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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맑음 Sep 12. 2024

[에세이]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픔이란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영역인 것 같다. 물론 병원에 가면 아픔을 수치화시키는 방법을 물어보기도 한다.


“환자분 아프지 않다가 0, 출산의 고통이 10이라고 칠 때 어느 정도의 통증이 있는지 숫자로 알려주세요.”


안타깝게도 출산의 고통도 알지 못했으며 평소에 다른 사람이 얼마나 아픈지도 알지 못하는 나는 내 아픔이 통상적인 수준, 나이가 들어서 몸이 안 좋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 본래 병원이란 것이 그런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아파서 병원에 뛰어가면 “왜 이런 걸로 병원에 왔냐.”는 꾸짖음을 듣는다. 그리고 나이가 좀 들어가기 시작하면 “이렇게 아픈데 왜 이제야 병원에 왔냐.”는 꾸짖음을 듣는다.


본래 내 스트레스와 아픔에 둔한 나는 내 진단명을 보고 나서야 “아, 내가 이렇게 아프구나.”라는 짧은 생각과 함께 병원을 벗 삼지 않았던 시간을 후회한다.


이번에 내가 껶은 병명의 진단명을 써보도록 하겠다. 이번엔 무료 5가지의 질병코드를 얻게 되었다.


1. 골반 복막의 자궁내막증

2. 난소의 양성 신생물, 왼쪽

3. 난소의 양성 신생물, 오른쪽

4. 자궁의 벽 내 평활근종

5. 처치 후 골반 복막유착


진단명으로 보는 내 아픔은 간단하고 명료해 보인다. 병은 굉장한 통증을 동반했다. 나는 진단을 받고 10개월가량 호르몬 치료하였고, 병원을 한차례 옮겼고, 3시간이나 되는 전신마취 수술을 하였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내가 했던 생각을 기억한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리고 내 몸이 얼마나 쇠약해지는 것을 느꼈었는지 풀어가는 것이 두렵게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수술 후 눈을 뜨고 했던 첫 생각은 “수술이 생각보다 아프지 않군.”이었다. 나는 늘 수술한 직후처럼 배가 아팠기 때문이다. 그 아픔이 간단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아픔 속에서 보냈다는 것이 요점이다.


시간의 안타까운 점은 공평하게 흐른다는 것이다. 안 좋은 순간을 빨리 감을 수도 없고 좋은 순간을 느리게 감을 수도 지나간 시간을 되감을 수도 없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시간은 상대적이라서 슬프게도 안 좋은 순간은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길게 느껴진다.


늘어진 테이프의 처음은 건강검진이었다. 회사의 복지 정책 중 하나였던 건강검진을 나는 내가 젊다는 이유로 가볍게 생각했다. 의사는 나에게 여성호르몬 수치가 높다고 했지만, 이상이 있다면 더 높은 수치가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너무 걱정하진 말고 혹시 모르니 전문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전문병원, 그래 산부인과이다. 여성으로 멀리하면 안 되는 병원이지만 꺼려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괜찮을 거란 핑계로 3개월이란 시간을 흘려보냈다.


마침내 산부인과를 방문할 마음이 들었을 때는 타고난 긍정주의적 사고로 나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읽은 책에선 긍정주의자가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절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긍정주의자들은 나에게 나쁜 일이 벌어질 거란 생각을 하지 않고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기대는 좌절되었고 나에겐 대학병원에 가보라는 소견과 함께 진료의뢰서를 줬다. 때는 좋지 않았다. 정부와 의료계의 다툼 속에선 대학병원에 예약하는 것만으로도 피를 말리게 했으니 말이다. 겨우 잡은 예약을 기다리는 마음이 타들어 갔다.  


대학병원의 진료실에 들어갈 때도 희망적인 기대를 품었다. 내 병은 경증일 거고 수술만 하면 아프지 않았을 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 말이다. 기대는 보기 좋게 좌절되었다. 나는 같은 병중에 가장 중증인 환자였다. 수술이 가능하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수술을 할 수도 없이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르몬치료를 하기로 결정했다. 감히 비교할 수 없을지 모르겠으나 호르몬치료는 항암치료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내 몸을 좀 먹고 있는데도 이것이 치료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몸의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지지만, 치료를 멈출 수 없다. 굉장히 분했던 것 같다.


내가 받은 알약은 조그마한 크기이다. 하얗고 길쭉한 모양의 알약의 이름은 미래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게 나를 화나게 하는 부분이었다. ‘미래. 혹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이름으로 가진 그 알약을 먹으면서 나는 미래를 꿈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약에 적응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약은 먹는 내내 상태는 악화하였다. 그때 서야 나는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긍정주의자의 좌절은 도피처도 없었다.


내가 품는 기대는 수술을 하면 모든 게 정상이 되어서 아프지 않았던 상태로 돌아가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호르몬 치료를 3개월 진행 후, 두 번째 치료에서 전문의는 나에게 말했다.


수술한다면 나는 자궁을 들어내고 주변에 유착된 대장, 그리고 결장까지 절제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좌절했던 것 같다. 아프기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자궁을 들어낼 것이고 내 인생에선 아이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대장과 결장을 절제한다는 말은 배변 활동도 원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마도 대변 주머니를 차게 될지도 모른다.


