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내려다볼 때 저는 종종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입니다. 이를 쉽게 말로 옮겨 담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이 위로나 걱정의 눈길을 보내며 입을 막을 것이라고 속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약간의 인내심을 가져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마천루에서 지평선을 마주할 때도, 통통배에서 해수면이 넘실거릴 때도, 저는 뛰어들고 싶습니다. 중력이 제 옷과 표피를 거칠게 벗기며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원자 단위까지 찢어발기며 하나의 혜성이 되고 싶습니다. 미처 파괴시키지 못한 잔재는 경계면에 부딪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부서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 재조립되었으면 합니다. 천공에서 지상으로, 그리고 심해로 그곳에 사는 생물이 되어 온전하게 용해되고 싶습니다. 어디에 도달하진 모릅니다. 모든 물질은 경계면을 지날 때 굴절합니다. 제가 마주한 인력의 원동력으로는 절대 도달하지 못하고 굴절할 것입니다. 잘못 발사된 로켓처럼 아무도 모르는 망망대해에 떨어질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여행의 이유’후반부에선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차용하며 여행자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전의 세계에서 전쟁을 종결시킨 영웅이었지만, 여정에선 오디세우스, 그리고 우리 여행자는 ‘아무 것도 아니’여야합니다. 새벽에 내리는 서리처럼 빛이 비치면 대기의 품으로 몸을 숨겨야 합니다. 그러지 않은 사람은 기름처럼 그들의 삶에서 유리되어 그들끼리 뭉치거나 오디세우스처럼 화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안락하고 익숙한 고향을 놔두고 돈과 시간을 들여 타지에서 몰개성 해지려고 노력합니다. 현대의 개성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자존감과 자아 정체성 뿐만 아니라 기대, 의무, 책임과 관계 등이 사회에서 달라붙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서지고 싶어 합니다. 익숙한 환경에선 아무리 내리쳐도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타지의 높고 험한 곳을 찾아 중력의 도움을 받아 육체를 완전히 분해합니다. 그 안에서 자신을 옭매이던 것들은 제단에 남겨두고 순수함을 수확하고 증류하여 정제합니다. 순수한 것은 불안정하고 독합니다. 빠르게 휘발하고 변형되며, 들이키면 목구멍부터 항문까지 자신의 취약한 곳을 낱낱이 훑고 인식하게 만드는 고통을 줍니다. 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에서 반대급부로 취하게 만들어 오히려 바르게 살도록 마취시킵니다. 효과가 얼마나 지속되고, 언제 금단현상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나. 하지만 술 없이는 부끄러워하는 주정뱅이로 태어난 것을 어쩌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