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알아가는 일은 자신을 이해하는 일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가득 차오를 때가 있다.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상처받고, 누군가의 다정함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아, 내 안의 임계치에 다다랐구나."
'임계치(臨界値)'란 도대체 무엇일까. 물리학에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최소의 한계를 말하지만, 삶에서의 임계치는 어쩌면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감정의 문턱"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임계치는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울림으로.
지난 1년은 그런 시간이었다. 작년 가을 런던과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 후 남편의 아킬레스 통증은 조금씩 더해 갔다. 처음엔 단순한 근육통이라며 웃어넘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병원을 옮겨 다니며 주사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았지만, 남편의 얼굴에는 점점 지친 기색이 드리워졌다. 걸을 때마다 표정이 굳어지고, 계단이나 오르막에서는 얼굴에 그늘이 지고 숨이 깊어졌다. 그 무력감과 불안은, 옆에서 지켜보는 나에게도 전해졌다. 나는 곁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말로는 "괜찮다"라고 했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임계치에 닿아 있었다.
"이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의사의 말은 짧았지만, 그 한 문장이 남편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기도 했고 반대로 후련하기도 한 양가감정을 남겼다. 어떤 의사도 자신의 진료를 환자에게 명료히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술 선택은 오로지 환자의 몫이라는 애매한 말만 남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남편의 어깨를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몸에도, 마음에도 임계치가 있음을. 그 한계를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결국 어제, 그는 수술대에 올랐다. 나는 병원 대기실에서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해 동안 그가 견뎌온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잃지 않으려던 모습들이 스쳐갔다. 임계치는 단지 '한계'가 아니라, 삶이 방향을 바꾸라고 건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남편에게 그 신호는 '멈춤'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기다림'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끝까지 버텨보려 한다. 회복될 거라 믿고, 더 참고, 더 견디며.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버팀의 끝에서야 비로소 멈춰야 할 이유를 안다.
우리는 저마다의 임계치를 안고 산다. 그것은 피로이거나, 관계이거나, 혹은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어느 날은 작은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지고, 어느 날은 고요한 새벽빛 하나에 다시 살아난다.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질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나의 임계치는 어디쯤 일까?"
"성숙이란, 무너질 때를 알고 잠시 멈출 줄 아는 용기다." 알랭드 보통의 문장이 마음에 깊이 와닿는다.
임계치를 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사람의 마음도 근육처럼, 한계까지 밀어붙이면 반드시 멈춰야 한다는 것. 그 멈춤이 회복의 시작이란 것을.
퇴원 후 남편은 긴 재활시간에 들어간다. 조금씩 천천히 걸음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비록 속도는 느릴지라도, 그의 걸음에는 '다시 걷는 기쁨'이 묻어날 것이다. 나 역시 피로와 감정의 진폭 속에서 나만의 임계치를 알아가고 있다.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이해하는 가장 솔직한 방식이다. '임계치란 결국, 삶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 임을 깨달았다.
살다 보면 우리는 무언가를 채우려 애쓴다. 성취, 사랑, 인정, 그러나 진짜 평온은 비워낼 때 찾아온다. 남편의 깁스를 푸는 날, 나는 그가 내딛는 걸음의 단단함을 생각한다. "그래, 우리 모두의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지. 넘치기 전에 멈추는 용기." 지금 나의 임계치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멈출 수 있는 용기'다. 불완전한 나를 인정하고, 멈춤 속에서도 나아가는 힘을 배우는 일. 삶의 깊이는 그 속도를 늧출 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상처가 남긴 자리에 빛이 들어온다." <레너드 코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