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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맑음 Sep 24. 2024

[에세이] 내 팔레트에 담긴, 레드

14화 내 팔레트에 담긴, 레드

오늘 소개할 내 팔레트에 담은 컬러는 레드이다. ‘김레드.’는 20살, 20대의 시작을 함께한 친구이다. 

김레드와 나는 대학의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났다. 우연히 같은 조에 편성된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내 평생의 친구가 될 줄은 그때엔 아직 몰랐다. 조에는 레드를 포함해서 5명가량의 여자가 있었다. 

사실 레드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왜인지 버스에 오르기 전부터 레드는 화가 나 있었다. 화라기보다 불편함을 느낀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또래보다 키가 작은 여자아이, 짧은 머리는 금색으로 탈색을 한 그녀는 언뜻 보면 나와 맞지 않아 보였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레드가 나에게 고향으로 가는 방법을 물었는데 당시 나도 처음 온 도시의 터미널을 착각했고 그녀는 제시간에 돌아갈 수 없었다. 굉장히 미안했는데 레드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문자로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같은 학과 동아리에 들어갔고 그 후엔 쭉 함께였다. 타향살이에 대한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같은 수업을 들었고, 수업을 마친 후엔 쇼핑을 하러 가거나 카페에 가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레드가 근래에 털어놓은 이야기는 대학 시절의 내가 꽤 착해 보였다고 한다. 그녀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때 맑음이가 너무 ‘착해서 이런 아이를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감동하였다. 나는 20대의 나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혼란스러웠고 늘 힘이 들었다. 그리고 그 시절 늘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레드이다. 

나는 레드를 착해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보다 솔직한 원색이었기에 좋아했다. 강렬한 색을 가진 그녀는 호불호가 뚜렷했고 누구를 싫어한다면 표정과 태도에서 단호하게 티가 났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이 친구가 앞에서 나를 좋아하는 척하고 뒤에서 욕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레드를 보고 있자면 어떻게 저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열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내 사랑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지만 강렬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드는 늘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있었다. 20살의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도, 그 이후에도 나의 옆에는 레드가 있었다. 

레드와 나는 어떤 계기로 서로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레드가 이야기했던 레드의 삶이 힘들었던 시기를 나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 시절엔 나도, 레드도 서로의 곁에 없었다. 아마 힘들었던 시기가 겹쳤던 것 같다. 

나는 그녀가 힘든 것을 알았지만 연락하기에도 미안할 때가 많았다. 그녀는 늘 고민을 등에 업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짐을 같이 들어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녀의 색 앞에서 멈추어 섰다. 

‘레드.’ 

신호등으로 치자면 멈추라는 표식. 나는 그녀에게 더 솔직하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음에도 멈춰 서 있었다. 

그런 레드는 서른이 넘어가면서 그 색에 물을 탄 듯 색을 변화시켰다. 

레드. 나는 레드에서 새빨간 물 하나 타지 않은 원색을 떠올렸지만, 빨강에는 종류가 꽤 많다. 노랑 베이스를 섞은 수박의 빨강. 파랑 베이스의 라즈베리와 체리.

지금 그녀의 색은 강력한 원색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다채롭게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변화.’ 

그것은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다. 나의 레드에게 나는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는 말보다는 힘들어하는 레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최근 레드는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그림자.]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림자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길이와 모양, 그리고 농도까지도 자유롭게 변화한다. 

정오의 짧아져 내 발꿈치에 매달린 그림자도, 해가 지는 시각 길게 늘어선 그림자도 모두 나의 모습이다. 그림자의 모습이 변해도 속성은 변하지 않듯이 레드의 자존감이 낮아져도 힘겨워도 그녀는 언제나 그녀일 것이다. 

내가 레드를 좋아하는 이유를 찾자면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 하나는 그녀가 나의 좋은 모습만 봐주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에게 친절하지도 상냥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나는 레드에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건 그녀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레드는 내가 친절한 이유가 내가 본래 그렇게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마 나의 차가운 모습도, 누군가를 손절하는 모습도 레드는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빨강은 주목을 부르는 색이다. 이 에세이의 열띤 독자인 그녀는 빨강이라는 색에 불만을 표시할지도 모른다. 좀 더 은은한 색이길 바란다면 포기하길 바란다. 어디에 있어도 그녀는 눈에 띄는 편이다. 

레드는 일전에 이야기했던 나를 만나기 위해서 두 시간을 달려온 친구이다. 상태가 좋지 않은 나에게 그녀는 물었다. 

“왜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

때는 전공의들이 파업하고 응급실은커녕 병실에 입원하기도 힘들던 시절이었다. 내 대답에 분을 터트린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 

“전공의 xx 들 멱살 잡아서 다 병원으로 데려올 거야.”

작은 키로도 용감한 레드. 빨강의 긍정적인 효과는 따뜻함과 에너지. 열정이다. 

나의 20대에서 그녀를 뺼수 있을까. 우리는 하루에 5시간도 거뜬히 쇼핑했고, 배가 고프면 지하상가의 피자를 나누어 먹었다. 내 힘들었던 시절을 이야기했을 때 레드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주변에 그때 좋은 사람이 같이 있어 줘서 다행이다. 내가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토록 따뜻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가끔 귀찮은 게 많던 20살의 내가 대학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살았을까를 상상한다. 그렇다면 레드는 내 옆에 없었을 것이다. 참석할 용기를 내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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