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퇴사를 마치고 쓰리잡으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고 나니 어느새 겨울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이제 부모님 말씀대로 인턴이 아닌 일반적인 취업을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여기저기 취업공고를 보고 있으니 해보고 싶은 일들이 다시 생겨났다.
아직은 열정적인 새내기 사회인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참 좋았다.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아이들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충전이 되는 기분이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면 흐뭇해지고, 아이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아이들과는 8시간을 함께 있어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아이들이 너무 일찍 철들지 않았으면 늘 바라며 기도했다.
자기 전 아이들의 말 하나, 행동 하나를 떠올려 보며 행복하게 잠드는 나는 역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을 해야 했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을 찾겠다는 생각으로 취업사이트를 둘러보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니 왜 다 계약직이지…?
아이들을 만나는 대부분의 일자리는 계약직, 급여는 60~100만원 수준(2013년 기준, 최저시급 4,860 시대)이었다.
그나마 풀타임도 많지 않았다.
나는 그나마 야간 풀타임으로 취업하여 100만원 수준의 급여를 받았지만, 당시 지역 내 방과 후 공부방 교사 모임에 참여한 교사 중 절반 정도는 파트타임으로 60만원 수준의 급여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사실 직장을 찾을 당시에는 그런 조건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1년 미만 계약직이라는 조건도 100만원 언저리의 급여도 다 괜찮게 느껴졌다.
30만원 열정페이로 시작했던 첫 사회생활이 나의 눈을 너무 낮춰줬던 것일까?
애초에 청년실업 시대 취업에 뛰어들어서인지 비정규직, 계약직이라는 단어는 내게 낯설지 않았다.
뉴스에서 매일 떠들어대도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라면 어느 정도는 시대의 흐름이라 생각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장에 중견기업 정규직으로 취직 예정이었던 언니도 취업 취소로 중소기업의 계약직으로 입사한 마당이었다.
이 시대 취업시장에 뛰어든 청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렇게 중학교 방과 후, 초등 야간 방과 후 교실 두 군데 면접을 보게 되었고, 집에서 지하철로 몇 정거장 거리에 있는 초등 야간 방과 후 교실에서 먼저 합격 연락을 받게 되었다.
또 다른 시작이었다.
합격 연락을 받고 바로 인수인계 날이 잡혔다.
인수인계는 전임자의 퇴사 전 내가 방문하여 8시간 인계를 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나의 2번째 직장생활 내내 골치였던 문제가 터졌다.
이 분야에서 경력이 많다는 40대 전임자는 나를 마주하곤 바로 나이부터 물었다.
나이를 말씀드리니 너무 어린 데다가 생긴 것도 애기 같다며 홀로 심각해졌고,
이를 팀장님과 과장님께 이야기하겠다며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채용할 때 상급자들이 내 나이와 외모를 보지 않고 뽑았을 리는 없었고,
아이들을 만나본 경력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겼지만
전임자는 내 나이를 물어보는 6학년 학생에게 대뜸
'선생님은 40살이래'
라는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을 했다.
(당시에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전임자의 행동과 태도는 선을 넘었다)
그러고선 나에게 아이들에게 절대 진짜 나이를 알려주지 말라 당부했다.
새내기 사회인이었던 나는 심각한 표정을 한 전임자의 말, 던져진 상황에 일단 '알겠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린것은 사실이었다.
나도 내 나이를 아이들에게 굳이 밝힐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거짓말이란 방법을 선택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껏 아이들을 만나며 아이들에게 나이를 밝힌 적도 없었고, 아이들이 물어도 가볍게 '비밀~'하고 넘겨버리면 될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이들을 만날 때 나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고 나자, 나 역시 '나이가 문제가 되는구나'라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후 내가 퇴사할 때까지 내 나이는 아이들 뜨거운 주제가 되었다.
전임자가 계산 없이 던진 '40살'은 내 외양을 본 아이들이 절대 납득할 수 없는 나이였기에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아니 선생님 그러니깐 진짜 몇 살인데요?'
'40은 아니잖아요~35살?!'
'내가 서류 보니깐 9*년생이던데 20살이죠?'
온갖 질문을 퇴사하는 날까지 주에 한 번은 받아야 했다.
'나이' 논쟁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고 그 직장을 다니는 동안,
화장을 전혀 하지 않던 나는 엄마의 파란색, 보라색 섀도를 빌려 눈화장하고 다녔고,
꽃무늬 원피스, 긴 허리 치마와 같은, 평소에는 절대 입지 않는 스타일의 옷들을 입고 다녔다.
작은 키를 감추기 위해 7~10센티의 통굽 신발만 신고 다녔으며, 잦은 거짓말과 회피를 해야 했다.
이 일은 이후 나의 사회생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20대 후반까지도 계속해서 사회생활에서 나이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나이 사회에 진입하여 나는 언제나 막내였으나,
내 나이를 밝히는 순간 약점이 돼버릴 것으로 생각하여 동료 외 업무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나이를 밝히지 않았다.
나의 사회생활에 가장 큰 약점이 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0대에 들어서며 지난날을 돌아봤을 때, 나이는 내 약점이 아니었다.
나이를 핑계로 경력이 더 많음에도 승진에서 밀렸을 때는 물론 큰 약점으로 작용하였지만,
(사실 나이는 핑계고 다른 이유가 있었다. *4번째 퇴사기)
그 외의 장면에서는 생각해 보면 이점도 많았다.
어렸기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보호 아닌 보호를 받았던 일도 많았고, 쉽게 용서되는 일도 많았다.
어렸기에 행동이 빠르고 정보수집도 빨라 사회생활에서 좋은 평판을 받기도 했다.
새내기 사회인은 주변의 말에 휘둘리기 참 쉬운 것 같다.
20대 초반, 그때의 나를 볼 수 있다면 조금 더 나를 믿고 당당하게 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너는 꾸며내지 않아도 충분히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어!
그러니 흑역사 그만 생성하고 제발 그 파란색 섀도는 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