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끝날 무렵까지도 나는 처음 해본 것들이 많았다. 방구석 생활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던 나의 그 시절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가 드물게 나타날 때마다 나는 눈이 똥그래져 “나 이거 처음 해봐”라는 말을 불쑥 내뱉곤 했었다. 다행히 신기함과 호기심은 수치심보다 컸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소소한 걸 뒤늦게 처음해 본 까닭은 돈 때문이었다.
첫 경험이 매번 늦었던 것은 돈이 나를 겁줬기 때문이다. 박봉의 월급으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아버지는 내게 학교만 겨우 다니게 허락해줬다. 나는 갖고 싶었던 물건을 쉽게 얻을 수 없는 처지에 적응했다. 빚 안지기가 최고의 경제 관념이라 생각하신 아버지는 남들이 집을 늘릴며 이사를 다녀도 끄덕하지 않았다. 옥빛 찬란한 그 작은 집에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불행은 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집에서 쪼그라든 채 성장했다.
어제 점심 나는 9500원 짜리 초밥 런치세트을 먹었다. 혼밥하러 온 사람들이 몇 있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초밥은 날생선으로 만든 음식이라 신선하지 않으면 탈이 나는 음식이다. 그래서 초밥을 먹을 때는 텃밭에서 막 뜯어온 채소처럼 신선한 고기를 먹는 느낌이라 좋다.
8개의 초밥 중 유부, 계란, 문어, 조개를 먼저 먹고, 생선초밥은 좀 나중에 만끽하려 남겨두었다. 눈물이 울컥 나왔다. 초밥 정식을 오늘 처음 먹는 날도 아니었다. 초밥이 늘 입맛을 당길 만큼 엄청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고추냉이를 얼른 찍어서 입에 가져다 댔다. 나는 이 엉뚱한 불상사를 고추냉이 탓을 하며 막고 싶었다.
나도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처럼.
나는 이런거 먹으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취집처럼 결혼을 했고 애 낳고 애 보고,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엄마들이 자신의 행복권을 주장하고 성토할 때에도 나는 그 틈에 끼지 못했다. 나는 커피 한잔도, 브런치 모임도 누리지 않았다. 그네들의 여가를 낭비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나와 다른 현실을 사는 팔자 좋은 그녀들이라고 덮어두고 살았다.
미련하게 모았던 몫돈이 흩어지는 경험을 몇 차례 한 후 오히려 나는 돈에 매이지 않고 돈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이렇게 입고, 이렇게 먹으라고 가르쳐 주신 적이 없었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값 떨어지기 전에 시집가라.“ 나는 아버지 노후를 위해 치워 버려야 할 존재였다. 딸만 둘 낳아 자식농사를 망친 아버지는 첫 아이를 출산한 나에게 ’만전(萬田)‘이라는 이름을 들이밀었다. 외손자가 빨리 커서 만석꾼의 꿈을 이루라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나는 임부복을 8년을 입었다. 특별히 집 밖 외출이 없으니깐 나는 그렇게 입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식성에 맞추느랴 내 식사는 존중받지 못했었다. 그깟 전기요금, 도시가스 요금 얼마나 나온다고 더위와 추위를 전전긍긍 견디며 계절을 보냈다. 남편이 없는 형편에 가족여행을 가자고 하면 대꾸를 안했다. 나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 야박하게 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 처음 살아보는 인생인데, 그 처음을 늘 나중으로 미루면서 내 행복도 유예했다. 나는 진실로 행복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행복하면 안되는 줄 알았다. 나는 자격미달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생각하는 자유는 돈과 시간으로부터 자유였다. 돈으로 시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돈을 쫓아 사업체를 운영했다.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늘 불안에 떨었다. 술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부부관계는 신뢰를 잃었고, 사업체는 망가지고 그는 실패의 댓가를 크게 치뤘다. 그는 버텼고 나는 그가 그이기에 괜찮은 줄 알았다.
내 초밥값은 남편이 남겨준 카드로 치뤘다. 그는 집을 나가면서 불안한 가계 경제를 내게 떠넘기지 않았다. 최소한의 양심인지, 최소한의 책임인지는 모르겠다.
남겨둔 생선초밥을 집어 들었을 때 그가 어디선가 우리집 생계를 위해 오늘 하루도 버티고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힘겹게 자기 울타리를 지키느랴 늘 불안했을 그에게 수고했단 말보다 생색 내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때론 퍼부었던 나의 몰이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를 식충, 버러지라고 했던 그 폭언을 나의 정체라 믿고 살았다. 경제적 생산 활동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육아는 잉여인간이 할 수 있는 죄값이었다. 내 스스로 살림을 살리는 행위로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았고, 자살은 언젠가 내게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올 것만 같았다. 병신같은 삶이었다.
나의 존엄이 초밥 한 접시로 지켜지고 있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오늘 초밥 잘 먹었어, 고마워‘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화하지 않았다.
섣부른 반성과 화해로 나와 그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