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준 Oct 11. 2021

통역은 힘들어-1

5월 19일(수)


간밤에 레바논에서의 첫 당직근무를 무사히 끝냈다.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고민거리도 잘 해결되었다.

계속 고민거리를 마음에 두고 신경을 써와서 그런지 피곤하였다. 

원래 당직근무 후에는 바로 퇴근하여 취침을 해왔지만, 오늘은 오전 9시에 UNIFIL에서 유류와 관련된 점검이 예정되어 있었고, 군수과장님의 요청에 따라 30분 정도만 통역 지원을 하고 퇴근하기로 했다.


아침이 되자 생각보다 날이 더웠다.

지중해성 기후인지라 해 아래 있으면 정말 따가울 정도지만, 습도가 낮아서 그늘에 있으면 선선하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습하고도 더웠다. 


간밤에 첫 당직근무를 서며, 심한 내적갈등을 겪고 용사에게 사과를 한 후 속은 후련하였지만, 밀려오는 피곤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머리는 기름으로 뭉쳐있었고, 수염은 까끌까끌하게 올라왔다. 눈도 침침한 것이 하룻밤 사이에 고단함이 많이 쌓였다. 샤워 한번만 하고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지만, 지휘통제실의 무전기에선 이미 UNIFIL의 점검단이 입영을 위해 위병소로 도착하였다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그래, 딱 30분만 참자.'

터벅터벅 발걸음을 수송부로 옮겼다. 수송부의 유류탱크 쪽으로 이동하자 1,3종 담당관 상사님이 유류고에서 대기하고 계셨다.


키와 체구는 조금 작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유자로 항상 입가에 웃음을 띄고 계시는 담당관님은 평소 나와 친분이 있어서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자주 마주하였지만, 상사라는 계급에서 느껴지는 경력답게 본인의 업무에 관해서는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계셨다.


“오늘 통역 지원 감사합니다, 통역장교님! 박카스라도 한잔 하시지요!”

레바논에서 정말이지 구하기 힘든 박카스였다. 안그래도 타우린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날이 더웠는데 냉장고에 보관까지 해두셨다가 방금 꺼낸 것이었다.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온 보람이 있습니다."

웃으면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시원하게 한잔 들이키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어서 몇 마디 농담을 주고받자 곧 검은색 테이프로 UN이라고 붙여진 흰색 도요타 SUV 한 대가 수송부 쪽으로 들어왔다.

마중을 나가서 차량이 주차하고 점검관들이 내리길 기다렸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총 3명으로, UN에서 15년간 근무한 민간인 점검관 한 명과 UNIFIL에서 근무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군 2명이었다.


민간인 점검관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였다.잘 관리되지 않은 상태로 기른 듯 보이는 수염, 불룩 나온 배, 얼룩이 묻어있는 회색 반팔 면 카라티, 마찬가지로 잘 관리되지 않은 더벅머리의 사나이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뭔가 불만이 있는 듯 보였다.


 함께 온 두명의 오스트리아 군은 준위 한 명과 하사 한 명으로 준위도 40대 초반정도로 보였다. 팔 한쪽 전체를 문신으로 가득 채웠고, 대머리였다. 젊었을 적 운동을 많이 했는지 팔뚝이 굵었고, 덩치가 컸다.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하사는 키가 190정도 되었으며 운동을 한 것보다는 타고난 체격이 매우 건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종일관 웃으며 먼저 준위에게 장난을 걸었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며 악수하고자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점검관이 악수를 받으며 인사를 했다.


점검단 세 명과 나 그리고 담당관님, 모두 다섯명이 인사를 간단히 모두 나누자 우리는 시간을 지체할 필요 없이 바로 점검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때 점검관이 먼저 우선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군수과장님과 담당관님, 나를 사무실 컨테이너로 불렀다. 


“우선은 불평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민간인 배불뚝이 점검관이 앉자마자 한 말이었고, 시작 전 간단한 자기소개 등을 기대했던 우리에게는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군수과에서 처음으로 받는 점검이기에 분위기를 잘 몰랐고, 그러한 이유로 더더욱 점검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군 세 명은 일단 듣기로 결정했다.

 

 “왜 한국군은 저의 메일에 대하여 답장을 하지 않고, 제가 전화로 독촉을 해서야 답장을 했습니까? 이것은 굉장히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사항입니다. 저는 UNIFIL을 대표하여서 이곳에 점검을 하러 온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조정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함께 오는 저 두 명의 오스트리아 군과 협조를 우선 구해야 할 것이고, 차량도 빌려야 할 것이고..”

 목소리가 크고 말을 빨리하며, 통역을 하는 도중에 내 말을 끊기를 좋아하였다. 자신의 말은 길게하며 종종 흥분하는 기색을 애써 감추려하지 않았다.


