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생존에 유리할까'
또 다른 천재에 관한 영화를 보고 난 뒤 드는 의문이었다. 재능을 가진 자들의 서사시는 고대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소재다.
물론 나는 천재를 동경하며, 재능을 맹종한다. 때때로 남의 재능을 강탈하는 허황된 상상을 탐닉하며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그 백일몽의 종착지에는 과거에 대한 후회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회라는 것이 형성되기 전엔, 원시시대 때도 재능을 가진 자들은 생존할 수 있었을까? 이 글에서 말하는 원시사회는 계승이라는 것이 이뤄지기 전의 사회를 뜻한다. 원시사회 때는 남들과 다른 형질을 보이거나 특정 행동에 집착하는 모습은 다른 무리나 포식자를 자극했을 것이다.
집단은 십자가의 희생양으로 이 이단아를 매달아 놓았을 수도 있다. 포식자의 제비뽑기에 슬그머니 우선적 부정표를 쥐어주는 집단적 따돌림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육체적 폭력으로 인한 장애나 먹이를 차단하는 행동 등, 도덕이라는 고삐가 없는 집단은 더욱 교활하고 직접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면 천재와 재능의 존재는 멸종했거나, 생존했어도 이를 드러내지 않도록 부정적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재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와 동경은 수 천년 전부터 계승되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생존 이외에도 또 다른 행동 강령인 인정 욕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능을 가진 이는 내가 이 집단에서 사라지는 것은 이 집단 자체의 발전 가능성과 진화적 다양성을 낮출 뿐이며, 최종적으로 집단의 장기적 생존율을 낮출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각인시켰을 것이다.
집단의 진화를 위해선 나를 보호하라는 동물적 압박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압박이 집단에 주는 영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생존율을 낮추면서까지 보호하고 계승한 다양한 재능의 꽃봉오리는 생존의 위험이 표면적으로 낮아진 문명사회가 시작되며 발화한 것이다.
결국 평범한 사람의 수천 년 동안의 자기 희생이 재능을 지켜냈다. 이러한 사회적 편애를 확인한 우리들은 재능 있는 이나 천재들을 보며 비난이나 동경을 하며 최종적으로 동일시를 하며 자기 인정 욕구를 키워나갔다.
재능을 향한 나의 열등감과 방송인을 향한 빠심이, 내 조상의 자기 희생으로 이룩해낸 유산 때문이라는 자기위로 덕분에 오늘도 나는 안심하고 영웅소설을 탐닉한다.
책 추천: “동네 책방 생존 탐구”, 한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