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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Aug 18. 2023

꿈꾸는 교실 : 나를 따르라~!

꿈꾸는 교실 : 나를 따르라~!


나는 야간방과후교실의 총책임자이자 유일한 직원이었다.

복지관에서 가장 늦게까지 운영되는 야간방과후의 모든 것을 내가 계획, 운영, 관리해야 했다.

경험이라고는 7개월 남짓한 학교사회복지실 보조 근무가 다인데 갑작스레 모든 것을 혼자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힘든 것보단 즐거운 게 참 많았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학교가 끝나고 방과 후 교실에 와 집에 가는 8~9시까지, 숙제, 공부, 휴식, 저녁 식사, 귀가 지도까지가 내 역할이었다.

공부만 시킬 수 없으니 다양한 신체 활동, 문화 활동, 놀이 활동들도 준비했다.

아이들의 방과 후 시간을 그저 시간을 때우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일들로 알차게 채워주고 싶었다.


연간 예산 100만 원이라는 적은 사업비를 참 알차게도 썼던 것 같다.

생일 선물은 문구점 후원, 생일파티 역시 인근 치킨집, 베이커리 후원으로 알차게 생일상을 차렸다.

매주 간식을 사러 갈 땐 베이커리에서 미리 빼놓아 주신 빵을 얻어오곤 했다.

적은 예산에 아이들이 간식에 불만을 가질 때도 있었지만 비장의 무기인 마이쮸로 게임 한판을 하면 불만은 싹 사라지곤 했다.

예산은 많지 않았지만 아끼고 아껴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견학도 다녔고,

해피콩을 기부받아 여름방학에 아이들이 보고 싶은 4D 영화를 보러 가기도, 수영장에 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보고 싶다던 4D 영화를 보고 단체로 멀미가 도져 한참을 앉아 쉬던 웃픈 모습과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싸워 내려서 한바탕 혼낸 것도 지금은 재밌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예산은 부족해도 마음만은 넉넉했고 참 즐거웠다.


가정에서 케어가 잘되지 않는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었기에 저녁 식사는 물론 위생 문제도 방과 후에서 해결해야 했다.

처음엔 목욕 쿠폰을 지급해서 아이들이 인근 사우나에서 씻고 오게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여름철 불청객 '머릿니'를 만나고부턴 매주 1회 복지관 내 샤워실에서 목욕 지도까지 해야 했다.

끈질겼던 머릿니와의 전쟁은 전체 아이들에게 몇 번씩 약을 치고 내 머리까지 단발로 만들고서야 끝이 날 수 있었다.

야간 방과 후에는 다양한 사정으로 인해 가정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기 힘든 아이들이 왔다.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 장애인 가정 아이마다 각기 다른 사연들이 있었고,

각 가정 속 각기 다른 문제들이 항상 있었다.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역시 심리적이던 사회적이던 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모여있는 야간 방과 후는 자주 혼돈의 카오스에 빠지곤 했다.

많은 사건˙사고들이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을 배웠다.


아이들의 행동을 바꾸는 가장 큰 도구는 애정과 인내심이란 것이다.


요샛말로 금쪽이 같던 아이들이 바뀌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한 번은 술과 담배에 손을 대고 폭력적인 행동을 해 전임자에게 퇴출당했던 아이가 다시 방과 후를 찾아왔던 일이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상황이 급했는지 일단 아이를 방과 후에 보내고선 내가 연락을 드리자, 여기 말곤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며 제발 아이를 돌봐달라며 애원했다.


이전의 상황을 모르는 나는 당연히 아이를 받아주고 싶었으나,

팀 회의에서는 그 아이를 받아선 안 된다는 직원들과 아이를 거부할 수 없다는 직원들의 설전이 벌어졌다.

다른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주며, 폭력성이 있어 위험하다는 의견과 가정에서 돌봄이 어려워 비행에 노출된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 야간 방과 후의 목적에 부합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상급자는 내 의견을 가장 존중한다고 말해주었고, 나는 그 아이를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정말 쉽지 않았다.

