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강한 사람은 항상 부드럽다. … 무엇보다 적절한 ‘타이밍 timing’을 갖고 있다. 화를 내야 할 때를 알고 침묵해야 할 때를 안다. 타인을 껴안아야 할 때를 알고 타인과 결별해야 할 때를 안다. 자신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를 알고 자신을 밀어붙여야 할 때를 안다.”
보도 섀퍼의 <멘탈의 연금술>에 나오는 말처럼 우리의 인생에는 타이밍이 있다고 믿는다.
슬픈 타이밍은 수시로 오지만, 눈부시게 찬란한 타이밍은 인생에서 꼭 세 번만 오리라는 걸 너는 신앙처럼 믿는 아이였다. 그래서 네 인생의 슬픈 타이밍도 가볍게앓고 지나가야 한다고 웃는다.
함께 입찰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따가운 시선마저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세월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가 네 인생에 찾아온 첫 번째 찬란한 타이밍이라고 네가 결정했기 때문이다.
너는 퇴근을 하면 곧바로 매점으로 출근했다. 그때까지 매점을 혼자 보던 네 엄마는 다음날 팔 김밥 재료를 사러 시장에 가야 했으니까.
너처럼 매점으로 퇴근한 네 아버지와 함께 자정이 되어서야 문을 닫았다, 그날 하루 매상을 정리하고 나면 새벽 1시가 넘기 일쑤였다.
4시간도 채 못 자고 새벽에 엄마를 도와 김밥을 쌌고, 6시면 네 부모와 함께 매점 문을 열었다. 별을 보고 들어가 별을 보며 나오는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동안 뾰루지 하나 없던 네 얼굴은 곳곳이 울긋불긋 꽃을 피웠다.
주말이면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티셔츠,인형을 비롯해 잡화를 사러 대구 서문 시장에 갔다. 서울 남대문 시장이 가장 큰 시장이었지만, 의류가 주가 아니라 잡화를 도매로 떼 오는 거라 서문 시장에도 물건이 많았다. 몇몇 단골집을 돌면서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핸드백도 사고 총각들이 여자들을 꾈 때 많이 선물하는 액세서리도 샀다. 기숙사에는 현장에서 일하는 10대 20대들이 많아 헤어드라이어며 속옷도 잘 팔렸다.
그렇게 하나둘 사다 보면 주말마다와도 집에 돌아갈 때쯤에는 두 손에는 땅바닥에 코를 박으려는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단골 도매상에서 그나마 버스 타는 곳까지 배달해 줘서다행이다.
몇 년 동안은 자가용도 없이 버스로 다녔다. 양껏 산 두 보따리는 네 양팔과 함께 늘어질대로 늘어져 질질 끌려다녔다. 몇 번 버스를 갈아타고서야 마중 나온 아버지를 따라 어둑해지는 하늘을 등지고 매점에 들어선다. 당시 아버지가 다니시던 직장은 주말도 없이 일했고, 손님들이 젊은 사람들이라 네가 그나마 취향에 맞는 물건을 뗄 수 있었다.
“이 약해 빠진 손목에 무슨 힘이 있다고 이렇게 많이 사왔 노?”
양팔에 예닐곱 살 아이 키만 한 보따리를 쥔 손을 잡으며 네 엄마는 또 울었지.
평소 말수가 극히 적던 네가 아무리 피곤해도 손님만 오면 어떻게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수다를 떨었는지 모르겠다. 대학에 다니던 네 동생이 군에 입대하는 날 부모님은 뒤돌아서 눈물을 흘리는 데도 너는 손님과 농을 하며 웃다가 네 아버지께 혼이 나기도 했지. 동생이 군에 갔는데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냐고.
너는 이제 고백하고 싶다.
"맡은 역할이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는 미국의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의 말은 옳은 듯해요." 라고.
그때 너는 자신이 입찰에 참여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매점에 매달려 살게 된 상황을 어떻게라도 책임지려 했다.
그렇게 너의 20대는 숨 가쁘게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때로는 숨이 막히는 듯 답답함이 밀려들면 새벽 4시든 5시든 차를 몰고 강변도로로 향했다. 그 답답함이 무엇이었는지 새벽안개에 휘감겨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수룩한 안개가 앉은 낙동강, 서서히 흐르는 검은 물결 위로 저 멀리서 공장 불빛을 받을 때면 순간순간 반짝이기도 했지.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 찰나의 반짝임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닐지.
너의 첫 애마는 아반떼 5777번.
그 애마 덕분에 너의 두 팔이 더 길어져 엄마를 슬프게 하지 않아도 되었고, 너도 아직은 가슴 설레는 청춘이라는 걸 알게 해줬다.
낙동강처럼 유유히 흐르던 세월은 한국이 IMF를 맞으며 산산이 부서져 뾰족한 물 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퉁겨졌다. 그 여파는 너의 매점도 예외가 아니라서 매상이 3분의 1로 줄었지. 그래도 매점 월세를 내고 부모님 두 분 생활비는 충분하지 하며 문득 올려다본 파란 하늘 아래서 네 눈길이 멈추네.
“어머, 이 회사에 벚나무가 있었네!”
회사의 역사와 함께한 떡 벌어진 벚나무에는 벚꽂이 허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사르륵가볍게 몸을 떨며 내려앉는 벚꽃. 낙동강 안개보다 아득한 아지랑이 넘어 사방을 춤추며 떠도는 꽃가루.
매점을 하면서 늘 지나왔던 그 길에 벚나무가 있었다는 걸, 4월이면 봄꽃이 피고 졌다는 걸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