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에 언제 가나.
8월 3일 레바논.
오늘은 서부여단의 임무교대 행사가 있는 날이다.
서부여단장의 직위는 이탈리아 장군이 맡아서 수행하며 여단장님을 비롯하여 주요 참모들 또한 이탈리아 군이 맡아서 한다. 서부여단장님을 비롯하여 주요 참모들이 레바논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이탈리아로 복귀 전 교대식을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특별하게 저녁에 진행된다고 하여 퇴근 후 다시 출근을 해야했다.
출근하여 통역 지원 준비를 하고, 퇴근하기 전 '타이탄의 도구들'이라는 책을 한번 훑어보았다.
자기계발 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 '홍정욱의 50'이라는 책에서 추천하는 책 중 하나였고, 호기심에 한번 읽어보았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 가볍게 훑어보자, 냉수 샤워의 장점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나는 온수 샤워 예찬론자이다. 누군가 취미가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온수 샤워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무리 의학적으로 냉수 샤워가 좋다고 하여도 하루의 고단함을 뜨끈하고 녹이고 피곤에 지친 눈두덩이에 뜨거운 물로 부어주면 오늘 하루가 보상 받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서부여단장 교대식이 있는 날이었고, 하루를 보상하는 샤워가 아니라 다음 일을 준비하기 위한, 정신상태를 준비하기 위한 샤워이기에 달라야 했다.
그동안은 정말이지 찬물을 몸에 붓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의외로 괜찮았다.
처음부터 냉수로 샤워를 하자니 거부감이 있었다. 다만 처음에는 미지근한 물로 시작해서 익숙해질 즈음 낮추고 또 낮추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다들 냉수샤워의 장점에 대해서는 예찬하면서 왜 이런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나. 아니면 너무 기초적인 것이라서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나.
샤워를 마치고 다시 전투복을 입고 방탄복과 방탄모를 챙겨 주둔지를 떠났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연합훈련을 하러 나쿠라 훈련장으로 가거나, 서부여단으로 가는 경우는 모두 오전이었다. 저녁시간에는 주둔지 밖을 나가본 경험이 없었다.
도시는 낮의 얼굴과 밤에 보여주는 얼굴이 다르다고 하였던가. 묘한 흥분이 마음 속에 돌았다.
주둔지를 조금 벗어나서 시내로 들어가자 나의 생각이 맞았다. 도시의 초저녁의 모습은 낮의 모습과 굉장히 달랐다.
나라 전체가 기름난을 겪고 있고, 상점들도 문을 대부분 열지 않고 있어서 흔히들 생각하는, 도시의 불빛으로 가득한 야경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다만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해는 한결 힘을 뺀, 예의있는 모습으로 어둠을 달래주고 있었다.
우선 해가 내리쬐는 낮과 달리 해가 없으니 사람들도 더욱 북적이고 활기가 돌았다. 일부 내 또래의 여자들도 보였다.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들을 그렇게 많이 본 건 처음이었다. 달라붙는 빨간색 티셔츠에 대님, 스니커즈에 입술을 빨갛게 칠한, 이국적인 젊은 여성과 또 그 주위의 무리들을 보면서 레바논이 세계적으로 미인이 많은 곳이라 풍문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했다.
종교의 문제를 레바논의 경우 크게 강요하지 않는다고, 복장도 크게 통제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간 나는 히잡을 입은 아주머니 밖에 본 기억이 없다. 이른 아침에 나올때마다 보았던 검은색 히잡을 입은 아주머니들은 이른 아침에 다니기 떄문이고, 비교적 자유롭게 서양식으로 옷을 입고 다니는 내 또래는 이 시간대에 다니기 때문에 그동안 보지 못했을 수 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을에서 10분정도 운전하면서 나오고 다시 바나나 밭을 지나가고 가로등도 없는, (있었는데 안 켜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때는 포장도로였을, 관리가 안되어 울퉁불퉁 파여있는 2차선 도로를 30분 간 달려 서부여단으로 도착하였다.
도착한 서부여단은 큰 행사를 앞두고 행사를 앞둔 부대에서 느낄수 있는 설레임을 풍기고 있었다.
모두들 마지막 행사이고, 이 행사만 잘 마무리하면 그리던 집으로 돌아가니 오죽하겠는가.
