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낯선 휴식, 치열하지 않아도 괜찮아.
10. 나의 N번째 퇴사기 :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렇게 생애 첫 비행기에 올라타 9시간 여 비행 끝에 중앙아시아에 도착했을 때 첫 입국부터 삐끗했던 기억이 있다. 생애 첫 비행기, 첫 해외 입국이었던 나는 비자를 잘못 발급받았고(비지니스 비자 발급 안받고 무비자로 입국), 그 대가로 입국과 동시에 20여만원을 벌금으로 내야 했다. 무지의 대가를 세게 치르고 공항에서 3~4시간을 보내고서야 들어왔던 첫 입국길.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은 도로 풍경이 신기했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도착했던 집의 모습, 가게의 간판, 사람들의 말소리 모든 게 한국과는 달랐고 그 모든 것이 나에겐 두근거림으로 다가왔다. 내가 처음 그곳에 도착한 계절은 지금과 같은 여름의 초입이었기에 그곳의 긴 여름이 끝나기까지 약 3개월간은 언어공부할 시간도 없이 이런저런 캠프를 쫓아다니며 봉사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 3개월간도 마음이 급했던 나는 현지인 동료들과 더듬더듬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틈틈이 언어를 습득했다.
아살람 알레이쿰!
인사를 건네면 무슨 말이 돌아오는지는 이해 못 해도 낯선 땅의 낯선 사람들은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러시아 인사말을 배워갔지만 그곳에서 러시아말을 하는 외국인을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무조건 현지어를 배우려 노력했다. 3개월의 기나긴 여름이 끝났을 때, 열심히 인사하고 다닌 덕에 시장에 아는 사람이 꽤 많아졌고 간단한 대화도 가능해졌다.
물론 이때 잘못들인 언어습관을 교정해 주느라 나의 현지인 언어 선생님은 문법교정에 꽤나 머리가 아프셨다. (내가 감사하단 인사를 하면 현지인들이 늘 웃었는데 알고 보니 내 감사인사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에게 감사합니다!') 심지어 내가 구사하는 어휘는 모두 내가 사는 국경지역의 사투리(*중앙아시아는 내륙지방으로 국가들이 붙어 있어 국경지대는 문화혼합 현상이 심함)여서 수도에 올라갔을 때 현지 친구들이 굉장히 많이 놀려먹었다.
3개월 간 치열하게 보냈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한풀 꺾인 더위와 함께 다음에는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궁금했는데 영 소식이 없었다. 시골집에 현지인과 함께 살며 언어를 배우고 있었지만 그 외에 나에게 어떤 일이 맡겨질지 알 수 없었다. 매일 마당에 있는 텃밭을 가꾸고, 물을 뜨러 시내를 돌아다니고(상하수도가 없어 물을 떠 와야 함), 가끔 시장을 가고, 이틀에 한 번은 반야에 가서 목욕을 했다. 삼시 세끼 집에서 현지식 혹은 한식을 함께 만들어 먹었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투잡을 하며 바쁘게 살던 나에게 이렇게 단조로운 일상은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지는 일이라곤 낮에 마당에 나가 빨래를 하는 게 다였다. 이 일은 정말 하기 싫었다. 한국에서 손빨래라고 해봐야 어렸을 때 가끔 학교실내화 빠는 게 다였던 나에게 매번 모든 빨래를 손으로 해야 한단 건 참 곤욕이었다.
결국 손으로 돌리는 세탁도구를 해외직구로 사서 또 내가 있는 중앙아시아 시골지역으로 배송받아(배송비만 20여만원) 빨래를 했는데, 나의 언어 선생님이자 동거인이었던 현지인 언니는 나를 한심하게 보며 '... 너 그거 정말 빨래가 된다고 생각하니?'라고 되물었다. 내가 봐도 빨래는 안되고 있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휴식.
가지 않는 시간에 현지어 사전을 사서 달달 외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다행히도 언어 실력이 쑥쑥 늘기 시작했다. 그걸 위안 삼으며 이 낯선 휴식기를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가을 어느 날 내게도 일이 주어졌다. 방과 후 교육을 하는 센터에 한국어 초급 클래스가 열리는데 거기 강사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한국어 초급 신입생은 3명 모두 철자부터 가르쳐줘야 하는 아이들이었기에 현지어 초급은 뗀듯한 나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즐거웠다. 매일 아침 10시경 느긋하게 집을 나와 15분여를 걸어 센터에 갔다. 오전은 수업을 준비하며 한국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며 보내고 점심쯤 집에 와서 함께 밥을 해 먹는다. 오후가 되면 아이들이 찾아왔다. 1시간 즈음 초급반 3명의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을 했다. 10살 12살의 우리 반 아이들은 나를 무척 잘 따랐다. 보름이, 향기, 햇살이 한국어 이름도 지어주고 같이 K팝 뮤비를 보기도 하며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면 3시~4시 즈음 다시 돌아와 마당에서 그네를 타거나 나무에 열린 살구, 체리, 플럼 등의 열매를 따먹었다.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지내게 되며 함께 저녁식사를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루가 잘 갔다.
치열하지 않아도 참 만족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낯선 땅에서 낯선일들, 당황스러운 상황들을 마주할 때도 많았지만 그런 경험들이 되려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변했고 어떤 문제든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아내려 했다. 다소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던 한국에서의 삶과 크게 달라진 점이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났다.
엄청난 각오를 품고 결연하게 비행기에 탔던 모습과는 다르게 좀 더 여유로워진 모습으로 다시 비행기에 올라탔다. 남기고 가는 일들, 사람들이 아쉬웠지만 이제는 정말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어느덧 20대 중반을 맞은 나는 타국에서 한 뼘 더 성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