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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빈 Jun 22. 2022

내 결정은 옳았을까, 감정적 충동과 이성적 판단 사이

스물다섯, 잃을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나이라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평소에 놓쳤던 소소한 행복들이 눈에 보인다. 


  내가 사는 월세방은 3층인데, 베란다 커튼을 젖히면 바로 앞에 정원을 잘 가꿔놓은 원불교 절이 보인다. 그 사이에 쌓아진 담장과 담장을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있다. 12월에 본 그 나무는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매일 빨래하러 베란다에 나갔었는데 나무에 무성히 달린 녹색 나뭇잎들을 어제 처음으로 보았다. 지난 6개월 동안 모르다가 왜 이제야 봤나 싶었다. 흠칫 놀랐다가 신기하고 예쁘고 해서 창문 열고 사진 찍는데 몇 분을 보냈다. 바깥에 참새 소리도 오랜만에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는데 맑은 새벽 공기 향기가 나서 고개를 들었다. 숲 속에서나 맡을 수 있었던 흙냄새가 내 방에서도 가능한지 몰랐다. 신촌과 홍대는 시끌벅적한 동네지만 내가 사는 곳은 그 사이 조용한 곳이다.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맡을 수 있는 건 기적이다. 그동안 왜 몰랐을까 싶었다.


  홍대입구역 8번 출구 앞에 자주 가는 포장마차가 있다. 아주머니가 튀김 2개를 1500원에 파시는데 떡볶이 국물도 묻혀주신다. 간단한 저녁이 필요할 때마다 열 번은 넘게 갔을 거다. 그동안 시간이 없으니 후다닥 먹고 나왔는데 어제 아주머니와 처음으로 통성명을 했다. 27년 동안 그 자리에서 떡볶이를 파셨고 그 돈으로 집 네 채를 사셨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러면서 '하나만 꾸준히 해도 성공하는 세상인데 두려울 거 하나도 없다'라고 하시더라.


  돌보지 못했던 몸을 돌보기 시작했다. 헬스장에서 매일 두 시간 동안 온몸을 조진다. 근육 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오랜만에 느끼는 근육통에 찢어지는 희열감이 들었다. 내 소중한 몸에 신경 써서 비싼 야채도 사서 먹어주고 집 앞의 연남동 책거리에서 밤 산책도 자주 한다. 다시 영혼이 살아나는 뭐, 그런 느낌이다.


  평소에 하던 부업이 있었다. 좀 더 집중해서 시간을 투자하고 싶었는데 이제 시간이 생기니 영상편집, 카피라이팅, 번역을 좀 더 할 수 있게 되었다. 글 쓰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일기 쓸 시간이 더 확보되어 행복하다.


  퇴사를 통보할 때도 불안했던 나는 결정을 내린 몇 주 후 내 결정이 옳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은 감정적일 때와 이성적일 때를 잘 구분하는 인생이다. 


  이성은 객관적인 시선에서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지만,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감정의 중요성을 망각하기가 쉽다. 나는 감정적 충동이 훌륭한 삶의 적인 줄 알았다. 일의 효율성만 중시한 나머지 내 인생에서 효율적이지 않다면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될 남들에 대한 연민, 동정심, 나 자신을 위해 가진 걸 포기할 줄 아는 조금의 타협 등은 무조건적으로 배제하려고 했다. 마음속으로 점점 차가운 냉혈한이 되어가는 느낌이었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들과의 교류에서 어떤 이득이 있을지 계속 평가하는 게 습관이 되어갔다.


  감정의 중요성을 오히려 직장이라는 일터에서 배웠다. 팀워크에서 특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감정은 협력과 소통의 90% 태도를 차지한다는 글을 읽었다. 공감한다. 내 감정을 잘 다스리면서 남들의 감정도 잘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 대화를 잘하고 팀과 회의도 잘 이끈다는 걸 뒤늦게 안 것 같다.


  이익 집단에서 누군가를 배려하고 그 사람의 감정까지 고려한다는 게 참 모순적으로 보이긴 하다. 나도 무언가를 받겠지 예상하고 배려하다가 돌아오는 게 등 뒤에 꽂히는 칼일 가능성도 물론 높다. 그래도 요즘 회사의 '리더십'이란 주제에서 '감정, 소통, 교류, 협력' 등의 키워드를 중요시하는 것은 이런 태도 없이 집단이 잘 돌아가지 않기 때문일 거다.


  감정의 중요성이 회사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인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내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내 결정을 탐탁지 않아할 때. 확률적으로 남들의 시선에서 분명 건강한 결정이 아닐 때. 그 결정이 오히려 내 눈에서만 옳은 결정으로 보일 때. 가장 헷갈리는 순간에 감정은 내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 "내가 너를 가장 잘 알아, 일단 해봐"라고 외쳐준다.




  최근에 강릉 집으로 가서 퇴사 생각에 대한 고민을 부모님께 털어놓았었다. 내가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아니면 내가 잘 해낼 거라고 전적으로 믿어서인지 부모님은 딱히 반대하지 않으셨다. 내일 공제라는 큰 기회비용과 내 불투명한 2022년 하반기 계획에도 불구하고 그냥 쉬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내셨다.


  아버지는 조금 아쉬움을 드러내긴 하셨어도 아무 말 없었고 어머니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확신이 없을 땐 그냥 하는 거야. 세상이 네 편이 아닐 땐 너라도 네 편이어야 하고 네가 옳다고 믿으면 옳은 결정이 되는 거야."


  그 말이 내게 정말 큰 위로가 되어서일까. 일단 스스로를 믿기로 결정한 순간 처음으로 내 내면의 목소리, 감정의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길이 있고 수만 가지의 목소리와 조언이 있지만 결국 가장 날 잘 아는 내가 내 길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내 선택은 옳고 그름의 형체가 불분명하다. 이걸 옳게 만드는 것도 내 책임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 스스로를 위해 잘 해내야 한다.


  이성적인 이유는 그 이후에 붙어도 상관없었다. 아니, 남들에게 설명할 이유조차 어쩌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맞다고 확신하는 길에, 왜 이 결정이 옳았는가를 남들이 이해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다. 어쩌면 이번 계기로 남들이 보는 나에 대한 시선과 생각에 덜 집착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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