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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준 Oct 19. 2021

계급, 사과 그리고 권위

5월 18(화)


 소설가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된다.”를 하루만에 다 읽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첫문장은 일단 저지르고 나중에 수정하면 된다. 기억이 나는 소재는 그때 그때 메모해두라.는 등의 이야기였다.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영화에서 집중하는 주인공이 방 벽면을 포스트 잇으로 가득 채운 것처럼 포스트잇에 내가 쓰고 싶은 거리들과 나누고 싶은 것들을 적어서 방 벽면에 붙여두었다.

 

당직근무에 투입하여 투입 후 확인해야 할 사항들을 하나씩 체크하였다. 이전에 교육 받은 데로 했고, 크게 어려운 점도 없었다. 저녁도 먼저 먹고 오라는 당직사령님의 말에 발걸음도 가볍게 식당으로 향했다.

지휘통제실로 나오자 마자 본부중대장님을 만났다.


"오늘 근무야?"

중대장님께서 먼저 물어보셨다.


"예, 맞습니다. 사령이 아니라 부관이라서 크게 어려운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웃으며 답변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럼 혹시 지금 잠깐 시간 되니? 단 둘이 좀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중대장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평상시 농담을 잘 하지 않고, 진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본부중대장님이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하자 갑자기 굉장히 떨렸다. 잠시 조용히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다가, 가까이에 있는 흡연장으로 함께 갈 것을 중대장님께 제안했다.


흡연장까지의 거리는 약 20미터 정도의 짧았지만,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도 속이 떨려 길게만 느껴졌다. 뭔 이야기를 하시려고 저리도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고, 남들 다 퇴근한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오셔서 장난도 안 치시는 분이 단 둘이 조용히 하자고 하실까.


“통역장교, 혹시 영어 동아리 관련해서 통역병들에게 들은 것이 있니?”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레바논으로 오기 전 인천 국제평화 지원단에서 파병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는 파병 기간을 좀 더 슬기롭게 보내고자 하는 취지에서 동아리를 만들었다. 아무래도 파병지의 특성상 부대의 울타리 밖으로 쉽게 나갈 수 없고, 퇴근 후에는 자유 시간이 많아서 통상 파병부대는 동아리를 만들어 운영한다. 헬스, 테니스, 심지어 보드게임 동아리까지 있는데 대대로 통역장교와 통역병들은 강제 아닌 강제로 영어 동아리를 운영해왔다.


모두들 파병에 와서, 아무래도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도 많고 자기 계발할 시간도 넘쳐 흐르니, 공인 영어 성적을 남겨가려는 의지들을 강력하게 피력하곤 하였고, 영어 동아리는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동아리 중 하나로 거듭났다.

 

그리고 무려 67명이 영어 동아리를 지원했다. 하지만 혼자서 67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다 소화할 수 없었다. 우선 67명을 한 번에 수용하여 동아리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도 없거니와, 동아리원의 영어 실력도 천차만별이라 수업도 여러 개를 운영해야 하는 소요가 있었다.


고민하던 와중 수업을 나누고, 통역병들을 각각 수업의 교관으로 임명하여 67명의 인원들을 나누어서 교육하면 된다는 묘수가 생각났다.


대대로 통역장교와 통역병이 함께 영어 동아리를 맡아온 점, 파병 초기라 의욕이 왕성했던 점 등등 여러 고려 요소가 모여 통역병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이 과정에서 통역병들의 의견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꼭 해야 하는 것이냐고 질문을 한 통역병에게는 군인정신, 임무 등등을 운운하며 일주일에 한번만 고생하자고말하며 이 사안에 대해서는 귀를 닫았다.


"난 솔직히 통역병들 입장이 이해가 가. 본인들도 파병생활 하면서 스트레스 풀고 싶고, 동아리에 참여하고 싶겠지. 동아리 시간에 네가 반 강제적으로 영어 동아리 강사로 편성하면 통역병들은 당연히 다른 활동은 못하잖니. 그리고 이전 진들에서 통역장교와 통역병들이 동아리 강사로 했다고 해도, 그건 그 친구들이 자원한 거고, 그게 원래 통역병들의 임무가 아니잖아."


이제 중대장님이 말씀하시니 귀가 뚫리며, 심장이 덜컹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행동을 한 것인가 생각했다. 간과하고 있었지만, 누군가 문제를 삼으려면 충분히 문제가 될수 있는, 명백한 나의 잘못이었다.


"너랑 워낙 통역병들이 친하니까, 통역병들이 너한테 미안해서 잘 말을 못하겠나봐. 나한테도 지나가는 말로 하더라고."


태워져 들어가는 중대장님의 담배를 보며 나는 비흡연자였지만, 담배 생각이 간절하였다.


하긴, 내가 67명을 두고 고민한 모습을 옆에서 보고 안하겠다고 의사를 표현하기에는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어서 더 표현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간 사준 삼겹살과 치킨, 짜장면 등 족히 다섯번은 내가 쏜 회식이 솔직히 생각났지만, 오죽 하기 싫고, 또 나에게는 이야기 하지 못하였으니 중대장님께 이야기 했을까. 정상적인 지휘계통을 통해 고충 사항을 보고해 준 것만 해도 통역병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중대장님 애들이랑 다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일단 저녁을 먹고 다시 당직 근무에 투입하였다. 근무에 투입해보니 마침 통역병 한 명도 당직근무였다. 밤 12시까지만 당직근무를 서고, 이후에는 또 다른 통역병과 근무 교대를 하여 내일 아침까지 근무를 선다고 한다.