여성에게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어땠을까. 나는 내가 딩크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기지 않는다면 노력해서 낳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낳지 않기로 결정한 것과 선택권이 사라진 건 달랐다.


그때부턴 우울증과 식욕부진이 증상에 추가되었다. 아이를 안은 부모만 봐도 화가 났다. 친구들의 임신 소식을 진심으로 축하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옹졸하다고 느꼈던 시간이었다.


병마와 싸우고 있던 시절 나는 나에게 빠져있었다. 내 감정이 중요했고 내 몸을 관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 내가 놓쳤던 것은 내 주변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했을 때 가장 충격받은 것은 아마도 나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나는 나의 엄마처럼 엄마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딸을 보는 엄마의 마음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서 찾아간 내과에서 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호르몬 치료는 진짜 효능이 있는 거냐고. 병원에 가서 확인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의사가 보기엔 내 상태가 굉장히 나빠 보였다고 했다.


연차를 끌어모아서 2주간 휴가를 내고 병원을 찾아다녔다. 처음 나를 진료했던 대학병원은 한 달을 기다려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진료가 가능한 병원들을 찾아다녔고, 은인 같은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인터넷에는 설화와 같이 느껴지는 후기들이 있었다. 본래 그러한 것을 신뢰하지 않지만, 지푸라기를 잡고 싶었다.


의사는 수술에 자신이 있다고 했다. 아프지 않도록 고쳐주겠다고 했다. 나의 자궁과 대장, 결장도 무사할 것이라고 했다. 그때에는 이미 병과 싸운 지 10개월이 넘은 시점이었다. 수술 날짜를 잡았으니 60일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수술을 기다리면서 내 상태는 더 나빠졌다. 나는 잠을 자지 못하게 되었고 평균 수면시간은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는 1~2시간이었다. 식사도 거의 하지 못하였고 그나마 먹은 것은 하루에 3번씩 게워냈다. 배가 아팠다. 24시간 지속되는 고통은 이것이 진짜 아픔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수술을 기다리면서 죽어가는 것 같았다. 잠을 자지 못하는 새벽이 외로웠다. 아침 해가 뜨는 것, 해가 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자면 내가 언제까지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안타깝게도 나는 수술대에 올라본 경험이 꽤 있는 편이었다. 수술대에서 수술대를 비추는 눈이 부신 조명을 보고 누워있자면 온갖 번뇌가 머리를 스친다는 것을 경험자는 알 것이다.


내가 경험한 수술은 날짜를 잡고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응급실로 들어갔다가 긴급수술로 급박하게 진행되었기에 수술 날짜를 기다리며 겁을 먹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멍하니 있으면 나는 병실에 누워있을 때가 많았다.


60일이 남은 수술을 기다리면서 나는 내가 수술대에 누워서 그 조명을 응시할 때 무엇이 가장 후회될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내가 삶에서 겪은 시간 중 가장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비눗방울 총을 샀다. 마음 먹은 지 1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이미 비눗방울 총은 나의 손에 들려있었다. 이것을 사기 위해서 35년 5개월을 기다렸다는 것을 믿을 수 없게도 간단한 일이었다.


비눗방울 총은 유년 시절의 결핍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가난한 편이었다. 유원지에 가면 비눗방울 총을 쏘면서 웃고 있는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다. 언제나 그 비눗방울 총이 가지고 싶지만, 부모님은 사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성인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 돈을 벌었고 비눗방울 총을 사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지 않았다.


‘나중에 사지 뭐, 저게 꼭 필요한가?’


언제나 사고 싶었지만 모든 순간 나는 돌아섰다.


수술대에 누워서 조명을 응시했을 때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은 살면서 한 번도 비눗방울 총을 사지 않은 것이었다. 언제나 살 수 있기에 언제나 사지 않았다. 마트로 향해서 이상향에 가까운 비눗방울 총을 손에 들고 밤의 공원에서 난사하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삶의 대부분이 비눗방울 총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을 미뤄둔 채로 살아갔다. 내 삶에서 시간이 무한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방치한 채로 살았던 것이었다.


만나고 싶었던 친구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누군가에게 감사를 전하기로 했고, 언제나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비밀에 관해서 묻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엄마와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엄마의 고향은 아니지만, 엄마가 빛나는 20대를 보낸 도시는 부산이었다. 엄마는 늘 부산에 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나는 이제야 엄마와 함께 부산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20대의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수술 전에 했던 대부분의 일은 살면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던 것 같았다. 이걸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야 행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동요는 한없이 구슬픈 삶을 담고 있다.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이다. 동요임에도 어딘가 구슬픈 멜로디와 가사는 이해할수록 슬퍼진다. 할아버지의 탄생과 함께 돌아가기 시작한 할아버지의 시계는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그 시계 밑에 앉아서 초침 소리를 들으며 안심할 꼬마를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의 시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시계가 언제 멈출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지금은 수술에서 살아남았지만 당장 내일 교통사고로 사라질 수도 있다.


내 시계가 멈추는 순간, 나에게 후회가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눈을 감는 그 순간에 아쉬움이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되는 것이었다.


후회하지 않기가 이토록 쉽다니 완전 럭키 비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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