물론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 점검관이 나에게 화를 낸다는 점이었다. 나는 단순히 통역 업무를 지원하러 가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점점 나도 언성이 높아지고 내가 통역할 때 말을 끊으면 나도 내 임무를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서로 감정이 상하려고 시작할 때쯤 과장님이 말리셨다.


“한국군이 진 교대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안정화 기간 중에 있으니, 늦게 메일을 보낸 것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양해를 해 달라.”


한국군의 사과를 받은 것이 만족스러운지 그제서야 체크리스트를 꺼내 보이며 앞으로 진행 될 과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오늘 점검할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하지만, 시작에 앞서 저는 한 가지 당부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오늘 점검관으로서 이 자리에 오게 된 이유는 한국군을 도와주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한국군의 편이고 한국군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오늘 저의 지적 사항은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업무적인 것입니다. 이 부분을 명확히 인지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강조를 하며 거듭하여 말하는 것을 보고, 또한 일전에 사과를 요구한 태도를 미루어 보아하니 점검 간에 다른 대대와 마찰이 여러차례 있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사과를 요구한 게 미리 기선제압을 위해서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약 20분 정도 길다면 긴 대화를 나누고 본격적으로 점검을 가기위하여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스트리아 군 두 명도 미리 분위기를알고 있었는지 나에게만 살짝 농담을 건네었다.


“너희들 살아있었구나! 그 안에서 죽는줄 알았어!”

오스트리아 하사가 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가까스로 살아 남았지 뭐야, 첫번째 점검은 통과한거니?”

마찬가지로 웃으면서 대꾸하자 평소 점검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하사는 크게 웃으면서 내 등을 쳤다.


다들 체크리스트에 맞추어 점검을 시작했다. 먼저 기름 확인이었다. 강한 고집이 보이는 눈빛의 점검관은 재고 수량 확인, 기름을 20리터를 꺼내고, 기계에서 20리터가 나왔다고 표시가 되는지 확인하였다. 도중에 기름이 20리터 이상으로 나와 흐를 것 같자, 담당관이 도와주었다.

그러자 점검관이 강하게 언성을 높였다.


“절대, 절대, 절대, 두번 다시는 우리가 점검을 할 때 기계에 손을 대지 마십시오. 이 기름을 탱크에 다시 넣고 처음부터 이 과정을 반복하겠습니다. 자 다시 시작.”


“아이 좋아라, 덕분에 무거운 기름을 들고 탱크 위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다시 넣으면 되겠네!”


사뭇 어두워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오스트리아 하사가 농담을 던졌지만, 분위기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다시 시도했고, 기계는 정상이었다.

이어서는 기름에 물이 들어있는지, 농도는 어떠한지, 기름이 나오는 속도는 적당한지 등 정말이지 수 많은 시험을 오전 9시부터 시작하여 12시 40분까지 하였다.


한 30분 정도면 끝날 줄 알고 도와줄거라고 했는데 날도 덥고 습한데다가 아주 죽을 맛이었다.

특히 지적사항이 하나씩 나올 때 마다 흥분하며 자신이 없었으면 어쩔뻔 했냐. 만일 오늘 본인이 오지 않았더라면, 한국군은 아직도 해당 사항에 대해서 개선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그래봤자 주변에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만일 이 잡초들이 죽으면 이것들은 건초가 되어 자칫 화재의 위험성이 있다 등의 내용 밖에 없었다.)


유류 뿐만 아니라 이어서는 발전기를 점검하고 마지막으로는 LPG 가스까지 확인했다.


"아 어젯밤 당직이었는데, 아직까지 못쉬고 있다. 30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자고 싶어."

점검관이 LPG 가스통 상태를 확인하는 사이에 하사에게 말을 붙였다.


"글쎄, 여기서 지금 네가 담배를 피면, 우리 모두 푹 쉴 수 있지 않을까?"

LPG 창고 옆 금연 표시를 가리키며 하사가 담배 한 개비를 건네왔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그만해." 옆의 준위가 웃으며 말렸다.

농담을 주고 받다보니 정말 점검관이 모든 점검을 마쳤다.


점검관은 떠나기 직전까지 앞에서부터 나온 지적사항을 다시 친절하게 하나하나 언급해주며 본인 덕택에 개선될 수 있음을, 우리는 한편임을 강조하였다.


"쉽지 않은데." 담당관님의 한마디가 웃겼다.


동감이었다. 대개 통역을 하다가 보면, 내가 통역하는 대상과 같은 위치에 처해있음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한국군의 대표자가 타군의 대표자에게 환담을 하거나 연설을 할 때 나 또한 언행을 좀 더 조심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대표자스러운 언행을 기대 받는다. 


오늘의 경우에는 점검을 같이 받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실무 차원의 통역은 웬만하면 통역병을 시키리라 다짐해본다.


이전 05화 레바논 파병지에서 맞는 생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