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돈이 없었다. 버스도 없었다.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 일부러 늦게 잡은 여객선은 이미 버스가 모두 끊긴 시간에 남섬에 도착했다. 나는 비교적 계획적인 사람이라고 늘 생각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생각으로 버스가 언제 끊기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곳저곳 물어봤지만 지역을 이동할 수 있는 버스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 돈도 뚝 떨어진 상태로 한국에서 이체를 신청해 놨지만 아직 완료가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택시라도 잡아탈 여유가 없는지라 나는 근처 가장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했다.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내가 캐리어 2개와 백팩, 쇼핑백까지 들고 자동차 친화적인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그때 생각했던 것 같다.
'호주나 여기나 차 없으면 아주 죽으라는 거구나'
겨우 정착할 도시로 도착한 후에 나는 바로 차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체해 놨던 돈도 무사히 들어왔고 이제 예산에 맞는 차만 구매하면 됐다. 너무 급하게 알아본 탓일 테지. 그 늙은 남자와 엮이게 된 것은 나의 뉴질랜드 입국 이후 103번째 실수였다.
영어는 무럭무럭 서툴고 나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영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같은 백팩커스에 살던 뉴질랜드인인 스티브(가명)에게 자동차를 같이 보러 가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그와 함께 본 자동차를 사기로 결정하고 고마운 마음에 밥을 사겠다고 했더니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다면서 한 아시안 식당에 데리고 갔다.
나는 비록 영어는 서툴렀지만 눈치만큼은 한국어만큼 뛰어났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이 왜인지 모르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는 결혼을 했었지만 이혼을 했고 이혼한 전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딸을 자랑하기도 했지만 금세 관심은 동양인 여자에게 넘어갔다.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는데 식당에 도착해 4인용 테이블임에도 내 옆에 앉는 그를 보고는 그 찝찝함이 확신으로 변했다.
앞에 앉으라고 정중하게 말했지만 그는 못 알아듣는 척하며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거의 테이블의 모서리 부분에 바짝 붙어 앉아 그를 경계했다. 그 순간에는 당황스러워서 내가 앞자리로 옮길 생각도 못했다. 메뉴판이 눈에 들어올 리 없는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고개를 들자 웬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울듯 말듯한 오묘한 표정. 그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는데 스티브도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속으로 '뭐야, 뭔데, 왜 와?'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스티브는 손을 뻗어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둘이 아는 사이구나. 하고 아이를 한 번 그리고 그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부부를 한 번 쳐다봤다. 스티브는 나를 보며 '그때 말한 내 딸아이야'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그 아이의 오묘한 표정의 의미를 알아챘다. 그래, 나는 지금 네 아빠의 새로운 아시안 걸프렌드로 보이겠구나. 그래서 그런 표정이었던 거야. 당장이라도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하필 스티브는 4인용 테이블의 내 옆자리에 앉아있다. 아이는 무어라 말하더니 자리로 돌아갔고 그 부부(아마 부인 쪽은 스티브의 전처일 테지)와 아이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고 머릿속은 팽팽 돌았다. 이 미친 늙은이는 왜 내 옆에 앉아서 이런 오해를 하게 만드는 건지. 첫 뉴질랜드 워홀 생활의 단추가 잘못 꿰어지는 것을 넘어 뜯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무슨 맛인지도 알지 못한 채 어색한 식사 시간이 끝났고 나는 혹여 신세라도 질까 싶어 급하게 계산을 마치고 그의 차를 타고 백팩커스로 복귀했다. 백팩커스는 식당과 비교적 가까웠지만 마치 한국과 뉴질랜드처럼 멀게 느껴졌다.
스티브는 그 뒤로도 내게 꾸준히 연락을 해왔고 마주치기만 하면 말을 걸려고 용을 썼지만 나는 그때의 수치스러움이 떠올라 최선을 다해 그를 피해 다녔다. 다행인 것은 그가 몇 주 지나지 않아 집을 구해 이사를 나갔다는 것이다. 그 뒤로 그가 또 다른 한국인 여자분에게 추파를 던지고 다닌다는 것을 멀리에서 소식으로 듣고 나는 그때서야 호탕하게 웃으며 '미친 옐로 피퍼 늙은이'를 그저 에피소드의 한 단락으로 남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