이미지에 맞춰서 찍어준 사진은 저의 보물입니다.



꽃처럼 화려한 외향 아래, 그림자같은 매력은 본래의 사물보다 크고 은은한 것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빛과 그림자와 피사체. 저도 사랑하는 찰나의 예술로 저를 표현해준 버건디씨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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