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의 이름을 놓고 나의 이름을 찾다

이름을 놓는 일은 사랑을 놓는 일이 아니다

by 김남정

"어머니는 내 운명의 뿌리였다. 나는 어머니의 슬픔과 기쁨에서 뻗어 나온 가지였다."

박완서, <그 많은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오랫동안 '엄마의 딸'로 불렸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불러도, 그 안엔 언제나 엄마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엄마의 온기, 엄마의 가르침, 엄마의 언어, 엄마의 기대, 엄마의 방식으로 살아온 시간. 이 모든 엄마의 숨결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고 나는 그 안에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나의 이름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 이름이 온전히 나를 지칭하기엔 나 스스로가 조심스러웠다.


엄마는 강했다. 그래서 나는 약한 나를 부끄러워했다. 엄마는 늘 절약을 미덕이라 가르쳤다. 그 가르침은 지금까지 검소한 삶을 실천하는 나로 이끌었다. 가끔 낭비를 꿈꾼 적도 있지만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엄마는 인내를 삶의 무기로 삼았다. '참는다는 것, 견딘다는 것' 그때 나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마다 내 이름을 지웠다.


박완서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엄마를 닮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엄마였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오래 숨겨온 내 마음을 들킨듯했다. 닮고 싶지 않다는 건 배반이 아니라, 나로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엄마의 길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나는 더 나다운 길을 걷고 싶어졌다.


"나는 어머니의 딸로 살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왔다. 이름을 놓는다는 것은 곧 나를 되찾는 일이다." <박완서>


나는 오랫동안 엄마의 이름 뒤에 있었다. 학교에서, 결혼식장에서...."ㅇㅇ엄마"라는 호칭이 나를 대신했다. 그 이름이 싫지 않았다. 따뜻했고,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증거였으니까.


언젠가부터 내가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했고,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찾아 듣는 중이다. 박완서 에세이에서 읽은 구절이 마음을 울렸다.


"여자에게도 이름이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이름은 밀려나고, 엄마라는 이름이 모든 것을 대신한다."


지금은 나도 아이들의 엄마이고, 아이들이 사회인이 된 나. 이젠 아이들이 독립과 결혼으로 집은 조용하다. 식탁에 둘러앉아 웃고 떠들던 그들이 이제는 각자의 세상에서 이름을 지닌 채 살아간다. 그 모습을 보면 뿌듯하면서도, 나는 어떤 이름으로 살아야 할까 묻는다.




얼마 전 남편과 영화 <논나(Nonna)>를 보았다. 시칠리아 햇살 아래, 논나(할머니)는 말한다.


"내 인생은 늘 누군가의 엄마였어.

이제는 그냥 나로 살고 싶어."


영화 속 주인공은 70대가 되어서도 누군가의 엄마, 할머니로 불렸지만, 스스로의 이름으로 살아가려는 용기를 선택했다.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내게도 이젠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나'로 사는 시간.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딸이고, 엄마이며, 동시에 나 자신이다. 이름을 놓는다는 건 사랑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나를 회복하는 일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엄마를 놓는다는 건, 엄마를 버리는 게 아니다."


나는 조금씩 내 이름을 되찾는 중이다. 엄마가 물려준 강인함에 내 색을 더해가는 중이다.

엄마가 지킨 절약 속에 나만의 작은 사치를 넣는다. 엄마의 방식에 갇히지 않고, 나만의 방식을 고른다.


엄마를 놓는다는 건 엄마를 버리는 게 아니다. 엄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내 그림자를 만드는 일이다. 그 길은 엄마가 내게 준 사랑일지도 모른다.

박완서의 말처럼,


"나는 나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길에서 자주 엄마를 만났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렇다. 엄마를 완전히 놓을 순 없다. 나는 엄마의 뿌리에서 뻗은 가지니까. 하지만 이제는 내 가지 끝에, 나만의 꽃을 피우고 싶다. 누구의 딸,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내 이름의 주인으로.

keyword
수, 금 연재
이전 08화작지만 단단한 내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