 현재 시각은 오후 6시, 먼저 퇴근하는 통역병의 퇴근 시간은 밤 12시. 퇴근할 때 잠깐 불러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면, 아직 6시간 정도 어떠한 태도를 취할 지 고민할 시간은 있었다. 또 다른 통역병은 아침에 같이 퇴근할 때 잠깐 불러서 이야기하면 된다.


우선 에이포 용지 하나에 연필로 내 생각들과, 해결 방법들을 적어 내려갔다.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적어 내려가면서 스스로에게 생각하는 시간을 더 주었다.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어떠한 내용으로 어떻게 대화를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흔히 말하는 자존심, 권위를 세우면서 어물쩍하게 지나가는 방법이 있고, 두번째로는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방법이 있다.

군대에서는 특히나 상명하복의 원칙(상관이 명령하고, 하급자가 복종하는 원칙)이 대단히 중시되고 상급자의 권위가 계급이라는 가시적인 표현으로 비추어지기에 솔직히 더욱 고민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에이포 용지에 첫 단어를 적었다. '계급'.

계급이라는 단어를 적자, 소위 시절, 병사들을 상대로 주간 정신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이 생각났다.


대한민국의 방공식별 구역을 넘은 중국과 러시아의 비행기가 있었고 이에 대응한 우리 공군의 조치가 있었다.

해당 내용을 가지고 교육을 실시했는데, 성공적으로 조치하여 인터뷰를 하는 조종사를 보고 과연 용사들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좀 더 용사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소개해야겠다 고민하고 나만의 교안을 만들었다. 다른 중대가 모두 조종사에 집중할 때 나는 그 주위를 봤다.


과연 조종사 혼자 있었더라면 임무 수행을 할 수 있었을까? 거기에 상황병이 레이더에 뭔가 잡힌다고 보고를 했겠지. 그래서 조치가 이루어졌겠지. 전투기는 그냥 두고 타면 될까? 정비부에서 또 열심히 정비 하겠지.

하다 못해 정비 부품이나 행정처리라도 행정병이 어느 정도 임무를 수행하겠지. 취사병이 한 밥이라도 먹고 출동했겠지.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분업화 되어왔고, 따라서 각자 맡은 업무가 다르다. 이 업무에 따라 나눈 것이 직책이고, 직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는 차원에서 계급이라는 도구가 생겨났다. 그러니 책임감 있게 다들 군생활 해라. 장교, 부사관, 병사 이 세 계급 중 한 계급이라도 똑바로 하지 않으면 성공적인 조치는 없었을 것이다. 라는 말로 그 교육을 마무리했던 기억이 있다.


군대에서는 계급으로 표현되는 사회의 직책. 사회의 직책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사장일 수는 없다. 알바생은 필요하다. 직책과 계급은 서로 다른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다.

즉 총괄 하기에 쓰이지 못한다면 그 의미를 상실한 것. 갑질은 무엇이 중한지 모르는 자의 것이다.


계급. 중위라는 내 계급과 통역장교라는 내 직책은 통역병들을 총괄하기 위한 도구이다.


두번째로는 권위라는 단어를 적었다. 도대체 권위란 무엇인가? 흔히들 부정적인 어감의 언어로 쓰이는 경우를 종종 볼 때가 있다. 소탈하다를 탈 권위적이다의 다른 표현으로도 쓸 정도이니 말이다. 원래의 취지도 그랬을까. 우리는 각 분야의 권위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권위자 혹은 전문가 라고 부른다. 군대의 입장으로 보면 자신의 병사 한명 한명을 잘 아는 것이 전문가이자 권위자다. 적어도 자기 병력에 대해서는 권위자가 되어야 한다. 그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


권위. 해당 분야를 가장 잘 아는 것. 내 부하의 권위자는 나다. 권위를 계속 유지하려면, 계속 공부하고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과를 적었다. 사과를 하면 권위가 떨어질까. 자존심이 상할 수 있다. 일단 내 잘못이라는 거니까. 내 실수라는 거니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니 자존심은 상할 수 있다. 근데 권위가 떨어질까.

권위가 있으려면 부하들과 더 친밀하고 부하들이 마음을 열어야한다라는 결론을 위에서 도출했다. 사과하지 않는 지휘관과 잘못을 인정하는 지휘관. 나의 입장에서는 누구를 더 따르겠는가.

어쩌면 자존심과 권위는 비례하지 않는 개념이다.


답은 나왔다. 적당한 시간을 보다가 저녁근무 통역병이 퇴근을 하자 같이 담배를 피러 갔다. 나는 담배를 태우

지 않기에 통역병만 담배를 피고 나는 맥심은 탔다. 진한 맥심의 쌉쌀한 맛이 입안에 먼저 퍼지고 그 다음 단맛이 올라왔다. 목을 축이자 본건을 이야기 하였다.


"우선 고맙다. 이번 고층사항을 해결할 때 통역병들은 지휘계통을 준수했어. 먼저 나에게 이야기 하면 제일 좋겠지만, 스스로 생각하여도 다소 강경하게 영어 동아리를 해야한다고 통역병들에게 이야기 한 것을 기억하는 지라 중대장님께 보고한 것만 하여도 감사하다."

첫 마디를 내뱉기가 힘들지, 한번 말하자 계속해서 말할 수 있었다.


이어서 내가 생각하는 권위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나는 권위가 있는 통역 소대장으로 너희에게 남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너희들과 가장 친한 간부 중 한명이 되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잘못한 태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나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하고, 너희들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교관으로 반영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말하고 나니 후련했다. 생각보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느낌도 받지 않았다.


당직근무 퇴근을 하고 바로 군수과로 통역지원을 갔다. 가기 전 이후 방 벽면에 붙인 포스트 잇에 적을 키워드 세가지를 급한대로 노트에 적었다.


 계급, 사과 그리고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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