도착하자 각국의 지휘관들, 각 시의 시장단, 티르의 연합시장 등이 모여있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시장단들을 직접 볼 기회는 없었지만, 현지에서 많이 사용하는 어플리케이션 Whatsapp(우리로 치면 카카오톡)을 사용하여 영상통화를 통해 이전에 인사를 나누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반갑게 인사를 누었다.
이전 훈련부터 지휘관들은 많이 봐온터라, 이제는 각국의 지휘관들과 또 그들과 항상 함께 다니는 나 같은 초급장교들을 만나니, 이제 거의 고등학교 동창들을 보는 것처럼 반가웠다.
곧 임무를 종료하고 복귀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탈리아 대대장이 먼저 우리를 발견했다. 항상 유머러스하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성격답게 멀리서도 우리를 알아봐주고 큰 소리를 내며 반겨주었다.
그 옆에는 중국에서 특수전 교관 훈련까지 받은, 쫙 달라붙는 전투복을 선호하는, 큰 키의 가나 대대의 대대장 서 있었다. 흔히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아프리카의 억양과 정확히 일치하게 중저음으로 인사를 웃으며 건네왔다.
늘 친근하고 한국에 대하여 특별한 호감을 보이시는 말레이시아 지휘관님도 반가웠다.
“이로써 서부여단의 어벤져스들이 모였군요!” 곧 떠날 이탈리아 대대장이 농담을 건넸다.
“곧 이임을 앞두고 기분이 어떤가요? 신나나요 아쉽나요?” 가나 대대장이 웃으며 물었다.
“곧 떠난다는 생각에 신나고, 오늘 떠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쉽네요.” 이탈리아 대대장의 위트있는 답변이었다.
모두들 웃었다.
이탈리아 서부여단 의전실장이 분주히 움직이며 행사를 준비하였다. 넓은 서부여단의 광장에 행사 병력들과 기수단들이 입장하였다. 유엔기와 레바논 기 이탈리아 기가 중앙에 서고 그 뒤로 예하 대대의 국기들이 입장하였다. 반가운 태극기도 보여서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행사 병력의 지휘는 아일랜드 출신의 부여단장 대령이 실시하였다. 우렁찬 목소리와 강한 악센트가 광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었다. 크지 않은 키이지만, 소대장과 중대장을 아일랜드 특공연대에서 복무하였을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다부지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니필 사령관 이탈리아 중장이 먼저 인사말을 실시하고, 이어서 서부여단장 이탈리아 준장이 이임사를 실시하였다. 당연히 신임 여단장의 취임사도 실시할 줄 알았지만, 실시하지 않아서 다소 놀랐다.
한국의 행사도 의미가 있지만, 한 낮에 실시하여 점차 길어지는 연사의 연설이 고역으로 다가올 떄가 종종 있었다. 육사 생도 시절 매주 금요일 연병장에 서서 햇살이 내리꽂던, 강한 바람이 불어치던 2시간 가량 서 있던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4년간 매주 금요일 연사의 좋은 훈시를 들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저녁에 의자에 앉아서 지중해는 바람을 느끼며 여유롭게 들으니 비로소 연사의 말이 귀에 들렸다. 아닌가. 시간과 장소에 상관 없이 내가 행사 병력이 아니어서 그런가라는 생각도 짧게 들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자유롭게 이임하는 서부여단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고려의 자존심. 한국 담배인삼공사가 보증하는 홍삼과 함께 드렸다.
홍삼을 보더니 물에 타먹으려는 눈치였던데 그 귀한 것을 잘못 드실까 걱정되었다. 이전의 라면 조리법과 같이 길게 한번 설명하려다가 뒤에 기다리는 순서가 많아 포기했다.
서부여단장 이탈리아 준장의 권한 이양. 그 예하에서 복무하는 모든 대대의 국기. 각 대대 지휘관이 있는 곳에서 유엔가, 레바논 가, 이탈리아 국가 순으로 연주, 세계 각국의 군인들이 경례했다.
언젠가 애국가도 퍼지길, 세계 각국의 군인이 경례할 기회가 있길 기대했다.
돌아오는 길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해가 마지막 기운을 다하고 있었다. 높은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길 지중해에 비치는 붉은 빛. 그 끝이 하늘인지 바다인지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