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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멘달 Aug 28. 2022

인연을 선물로 드립니다

한 밤에 날아온 사진 한장

  작년부터 시작한 일은 나에게 새로운 인연들을 선물해 주었다. 원데이 수업으로 만나 스치듯 지나가는 인연도 있고 정규과정으로 여러 번의 수업을 이어나가며 지금까지 계속되는 인연도 있다. 모두 다 귀한 인연이지만 나는 이 일을 하면서 누군가와의 만남이 횟수나 기간 만으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 한 번을 만났더라도 그 만남이 너무 좋아서 오랫동안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지체장애를 가진 성인 세 분을 대상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음악과 함께하는 꽃바구니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동안 성인과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과 꽃 수업을 진행하고 있던 터라 수없이 많은 분들을 만나왔지만 지체장애인 분들과 함께하는 수업은 처음이었다. 과연 내가 그분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수업을 잘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체 장애인 분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한 경험이 없어서 조금 걱정이 되네요. 어느 연령대를 예상하고 준비하면 될까요?” 요청을 주셨던 사회복지사 분께 조심스레 여쭈었더니,

“이 분들의 지능이 같은 연령대인 비장애인에 비해 한참 낮은 거는 사실이지만 일반적인 기능 활동은 무리 없이 다 잘하십니다. 아마 꽃꽂이도 잘하실 거예요.”


  나는 지체 장애인 분들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고 차츰 내가 몰랐던 부분들을 채워 나갔다. 수업 내용도 그분들이 조금 더 이해하기 쉽도록 수정과 수정을 거듭했다.

마침내 수업 당일, 어둠이 막 내려앉은 겨울 저녁 시간이었다. 조심스레 내 작업실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내 가슴도 함께 콩닥거렸다. 남자 두 분과 여자 한 분이 사회복지사 분과 함께 들어오셨는데 나이는 나보다 한 두 살쯤 위? 혹은 그 아래 일수도 있을 내 또래 나이의 성인 분 들이었다. 하지만 그분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기대에 찬 미소를 숨기지 못한 순수한 얼굴 표정은 이내 나에게 초등학교 아이들을 떠올리게 했다. 간단한 인사말을 서로 나누고 수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호두까기 인형>의 스토리를 세 분께 들려드렸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던가? 내 이야기를 듣는 세 분의 눈빛이 너무 반짝반짝해서 나도 모르게 성대모사까지 섞어 가며 동화구연을 하고 말았다. 화려한 발레 공연 영상을 함께 감상할 때에는 들뜬 표정으로 예전에 자신들이 복지관에서 함께 공연 관람을 했던 경험들을 신이 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꽃꽂이 수업을 진행할 때도 자신의 것을 봐달라며 서로 앞 다투어 나를 부르는 모습은 선생님께 관심받고 싶어 하는 영락없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독 말이 없는 한 분이 계셨다. 다들 의자에 편히 앉아 적당히 대화도 오고 가며 여유 있게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데 반해 그분은 조용히 그저 꽃꽂이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꽃을 바라보는 각도를 다르게 하기 위해 뒤로 한 발짝 물러나기도 하고 바닥에 쭈그려 앉기도 마다 하지 않는 모습이 마치 전문가 같은 포스마저 풍겼다.


“민석 님은 꽃꽂이를 배우신 적 있으세요? 아주 잘하시는데요?”라고 내가 묻자,

“네! 한 번이요. 저는 꽃을 아주 좋아해요”라고 조금은 부끄러운 듯 하지만 자랑스럽게 답하시는 민석 님. 내 눈은 쳐다보지도 않은 체 말이다.


  마침내 수업을 마치고 각자의 작품을 사진으로 남기던 중, 수업 시간 내내 질문도 많고 장난기 가득했던 동진 님이 마치 내게 할 말이 있으신 듯 머뭇거리셨다. 그러자 눈치 빠른 사회복지사 분이

“동진 님, 선생님과 사진 찍고 싶어서 그러지?”라고 조금은 놀리듯 물어보셨다.

그러자 동진 님이 수줍게 하는 말, “네~선생님이 예뻐서..”