금쪽이는 규칙은 당연히 지키지 않았고, 나를 시험하는 듯한 말과 행동을 하였다.

반대하는 직원들의 말처럼 다른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주진 않을까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거부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불만들을 받아들여주자, 아이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아이가 규칙안으로 들어오고 우리 교실에 스며들기까지 단 2~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른들의 생각보다 매우 빠르게 아이가 변화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 역시 지난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둘러싼 여러 환경에서 거부당하고 엇나가는 방식이 익숙했던 아이와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인내심과 애정이 필요한 일이었다.

아이의 의견대로 저녁 식사 후에 공원으로 다 같이 산책하러 나갔고, 신체활동도 늘려주었다.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의견은 거절하였고, 아이의 잘못된 행동들도 점차 수정해 나갔다.

어느새 아이는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 가장 먼저 방과 후에 도착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스승의 날, 빼빼로데이 같은 기념일마다 작은 선물을 툭 건네고 도망가는 츤데레가 되었다.


가정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주에 2~3회는 어머님과 통화하며 가정에서의 지도 방안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위기나 고비는 가끔 찾아왔지만, 그 빈도가 점차 점차 줄어들었다.

아이는 나에게 찾아와 요즘 엄마가 착해졌다고 말했고, 어머님은 방과 후 교실에 찾아와 아이가 변했다며 감사 인사를 하셨다.

가정이 안정화되니 학교생활도 안정화되고, 방과 후를 다니게 되며 이전에 어울려 놀던 중학생 형들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지니 비행 문제도 사라졌다.

고학년이던 그 아이를 반장으로 세우니 교실 분위기도 한층 정돈되었다.


아이들은 종종 실수로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할머니'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아이들과 마주 보고 한바탕 웃었다.

20대 초반의 나에게 '할머니'는 조금 충격적이긴 했지만, 할머니와 살고 있는 아이의 상황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실수였기에 '할머니? 할머니?!'라고 되물으며 크게 웃어 넘겼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주양육자보다 학교나 방과 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들의 귀가는 차량으로 지도해 주었는데 대부분 아이들이 자기를 가장 늦게 내려주길 바랐다.

그리고 꼭 차에서 내려 집 앞까지 함께 걸어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함께 집 앞으로 걸어가는 시간에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선생님과 학생들보다는 골목대장과 아이들 같은 우리 방과 후는 복지관 모든 선생님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곤 했었다.

물론 최고 말썽꾸러기도 우리 애들이었다.

떴다 하면 사고지만 어른들은 우리 애들을 참 예뻐해 주셨다.


우리 교실의 이름은 꿈꾸는 교실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꾸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내가 지은 이름이었다.

이름이 없던 야간방과후에 꿈꾸는 교실 팻말을 만들어 붙이는 날 아이들도 참 신나 했던 것이 기억난다.

검은색 폼보드에 색종이로 만든 별과 달을 만들어 붙여 팻말을 만들고, 나무로된 교실 문에 글루건을 사용해서 붙였다.

초등 고학년에게는 굉장히 쉽고 단순한 활동임에도 아이들은 뭐가 좋은지 들떠있었다.

이름이 정해지자 아이들은 '꿈교'라는 줄임말로 우리 교실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냥 밤에 돌봐줄 사람이 없어 가는 '야간방과후'에서 아이들만의 공간인 '꿈꾸는 교실'로 바뀌었을 때, 아이들에게 일종의 소속감 같은게 생긴 것이다.


훗날 경력증명서를 떼기 위해 다시 복지관을 방문했을 때 여전히 남아있던 그 팻말을 보았을 때 왠지 모르게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꿈꾸는 교실에서의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아이들에게 진심이었고, 그 진심이 통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때 그 아이들이 벌써 대학생들이라니…. 세월 참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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