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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이 곳에서...

인생수첩

십 수년이 지났다. 돌아보면, 시간이란 존재는 참 무섭게 지나간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았던 어두운 시절도 돌아보면 아득히 먼 과거가 되어 있다. 그 과거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만, 참 묘하다. 오늘은 나의 과거 비밀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난 필기나 메모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다. 머리로 기억을 하던지, 아예 기억도 없던지 둘 중의 하나다. 학창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필기를 하지 않았으니, 내가 필기한 노트를 보면서 시험을 준비해 본적도 없고,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봤다거나 손해를 본 적도 없다고 자부한다. 지금은 노트북과 핸드폰이 얼마나 편리한지, 내가 기억하지 않아도 노트북과 핸드폰이 기억을 해 주니 말이다.


그런 나에게도 하루에 수십 번씩 기억하고, 메모하고, 스스로 각인시키고자 도장도 찍고 하던 때가 딱 한 번 있었다. 그 때는 다이어리 같은 수첩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펼쳐서 메모하고, 쓰고, 체크하고 그렇게 하루에 수십번씩 그 수첩을 펼쳤다접었다적었다하길 했었다. 그 수첩을 13년만에 우연히 찾게 되었다. 사실 이 수첩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이사를 몇 번해서 잊어 버렸는지, 없어졌는지 생각을 했는데, 아내가 우연히 편지를 모아둔 곳에서 내 수첩을 발견했다면서 내 책상위에 올려 주었다. 내가 얼마나 이 수첩을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아내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수첩은 오늘 사진 속의 공간과 한 몸과 같은 존재였다. 이 곳에서 이 수첩을 보고, 쓰고, 읽고, 다시 펼치고 하길 수천번 했다. 그렇게 그 수첩 속의 일들이 오늘 다시 떠올랐다. 이 곳에서 나는 한 없이 낮아졌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한 쪽 가슴이 시리다. 인생의 밑바닥이란 것이 무엇인지, 밑바닥이 어디까지 인지 경험한다는 것이, 그 밑바닥에서 다시 올라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과 댓가가 있어야 하는지, 그렇게 하더라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오는 공허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내가 기억을 잊은 때도 있었고, 기억조차 없었던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그 때가 문득 생각난 때도 있었다. 새까맣게 손 때가 묻은 그 소중한 수첩을 다시 보면서 그 때가 생생히 떠올랐다. 되돌아보니, 그 때 인생의 천로역정을 경험한 듯 하다. "일희일비하지 말자."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다."를 얼마나 스스로에게 외쳤는지를 모른다. 그 때의 내려놓음, 비움, 낮아짐을 통해 체화된 모든 것들이 지금은 감사하다. 그 때의 울부짖음이 해결되었다거나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그 때의 어려움을 통해 단련되고, 훈련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더 감사하게 된다. 다시 그런 날이 찾아와도 이겨낼 수 있기에...


오늘 다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가 생각난다. 홍자성의 채근담에서 나온 어귀이다.

"복구자 비필고(伏久者 飛必高)-오래 엎드린 새가 반드시 높이 날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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