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경험한 사회생활은 신나는 일투성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복지실로 몰려오는 아이들과 즐겁게 보드게임을 하고, 선생님이 맡겨주신 서류 업무를 하고, 여기저기 심부름도 다녔다.
지출결의, 품의 이런 기본적인 회사용어와 서류 작성법도 그때 많이 배웠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학사사 선생님(학교사회복지사) 선생님도 25살,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린 나이였기에 우리는 죽도 참 잘 맞았다.
우리는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과 행사를 기획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여름방학에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과 함께했던 진로 프로그램이었다.
우리는 방학에 앞서 진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에게 꿈을 물었다.
아이들의 꿈은 경찰관, 요리사, 배우, 화가, 동화책 작가 등 다양했다.
아직 사회초년생이라 인맥이나 경험은 없지만 열정만은 넘쳤던 우리는 해당 직업인 중 아이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직업인들을 인터넷으로 찾아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우리는 시청에서 봉고차를 빌리고, 운전자를 구해 방학 내내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직업인들을 만났다.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감상한 뒤 배우들을 인터뷰하고, 동화 일러스트 작가의 전시회에 방문하여 작품들을 둘러본 뒤 작가님과 만남을 가졌다.
직업인들은 아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시며 각자의 분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프로그램 중 가장 잊지 못할 만남은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종로 밀레니엄 힐튼 호텔의 주방장님을 인터뷰한 일이었다.
무슨 용기였는지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주방장님께 인터뷰 요청 메일을 보냈고, 주방장님은 너무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시며 우리를 호텔로 초대해 주셨다.
웅장한 호텔에 들어서며 바짝 긴장한 아이들에게 주방장님은 간단한 다과를 내주시며 요리사라는 직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정말 잊지 못할 방학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힘든 점도 있었다.
월 30만 원의 월급에 급식을 떼고 세금을 떼면 남는 돈은 24~5만 원 남짓, 월급이라 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출퇴근 거리도 쉽지만은 않았다.
2시간 반을 버스 타고 가야 학교에 도착하다 보니 9시 출근이어도 5시 반에 일어나 준비해야 했다.
교통비만으로도 7~8만 원이 매달 나갔던 것 같다.
급여의 3분의 1은 출퇴근만 해도 날아가는 돈이었다.
이러다 보니 나는 나의 선택으로 4대 보험을 들지 않기로 했다.
(당시 급여가 적다 보니 선택권을 주셨다)
이게 후에 어떤 나비효과를 가져올지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30만원의 열정페이….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결국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
전단지도 돌리고 공장에 나가 한 번씩 돈을 벌어오기도 했다.
그러다 주중에도 투잡을 뛰게 되었다.
학교에서 퇴근하면 서둘러 저녁 알바를 하러 1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저녁을 챙겨 먹을 시간은 당연히 없었고,
학교 일이 늦어지는 날이면 알바 출근을 하는 순간부터 ‘죄송합니다’를 연신 말하며 들어가야 했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바쁘지 않을 때면 꼭 밥을 먹고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새벽 5시 반에 시작된 하루는 매일 꼬박 새벽 1시가 넘어야 끝이 났다.
청소년 관련 자격증을 더 따기 위해 사이버대로 온라인 강의도 수강했다.
복수전공에 부전공까지 그 와중에 욕심을 부려 다양한 강의를 수강했다.
학비를 스스로 충당하고 있었기에 더 악착같이 공부했다.
과제, 시험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열정페이를 받으며 정말 열정적으로 살았다.
몸에서는 여기저기 망가지는 신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밥을 잘 챙겨 먹지 못하니 위염과 위경련을 달고 살았으며, 몸살도 자주 났다.
새벽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 일상을 견디기 위해 몸에 맞지 않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 모금씩만 마셔도 온갖 부작용들이 나오곤 했지만 버티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여기서 몇 개월만 있으면 시험 자격이 되니 조금만 힘을 내면 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열정페이도 괜찮았던 그 열정이 꺾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