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 개념은 보완 관계로 읽어야 합니다. 대립 관계로 읽는 것은 결정론적 사고입니다. 좌우로 대비하고 있는 그림을 세우면 상부와 토대라는 마르크스 모델이 됩니다.
엥겔스는 토대가 상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규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맞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원인이기만 하고 결과가 아닌 것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결과이기만 하고 원인이 아닌 것 역시 없습니다. 알튀세르의 상호결정론(overdetermination)을 소개했습니다. 인(因)→과(果)이면서 동시에 과(果)→인(因)이기도 합니다.
세계는 분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절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인식틀입니다. 결정론과 환원론은 단순 무식한 틀입니다.
모순과 대리의 통일과 조화가 세계 운동의 원리입니다. 조화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논어>에서는 화(和)라고 합니다. 맹자는 확충(擴充)이라고 합니다. 순자는 려(廬)라고 합니다. 려란 배려한다는 뜻입니다. 헤겔의 도식에서는 지양(止揚)이라고 합니다. 정(正)과 반(反)이 합(合)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에서는 대립물의 통일입니다. 양명학에서는 양지(良知)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다른 개념을 내놓고 있지만 근본은 같습니다.
자신의 존재론적 한계를 자각하고 스스로를 바꾸어 가기를 결심하는 변화가 변화의 시작입니다. 탈주이고 새로운 ‘관계의 조직’입니다.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본질에 있어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being)입니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입니다. 그리고 생성은 화화(和化)의 경로를 따라 탈주하는 것입니다. 탈주는 끊임없는 해체와 새로운 조직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계’를 일반적 의미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과연 존재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사물들이 맺고 있는 얼개 자체에 존재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어떠한 사물이든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를 관계라는 객관적 얼개 속으로 해소시키는 것 역시 관념론이 됩니다.
‘사이존재’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 등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사이[間]’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이존재는 존재론을 뛰어넘으려는 구상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이게도 ‘사이’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존재가 됩니다. 관계의 경우도 이러한 위험이 없지 않습니다. 관계 그 자체에 존재성을 부여하기 쉽습니다. ‘관계의 조직’은 바로 관계의 의미를 보다 심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존재는 관계가 조직됨으로써 생성됩니다. 그리고 생성은 생성 자체의 본질에 따라 변화와 탈주를 시작합니다. 흐르는 강물 속에서 명멸하는 한 방울 물입니다. 부단히 조직되고 끊임없이 해체되는 변화와 탈주의 연속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 불변의 물질성 자체가 사라지고 존재는 확률과 가능성이 됩니다. 동양적 사유에서 자연은 생기(生氣)의 장입니다. 우리가 사용해 온 관계의 정확한 의미는 관계의 조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변의 존재가 아니며 관계망 그 자체와도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의 조직입니다.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영위되는 인격이기도 합니다.
양심을 중앙에 놓는 것은 양심이 관계를 조직하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세계 인식을 온당한 것으로 만들고, 우리 자신을 세계 속에 위치 규정하는 것이 바로 관계의 조직이며 그 조직의 현장이 바로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만나는 것이고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 양심이라고 하는 까닭이 이 때문임은 물론입니다.
이룬 것이 많을 수 없습니다. 꼬리를 적신 어린 여우들입니다. 그 실패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자위합니다. 한비자의 졸성(拙誠)이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졸렬하지만 성실한 삶, 그것은 언젠가는 피는 꽃입니다.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가 <레미제라블>에서 한 말입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훨씬 훗날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물며 열매는 더 먼 미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씨앗과 꽃과 열매의 인연 속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이지요. 고전의 아득한 미래가 바로 지금의 우리들인지도 모릅니다. 그 미래 역시 아직은 꽃이 아니라고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고전은 태산이라고 합니다. 호미 한 자루로 그 앞에서 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읽으면서 가슴이 쿵쿵 벅차 타이핑 필사가 박진감이 있었다.
니체가 떠올랐고 관념의 사슬이 뽀개지는 느낌이 들어 기뻤다.
신영복 선생님이 사실 누군지 몰랐다. 이 분의 책을 읽으며 이 분을 알아가는 재미가 뭉클하다.
아마존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호미로 태산을 찍어 넘어서는 위버멘쉬(오버맨)을 봤다고 말하면 너무 허풍인가.
이 분의 책을 읽어보면 아름다운 문장 속에서 그 분의 삶의 언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거칠고 외로운 대한민국의 다정한 스승임이 분명하다.
우왕... 너무 조아..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