누군가에게 ‘예쁘다’라는 말을 들어본지가 언제였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나도 모르게 입이 귀 끝까지 걸리는 걸 숨길수는 없었다.(주책) “어머~좋아요. 우리 같이 사진 찍어요~~”


  그렇게 한 분 한 분과 그날 만든 꽃바구니를 들고 인증샷을 찍는데 유독 말이 없던 민석 님 만은 아무리 같이 찍자 권해도 손사래를 치며 마다 하셨다. 그렇게 그분들과의 만남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나름 긴장이 풀려서인지 피곤이 몰려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카톡~’ 밤 12시쯤 되었을까.. 휴대폰을 울리는 카톡 소리에 잠이 깬 나는 어둠 속을 더듬어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민석 님이 보내온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문 앞에 자랑스럽게 놓인 꽃바구니 사진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창문에는 맞은편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던 민석 님까지 반사되어 함께 찍혀있었다. 나는 말없이 한참 동안이나 그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민석 님은 아마 쑥스러워서 사진을 같이 찍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제일 좋은 장소를 골라 오늘 정성을 다해 만든 작품을 찍어 내게 보여주고 싶었을 민석 님의 마음을 나는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늦게라도 표현해 준 민석 님의 마음이 고마웠다. 나는 ‘민석 님, 멋진 후기 사진 감사해요! 오래 두고 감상하세요~^^’라고 답장을 보내 드렸다.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져서인지 아무튼 그날 밤 나는 한참을 뒤척이다 밤늦게야 잠이 들었다.



  한 편, 작년 겨울 첫 만남으로 시작해 어느덧 10개월째 수업을 이어가고 있는 수강생 분도 있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정지된 듯 아이들 학교마저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되어서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다. 낯선 곳에서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이 꺼려지던 그때, 용기 있게 나의 작업실 문을 두드려 준 분은 바로 은채 님이었다.

첫 만남에서 인사를 나누며 나는 꽃을 배우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은채 님께 물었다.

“집에 있기가 너무 힘드네요. 나를 위해 잠깐이라도 집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피곤해 보이던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엔 집 밖을 잠깐이라도 나와야만 하는 이유가 절실하게 담겨 있었다.


  고1과 중2인 은채님의 두 딸들은 한창 학업으로 바쁠 때였고 그런 두 딸들에게 엄마는 매우 헌신적이었다. 그녀는 하루의 스케줄이 늘 빡빡한 아이들을 위해 매일 학교와 학원 그리고 독서실까지 도시락을 싸서 나르며 성심성의껏 아이들 뒷바라지를 했다. 하지만 학업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사춘기까지 겹친 딸들은 늘 예민했고 당연히 모녀 사이에는 부딪히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던 모양이다.(남 일이 아닌 듯하다ㅜㅠ) 그나마 오랜 취미 생활이었던 테니스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었는데 그마저도 최근 어깨 수술을 받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다며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누군가에게 꽃 선물을 받게 되었고 그것을 집에 가져와 화병에 꽂아 두었는데 마음이 힘들 때마다 그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셨다 고 하셨다. 한 번도 꽃꽂이를 해본 적 없는 은채 님은 ‘그냥 꽃꽂이나 한 번 배워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셨다고 했다. 나는 그 가벼운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이주에 한 번씩 오시는 은채 님을 위해 늘 음악과 꽃을 신중하게 고른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우리는 늘 음악 이야기로 꽃을 피웠고 음악 감상은 매 번 한 곡에서 그치지 않고 거침없이 가지를 뻗어 나갔다. 그렇게 수업을 이어나가던 어느 날, 그날따라 유난히 더 집중해서 꽃꽂이를 하시는 은채님께 내가 물었다.


“은채님은 꽃을 가져가면 주로 집 어디에 두세요? 식구들은 꽃을 좋아하나요?”

“우리 큰 딸이 꽃을 좋아해요. 학원, 독서실 갔다 오면 늘 밤 12시가 넘어 집에 들어오는데 식구들이 모두 잠든 깜깜한 거실에서 이 꽃만이 자기를 환하게 반겨주는 것 같대요. 그래서 한참을 들여다보다 방에 들어간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날따라 더 집중해서 꽃꽂이를 하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늘 이곳에 오면 음악과 꽃으로 힐링이 된다며 은채 님 자신을 위로하려 시작한 꽃꽂이는 어느새 그녀의 가족을 위한 위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코로나와 꽃값 폭등으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디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셨던 한 분 한 분과의 만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던 시간이기도 했다. 내 인생 최고의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청각 장애를 가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손녀에게 수화로 전하는 메시지.


“가만히 보면 모든 인연이 다 신기하고 귀해. 갚아야 돼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야 돼. 그게 갚는 거야.”


앞으로는 또 어떤 분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오늘도 나는 음악과 꽃이 함께하는 일상을 꿈꾸며 선물 같은 ‘인연’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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