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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는다는 것의 의미

멈춤 속에서 들리는 나의 목소리

by 김남정

"길이란 걷는 자의 것이지 서두르는 자의 것이 아니다."

파울로 코엘로 <브리다> 중에서


요즘 나는 예전과 다르게 느리게 걷는 걸 좋아한다. 그건 단순히 발걸음을 늦춘다는 뜻이 아니라, 내 마음의 속도를 낮추는 일이다. 한때는 일을 마치면 곧장 다음 일로 달려가곤 했다. 해야 할 일은 늘 넘쳐났고, 그 안에서 나는 자주 '멈춤'이란 단어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동네 뒷산을 오르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어쩌면 내 인생의 속도 그대로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일이 끝나면 가벼운 산책을 습관처럼 이어왔다. 처음엔 20분만 걸어도 힘들었다. 하루하루 조금씩 걸음수를 더하며 풍경을 보다 보니, 지금은 한 시간을 걸어도 마냥 좋다. 늦가을의 공기 속엔 낙엽 냄새가 스며 있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하다. 그 속에서 들리는 건 세상의 소음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목소리다.


영화 <당신의 얼굴 앞에서>의 한 장면이 떠 오른다. 조용히 커피를 마시던 중년 여성이 이런 말을 한다.

"살아온 세월보다 남은 세월이 적다는 걸 알면, 하루가 더 다정해져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느리게 걷는다는 건 하루를 더 다정히 맞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타운하우스 길옆에는 해마다 느리게 성장하고 있는 벚꽃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햇빛이 잎 사이로 스며드는 그 순간, 세상은 멈춰 선 듯 고요하고 반짝인다. 도서관의 공기, 묵직한 정적, 책장 넘기는 소리. 그 모든 게 내게는 '사유의 배경음'이다.


매일 저녁 식사 후 남편과 동네 뒷길 산책을 한다. 나보다 빨리 걷는 그에게 천천히 걷자고 했다.

"같이 가자, 천천히."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오래도록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한 아이가 던진 낙엽이 바람에 날렸다. 그 순간, 저녁공기는 더없이 시원했고 달빛은 밝았다.


책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저자는 말했다.

"속도를 늦추는 일은 단순히 덜 사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사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빠름의 시대에 '느림'을 선택한다는 건, 일종의 용기라고. 누구보다 앞서려는 세상에서 뒤처져도 괜찮다고 믿는 힘처럼 느껴진다. 이젠 빠른 시간에 기대지 않고, 나만의 깊은 시간에 기대어 세상을 보고 싶다.


요즘 나의 느린 시간표에는 작은 일들이 채워진다. 필라테스 수업 전 따뜻한 물 한잔, 글을 쓰기 전 창밖의 하늘 한 번 보기, 도서관 가는 길의 검은 고양이 한 마리에게도 눈길을 주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하루를 부드럽게 감싼다.


한 철학자는 말했다.

"걷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되찾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그 말처럼 걷다 보면, 잊고 있던 마음의 결이 하나둘 살아난다. 젊은 열정에 맞추느라 잊었던 나의 호흡, 시간에 쫓기느라 놓친 풍경, 그리고 이제 조용히 피어나는 사유의 향기.


삶의 속도를 줄인다는 건,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일이다. 빠름 속에서 잃었던 온기를 되찾고, 느림 속에서 마음을 다독이는 일.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는다. 늘 가던 산책길과 동네 뒷산이지만, 느린 걸음으로 마주한 풍경 속에서 나는 내가 '나' 임을 느낀다.


"길 위에서 삶은 천천히 나를 닮아간다." <무라카미 하루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너무 빠르게 걸어오지 않았나요. 한 번쯤, 걸음을 늦춰보세요. 바람의 결, 나뭇잎의 속삭임, 발끝의 그림자까지. 그 모든 것 안에 '지금, 여기에' 머무는 당신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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