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을 읽고 (2026. 2, 6일)
입춘이 지났다는 말을 들었지만, 몸으로는 아직 봄을 느끼지 못하는 시기다. 달력 위의 계절은 바뀌었지만, 바람에는 여전히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다. 입춘은 언제나 그렇다. 체감보다 먼저 와 있는 이름일 뿐인 계절. 그런 시간에 읽게 된 백수린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2025년 2월 출간)은 유난히 제자리를 찾은 책처럼 느껴졌다. 완연한 봄의 낮이 아니라, 겨울의 기척을 조금 남긴 채 조용히 따뜻해지는 봄밤에 어울리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표지와 사진이 주는 첫인상처럼, 이야기들은 대체로 조용하고 담담하다. 겉보기에는 무해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들 각자의 삶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누구의 삶도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작가는 큰 소리 없이 보여준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흔들리고 머뭇거린다. 개인의 미숙함 때문이기도 하고,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시련 가득한 겨울을 통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삶들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이미 그 안에 조용히 스며드는 봄의 기운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이 주는 인상은 바로 그 지점에서 깊어진다.
책 제목 '봄밤의 모든 것' 역시 그러하다. 봄의 낮은 지나치게 밝고 생동하며, 희망적인 이미지가 앞선다. 반면 봄밤은 차분하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조금 남아 있고, 그래서 더 섬세하게 온기를 느끼게 되는 시간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과 정서는 정확히 이 '봄밤'과 닮아 있다. 확신보다는 망설임에 가깝고, 완성보다는 과정에 머문다. 읽는 내내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여러 단편 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빛이 다가올 때'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타인이 느꼈던 방식 그대로 세상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얼마나 헛된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렇다." - 70p
이 단편은 눈이 불편한 큰 이모를 위해 자신의 삶 대부분을 헌신한 언니(큰 이모의 딸)의 삶을, 화자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이야기다. 화자는 어린 시절 언니를 동경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 마주한 언니의 삶은 늘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고, 그 결과 언니는 자신의 기호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때로는 한참 어린 이국의 남성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그 모습은 신선하면서도 안쓰럽다.
이 작품은 잔잔한 흐름 속에서 화자가 언니의 삶을 반추하고, 동시에 자신의 삶과 조심스럽게 대조해 보는 과정을 담는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싶어 하지만, 끝내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다는 자각. 그 깨달음이 이 단편을 오래 남게 만든다.
책을 읽으며 나는 뉴욕이라는 배경이 주는 넓고 푸른 감각 또한 인상 깊었다. 언니의 삶이 가진 공허함과 가능성이 그 공간 안에서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너무 이른 나이에 철이 들어버린, 이른바 '애어른' 같은 언니의 삶 앞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연민과 존중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가족이나 직장으로 인해 잠시 자신을 내려놓아야 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누구나 살면서 '타인의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순간'을 겪는다. 화자가 언니의 삶을 반추하며 느끼는 감정과 내 경험이 겹치면서,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결국 우리는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만 세상을 경험한다는 깨달음을 함께 느꼈다.
언니의 애어른 같은 모습과 어린 나이에 책임을 떠안아야 했던 삶은 안쓰럽지만, 동시에 대견하기도 했다. 뉴욕이라는 배경이 주는 넓고 파란 느낌은, 화자가 언니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느끼는 감정에 신선한 공간감을 더한다.
또 다른 인상적인 구절은 소설집 후반부 내용이다.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떠올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산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랑을 주는 법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 사람뿐일지도 모른다고." - 140p
이 문장은 사랑과 성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상처 없는 삶이 아니라, 상처를 통과하며 사랑에 대해 오래 고민해 본 사람만이 타인에게 마음을 건넬 수 있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종종 완벽해진 뒤에야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이 문장은 오히려 그 반대의 진실을 조용히 건넨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오래된 인연에서 생긴 작은 오해를 풀고 서로 마음을 열었던 경험이 떠올랐다. 작은 갈등이 있었지만, 시간을 두고 서로의 상처와 고민을 들여다보며 오히려 더 깊은 신뢰가 생겼다. 책 속 아버지가 딸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사랑은 상처 없는 완벽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삶의 경험 속에서 길러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우리 모두가 겪는 사소한 오해, 작은 다툼, 그리고 화해의 순간이 바로 이 메시지를 증명한다.
백수린의 소설은 담백하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사건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대신 일상 속 사소한 순간과 마음의 결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이 조용한 힘은 지금의 삶과도 잘 닿아 있다. 바쁘고 복잡한 일상 속에서, 타인의 삶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봄밤의 모든 것>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가만히 존중한다. 그래서 읽고 나면 무언가를 얻었다기보다, 마음 한편이 정돈된 느낌이 남는다.
입춘이 지났다고 해서 곧바로 봄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계절이 그렇듯, 사람의 삶도 늘 이름이 먼저 오고 체감은 뒤따른다. 백수린의 <봄밤의 모든 것> 속 인물들 역시 아직 완연한 봄에 서 있지는 않다. 다만 각자의 겨울을 통과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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