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되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마흔다섯 살 되었다. 우선 마흔다섯 살이면 곧 오십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물네 살 이후로 나이는 나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몸은 하루하루 달라지겠지. 가끔씩 무릎도 아프기도 하고, 이제는 흰머리도 나기 시작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스물네 살 이후로 마음은 매년 똑같이 이곳에 머물러있다. 사실 가끔씩은 내가 몇 살인지 잊어버리기도 한다. 세월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젊게 살고 싶어서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세월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그 단계들을 거치지 않고 살고 있다. 다른 모습의 마흔다섯의 삶이 궁금해진다. 나의 친구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쳐다보았다. 구불구불한 긴 머리 사이에서 열 가닥 정도의 흰머리를 발견했다. 사실 발견한 것이 아니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냥 놔두었다 뽑고 싶지 않았다. 사실 신기하지 않은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갑자기 검게 자라던 머리카락이 색깔을 바꾸어 흰색으로 자라고 있으니까 말이지. 아마도 머리카락뿐만이 아니겠지.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작은 솜털들도 점점 흰색으로 변하고 있을 테니까. 거울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이렇다. 흰머리 한가닥을 잡고는 그것을 바라보느라 이마에 주름이 생겨서는 그것을 뽑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이 흰머리를 뽑으면 그곳에서 두 가닥의 흰머리가 자란다는데 그게 정말일까? 뽑아버려도 어차피 내일이면 또 자랄 터인데 고이 놔두고 내일도 지켜보기로 한다. 몇 번의 고민을 했었다. 염색을 해야 하나 하고. 그러면 세 달에 한 번씩은 염색을 해야 하고 그러면 시간도 많이 투자해야 하고, 돈도 많이 들어갈 테니까. 언젠가 유튜브를 통해 문숙 님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참 자연스러운 모습이 예쁘다는 생각을 했었었다. 은발이지만,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은 어쩌면 더 예뻐 보였으니까.
아마도 당분간은 염색을 안 할 것 같다. 해봤자 많이 달라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 갑자기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할머니는 머리를 자르지 않으셨다. 긴 머리를 매일 아침 기름칠을 하고 참빛으로 빗어서 돌돌 말아 비녀를 마지막에 곱게 꽂으시곤 했다. 주기적으로 검은색으로 머리카락을 물들이시고는 반질반질 윤기가 가득한 머리를 꽤나 좋아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를 만날 때는 어김없이 짧게 자라난 그래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뽑아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물었다 "할머니 이 흰머리 왜 뽑아? 귀찮게?" 할머니는 지저분해 보인다고 빨리 뽑으라고 하신다. 사실 그럴 때마다 실수로 검은 머리도 많이 뽑게 된다. 족집개가 머리카락 한가닥만 잡히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단아한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사셨다.
나는 지금 우리 할머니의 딱 반평생을 살고 있다. 할머니처럼 염색을 하지는 않겠다. 그것도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는. 아마도 머리 색깔 때문에 난 할머니의 나이가 그렇게 많으시다는 것을 깜빡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몸은 늙어가고 있는데 머리만 청춘이면 너무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다. 우리 할머니도 짙은 갈색 같은 색으로 염색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우리 할머니가 짧은 뽀글 머리를 하고 계셨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나도 우리 할머니처럼 나이가 들어서 아름다운 긴 머리를 기름칠해 곱게 빗으며 단장하고 싶어 진다. '할머니 난 이제 머리 기르고 있어 할머니처럼 나이 들어서 곱게 보이고 싶어서' 남들이 정한 기준에 맞추지 말고, 개성 있는 마흔다섯 살로 살고 싶다. 미세한 주름이 늘어가는 것들도 예쁘게 봐주면서.
흰머리를 보면서 할머니를 기억하게 되었고, 잠시 할머니와 함께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 그것을 회상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한 줄 쓸 때마다 할머니의 모습이 더욱 또렷이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것을. 잊고 지냈었는데 참 신기하다. 꼭 시간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생생한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보여서. 글을 쓴다는 것이 어쩌면 내 안에 있는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펼쳐보고 다시 곱게 접어놓은 서랍을 정리하는 것 같다는 생각. 마흔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글을 쓰고 싶었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글은 써지지 않았다.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려웠다.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서 아예 시작하기가 힘들었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시작하는 브런치 작가니까 걸음마부터 시작이다. 조금씩 꾸준히 써 내려가면 글 쓰는 것이 조금은 편해질 듯싶다. 나는 이렇게 마흔다섯 살에 작가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