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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모리정 Jul 18. 2022

나는 세계여행을 해야겠다.

세상은 넓고 나는 그 안에서 모래알 같이 작은 존재겠구나.

2017년 11월 26일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오늘은 두브로브니크에서 이탈리아 바리까지 야간 페리를 타고 넘어가는 날이다.

밤 11시에 출발하는 페리라 오전에 숙소 체크아웃을 해버리면 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기도 힘들고

밤까지 있을 곳이 없을 것 같아 처음부터 숙소를 27일 체크아웃하는 걸로 잡아놨다.


집주인 분께도 야간 페리라 오늘 밤에 체크아웃을 하겠다고 미리 말씀드려놨다.

그렇게 짐을 싸서 버스를 타고 페리 선착장까지 갔는데

음... 이탈리아까지 가는 야간 페리면 눈에 띄게 커야 할 텐데

아무리 둘러봐도 큰 페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타는 사람도 많을 텐데 선착장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뭐야.. 오늘 페리 뜨는 거 맞아..?

페리 사무실로 달려가 오늘 페리 뜨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 오늘 기상악화로 안 떠. 내일로 밀렸으니까 내일 이 시간에 오면 탈 수 있어.

메일 보냈는데 확인 못 했니?"

이러는 거다.

근데 예약을 한 친구가 자기 이메일로는 그게 날아온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모를 수밖에..ㅠㅠ 외국에서는 네이버 말고 지메일을 쓰라더니 이런 이유가..

근데 비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부는데 무슨 기상악화란 말인가.


친구랑 나는 고민에 빠졌다.

1. 선착장 내부에서 노숙을 할지

2. 선착장이랑 가까운 곳에 숙소를 2박을 잡을지

3. 오늘 나온 숙소로 다시 돌아갈지


일단

1. 우리는 침낭도 아무것도 없어서 노숙은 무리인 것 같고

2. 선착장 근처 숙소들은 거의 호텔이라 너무 비쌌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

어차피 오늘까지 묵는 걸로 숙박비를 냈으니 다시 돌아가서 오늘 잔다고 하고

내일 1박 연장을 하면 되겠다 판단해서 다시 돌아가자...! 했는데

문제는 그 천국의 계단을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래도 노숙이랑 비싼 돈 주는 것보단 이게 낫겠지...

그렇게 우리는 짐을 가지고 그 천국의 계단을 총 4번을 오르락내리락했다.

18킬로짜리 배낭을 메고서.. 아마 내 인생 제일 힘든 운동이 아니었을까.






11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던 날


오늘은 선착장에 도착하니 누가 봐도 "나 야간 페리요" 하는 큰 배가 선착장에 떡 하니 있었다.

여권 검사를 하고 페리에 올라 데스크에서 방 열쇠를 받고 방으로 갔는데, 오잉.

4인실로 예약했는데 3인실에 세면대도 같이 딸려있었다.

그리고 쓰는 사람은 우리 둘 뿐.

페리 타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아무래도 방을 업그레이드해 준 것 같다.

그리고선 친구랑 배 갑판 위에는 한 번 올라가 봐야 하지 않겠냐며 바로 방을 나와

밖으로 향하는 문을 찾아 돌아다니는데 도저히 못 찾겠어서 그냥 피곤하다며 방으로 돌아왔다.


친구는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고

나는 드라마 한 편만 보고 자야지! 하고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잠을 청하려는데

갑자기 '창 밖 한 번 내다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창 밖을 봤다.

어느새 육지는 안 보이고 달빛이 바다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갑자기 '꼭 갑판 위로 올라가야 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겉옷을 챙기고 조용히 방을 나와, 아까 친구와 작정하고 찾을 때 못 찾았던 갑판 나가는 문을

정말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단번에 찾아냈다.

내가 나온 문은 갑판 옆 부분. 배가 달리는 방향인 앞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말 문이 턱 막혔다.

어두컴컴하고 드넓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이 페리 하나.

그리고 내 눈앞에서 고개를 들어 머리 위, 고개를 젖혀 뒤통수 까지..

하늘에 별을 뿌려놨다는 말이 이런 말이구나..

살면서 그렇게 별이 많은 하늘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누운 반달이 엄청 밝게 빛나 바다를 비추고 있는 모습도 너무 아름다웠다.

원래 달은 세로로 뜨는 줄 알았는데 누운 반달이라니.


하늘 위의 수많은 별

바다를 비추는 달

바다를 가로지르는 소리와 바람

수업시간에 교과서 펼치고 들어보기만 한

아드리아 해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


살면서 처음으로 자연을 보고 울었다.

거대한 바다 위, 나 홀로 딱 서있으니

세상이 정말 넓구나.. 이 넓은 세상에서 나는 정말 모래알보다 작은 존재겠구나..

이렇게 작은 존재인 내가 무슨 큰 인물이 되겠다고 그렇게 큰 문제들을 안고 살며

전 세계 인구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사람들의 눈에 들려고, 그 사람들을 이기려고,

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살아왔나.. 세상 밖으로 나오면 99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순간 한국에서 나의 고민거리들은 정말 한낱 먼지와도 같게 느껴졌고,

지도상에서 손톱만 한 그 작은 나라에서 참으로 힘들게 경쟁하며 살아왔구나를 느꼈다.

가까이서 보며 당장 나를 짓누를 것만 같던 큰 문제들이

사실은 이 깊숙한 바다에 던져놓으면 어디 있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금처럼,

이 넓은 세상에 던져놓으면 이게 누구의 고민인가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주 작은 모래알처럼, 그렇게 작아져있었고 작아 보였다.

세상이 이렇게 크고 넓은데 나는 뭐 하러 그 작은 나라에서

또 그보다 더 작은 지역의 실습실에서

또 그보다 훨씬 작은 나의 방에서

왜 그렇게 힘들어하고 해결하지도 못할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나는 2017년 11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던 날 밤 12시

두브로브니크에서 이탈리아 바리로 넘어가는 야간 페리 갑판 위에서.

세계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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