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울리던 ‘경계경보 발령’ 문자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새벽부터 난데없는 재난 경보 문자 알림 소리에 온 식구가 놀라 잠에서 깨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왜 대피를 해야 하는지 따위는 나와 있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이 컸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와 주차장으로 대피하라는 방송에 불안한 마음은 감춰지지 않았다. 전쟁이라도 난 걸까? 무서웠다. 잠에서 깬 아이들은 무슨 일이냐며 울먹이면서도 본능적으로 주섬 주섬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서둘러 티브이를 켰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했다는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아파트 주차장으로 빨리 대피하자고 했다. 이럴 때는 주말 부부라 남편이 집에 없는 게 참 서럽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경보가 해제되었다는 문자가 왔고 이어서 오보였다는 문자도 날아왔다. 정말 다행이었지만 놀란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이들을 달래어 조금 더 자라고 하고 나도 막내 옆에 누웠다. 막내는 훌쩍이며 말했다.
“엄마, 그때 생각이 나. 너무 무서워.”
‘그때’란 우리 가족이 울산에 살고 있던 2016년의 어느 날이다. 추석을 열흘 정도 앞둔, 평범한 하루의 끝이 저물어 가던 시간이었다. 남편은 하필이면 그날 일이 많다며 퇴근이 늦었다. 어린아이들을 먹고 씻기느라 한 바탕 소란이 지나갔고 아이들이 티브이 앞에 모여 만화를 보는 동안 잠시 찾아온 평화를 누리던 중이었다.
“두.. 두.. 두.. 두두두두두 꽝!” 마치 저 멀리서부터 포클레인이 땅을 파고 오는 것 같은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마침내 아파트 큰 베란다 창이 심하게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지진이라고 느꼈다. 7살이었던 큰 아이는 시키기도 전에 신발장에서 제일 빨리 신을 수 있는 장화를 신고 스스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나는 놀라 울고 서있던 4살 막내를 끌어안고 아파트 16층에서부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파트 출입문 앞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고 하나같이 잠옷 차림이었다. 남편에게 전화하려 했지만 통신은 두절됐다. 십 분쯤 지나자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경주 지역에서 규모 5.2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속보가 떴다.
사람들은 30분쯤 서 있다가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갔다. 날도 쌀쌀한데 잠옷 차림의 아이들을 그냥 둘 수가 없었던 나도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정확히 50분 뒤, 처음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규모 5.8의 2차 여진이 왔다. 아까보다 더 놀란 사람들은 이번에는 근처 학교 운동장으로 대피를 했다. 아파트 단지에서부터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까지 이어지던 우리 동네 큰 대로변 길가에는 마치 전쟁터의 피난길 같은 긴 행렬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만난 동네 친구들과 반갑게 뛰어놀았고 어른들은 모두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연락을 하거나 속보를 기다렸다. 아예 텐트와 접이식 의자를 가져온 사람들도 있었다. 40분쯤 후, 남편과 연락이 닿았고 마침내 우리 가족은 상봉을 했다. 하지만 집에 다시 들어가기에는 너무 무서웠다. 우리는 동네 공터에 차를 세우고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이 든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났다. 저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줘야 하는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두렵고 막막했다.
남편은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본가로 피신을 가자고 했다. 어차피 며칠 후면 추석 명절이므로 이왕 이렇게 된 거 미리 가자는 거였다. 남편은 재빨리 혼자 계단으로 집에 올라가 커다란 트렁크에 아이들 옷가지만 대충 챙겨 내려왔다.
새벽 두 시. 그렇게 우리는 산청 시댁에 도착했다. 아이들과 나는 잠옷 위에 얇은 점퍼만 겨우 걸친 모습이었다.
명절 연휴까지 포함해 시댁에 일주일을 머물렀고 그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평화로운 일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크고 작은 여진이 느껴졌다. 남편과 아이들이 아침에 모두 나가고 나면 나는 만약 다시 큰 지진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데리고 올 것인지 하루에도 별 번씩 생각하느라 신경은 늘 곤두서있었다. 생존 가방은 항시 현관 앞에 두고 잠은 모두 거실에서 함께 모여 자던 날들이었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친 하루하루였다.
“서울로 이사 가자!”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나는 어차피 서울 사람. 가족도 친구도 모두 그곳에 있고 오늘 당장 울산을 떠난다 해도 아쉬울 건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남편의 직장은 이곳에 있으므로 우리는 주말 부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렸기에 나는 자신이 없었다. 망설이는 나를 남편은 계속해서 설득했고 늘 그랬든 그는 결심한 것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2017년 2월, 큰 아이 8살, 작은 아이 5살에 아이들은 각각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주말 부부로 잘 지내고 있다.(주말 부부, 해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오늘 새벽 울렸던 재난 경보는 희미해져 가던 그날의 위기 상황을 다시 떠오르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안전에 불감해지지 말 것을 경고해 주었다. 비록 그날 서울 지역 경계경보는 ‘오보’라고 발표되었지만 언제 또 이런 경보가 울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생존 가방을 다시 쌌다.(남편이 놀렸습니다.) 그리고 현관 신발장 안에 고이 모셔두었다. 부디 이 가방을 들고 뛰쳐나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두렵고 무서워서 떠는 아이들 앞에서 무력해지는 어른이 되는 일이 없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그날, 하교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내 아이들을 차례로 꼭 안아주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감사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