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타히티를 발견하는 일

서로 다른 예술가들이 같은 섬에 도착한 이유

by 김남정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전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 사이에서 하나의 연결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 순간 마음이 슬며시 들뜨곤 한다. 어쩌면 이들이 서로 알지 못한 채 비슷한 질문을 품고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상상은 언제나 묘한 짜릿함을 남긴다.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들고, 읽는 나 자신까지 그 질문 속으로 끌어당긴다.


얼마 전 앙리 마티스의 컷아웃 작품집을 넘기다 '타히티'라는 단어를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눈이 번쩍 뜨였다. 타히티는 내게 이미 익숙한 이름이었다.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 속에서도 중요한 장소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소설은 화가 폴 고갱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쓰인 이야기다. 고갱은 유럽 문명을 떠나 보다 자유로운 삶과 예술을 꿈꾸며 1891년 타히티 섬으로 향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서머싯 몸은 고갱의 삶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타히티를 떠올렸고, 앙리 마티스 역시 고갱의 영향을 받아 색과 빛을 다시 배우고자 그 섬을 찾았다. 폴 고갱은 1891년, 마티스는 1930년, 서머싯 몸은 1961년.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유로, 그러나 같은 섬에 도착했다.


이들이 남긴 것은 각기 달랐다.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소설로, 또 누군가는 사진이나 종이를 오린 형태로 그곳의 흔적을 남겼다.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같은 장소에서 받은 감각과 질문이 각자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그것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서로를 연결하는 선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왜 하필 타히티였을까. 지도를 펼쳐보면 타히티는 유럽을 기준으로 거의 지구 반대편에 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세상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타히티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장소였는지도 모르겠다. 멈출 수 있고, 자기만의 속도로 살 수 있고, 무엇보다 '자유로운 나'를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공간.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나 역시 타히티에 가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순간, 또 하나의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꼭 타히티여야만 할까. 반드시 지구 반대편까지 가야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걸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을,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본다면 어떨까.


나의 타히티는 어쩌면 멀리 있는 섬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곳을 바라보는 태도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바라보고, 당연했던 일상에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나만의 타히티가 아닐까. 서로 다른 예술가들이 같은 섬에서 각자의 섬에서 각자의 작품을 남겼듯, 나 역시 지금 이 자리에서 나만의 흔적을 남기며 살고 싶어진다.


길 위에서 나를 만난다는 건, 어쩌면 멀리 떠나는 일이 아니라 이렇게 마음속에 새로운 섬 하나를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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