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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준 Oct 14. 2021

통역은 힘들어-2

레바논 5월 20일(목)


전날 근무취침을 똑바로 하지 못해서 힘들었다.


나는 퇴근 후 씻고 바로 잔 뒤 일어나서 먹을 것을 먹고 잠을 깬 뒤 가볍게라도 걸어서 밤에 자야할 때 제대로 자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어제의 일기에 소상히 기록하였듯이 퇴근 후 바로 자는 것은 커녕 씻는 것도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었고, 여기까지가 이제 어제 일기까지의 내용이다. 일기를 쓴 뒤 근무 취침을 포기했다. 저녁까지 먹고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없겠지라는 생각에 악에 바쳐 밤 11시쯤 잤다.


글쎄, 나의 예상은 마지막까지 벗어났다.

한 세 시간 잤을까 새벽에 총 소리가 정말 무서울 정도로 미친 듯이 들렸다.


그냥 보통의 총소리가 아니라 기관총이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총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다. 아직도 야생동물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무장 사냥꾼들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둔지에서 총 소리가 들려서 확인해보면 총을 든 사냥꾼들 두 세명과 사냥개를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주둔지에서 총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기 때문에 파병 초기에는 다들 총소리만 들려도 긴장을 하다가 나중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하지만 그래도 총을 만져본 지 7년이나 되는 사람으로서 이것이 사냥용 엽총이 아닌 기관총임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연사되는 속도가 엽총으로는 나올 수 없는 속도였다. 또한 사냥감에 이 정도 양의 총알을 쓸 정도면 수지타산에 대한 개념이 없는 형편없는 사냥꾼이며, 사냥감을 잡았다 할지라도 사냥감에 박힌 총알을 뺴다가 그냥 포기할 정도일 것이다.(어쩌면 흔적도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평소 들어왔던 무장 사냥꾼의 엽총 소리가 아닌 기관총 소리를, 그것도 끊임없이 30분 넘게 듣자 불안하였다.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었다. 출동 준비를 해야하나. 인근 레바논 군에 문제가 있나. 이런 저런 생각이 들때 즈음, 총소리가 점차 산발적으로 들리기 시작하고 별다른 통제가 없이 5분정도 지나자 일단 그냥 자기로 하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당직사령이 별도로 통제할 것이라는 믿음과 만에 하나 실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상황을 진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을 나는 신봉한다) 돌이켜보니 무책임한 듯하지만, 마지막까지 예상을 벗어난 취침 패턴에 심리상태가 정상적이지 못했던 점을 참작해주시길 바란다.


어찌어찌 긴 밤이 지나고, 모두 아침점호 때 모이자 다들 간밤의 미친듯이 이어진 총소리에 관하여 다들 떠들기 시작하였다. 아침식사를 하며 뉴스를 확인해보니 지난 밤 새벽 2시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휴전 협정을 맺었고, 어제는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총을 쏜 것이라고 정보과에서 설명해주었다.


 우선 더이상의 무력충돌로 희생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였으나, 간밤에 긴장한 떠오르니 약간 분하다가, 그래 휴전 정도면 총 쏠 만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에 이어서 역시나 피곤한 상태로 아침 9시에 또 군수과에 통역지원을 갔다. 어제 이후로 실무 차원의 통역은 통역병을 시키리라 다짐하였으나, 오늘 통역은 어제보다 중요하다는, 평소 친한 시설물 담당관 중사님의 부탁을 듣고 출근했다. 군수과에 가서 설명을 들으니 과연 어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일단 여기 있는 영문 계약서를 확인해보시고, 혹시 저희의 입장에 반하는 내용이 있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시설 담당관이 따뜻한 맥심 커피를 주며 말했다. 쌉쌀할 정도로 진하게 탄 맥심을 한모금 입에 머금고 영문 계약서를 검토하며 시설물 담당관의 부연 설명을 들었다. 통역 전 배경 설명을 듣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우리가 어떠한 입장을 취할지에 따라 통역 간 선택하는 단어의 뉘앙스가 달라지며, 미리 오고 갈만한 내용을 대략적으로라도 머리 속에 그려보면 훨씬 수월하게 통역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용인 즉슨, 우리 부대와 현지 업체간에 맺었던 공사들의 계약 취소를 현지 업체들에게 통보하는 것이었다.


"최근 레바논 현지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백신 접종률도 높지 않아서 외부인 접촉에 관한 새로운 지침이 하달 되었습니다. 부대원 외의 인원들이 주둔지 안으로 들어와서 진행하는 공사를 하는 것은 제한됩니다. "

시설 담당관이 설명했다.


"그러면 여기 있는 계약서의 내용들이 취소가 되었다는 거네요?"

내가 물었다.


"맞습니다. 올해의 공사 계획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또한 올해 취소되는 건에 대해서는 일단 예산을 모두 한국으로 반납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이 공사 계획들이 또 반영이 되어서 진행이 될지는 저희도 모르네요?"

모르는 것은 나도 확실히 물어보아야 한다.


"그렇지 말입니다. 올해 예산이 반영 되었다고 해서 내년에 또 반영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시설물 담당관님의 답변으로 예상 가능한, 오늘 주고 받을 내용들과 우리의 입장, 한계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근데 여기서 업체와 약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초기에 현지 공사 업체와 계약을 맺은 후 코로나를 이유로 공사진행을 계속해서 미루어 왔고, 일부 공사 업체들이 한국군의 승인을 받지 않고, 미리 자재를 사놓은 것입니다."

시설물 담당관님의 덧붙인 설명으로 오늘 문제의 핵심을 집을 수 있었다.


계약서에 명시 되어 있듯이 공사 업체는 자재를 사기 전 먼저 한국군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사는 과정에서 한국군이 자재를 검수하여야한다. 하지만 일부 업체는 미리 구매를 하였고 업체들이 자재를 구매한 시점에 비해 지금은 레바논 파운드화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 상태라 업체들이 자재를 원자재 공장에 환불을 받아도 당시의 레바논 파운드화의 가치에 비하면 한참 못 미쳤다.


상대방의 입장도 딱하였지만, 우리가 받은 지침은 명확하였고, 이와 같은 사항이 만에 하나 발생할까봐 우려되어 계약서에 명확히 규정과 근거도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 오늘 통역 또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영상통화를 통해 상대 업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국 부대입니다."

내가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일전에 아랍 전문가인 김영미 PD님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배운 점 중 하나였다. 아랍권의 문화상 바로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소 무례한 행동일 수도 있다는 것. 우선은 날씨나 다른 친목적인 대화를 주고 받다가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핸드폰 속 작은 화면을 보아하니 현지 업체 측 대표도 영어를 잘하지 못하여 통역인을 고용한 상태였다. 대표 사장은 남성으로 확실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고, 그나마 통역하는 아주머니는 이해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반갑습니다. 레바논은 어떠세요? 음식이나 날씨는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한 두 마디를 건네기 시작한 뒤 서로 본격적인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기 시작하였다. 업체도 계약서의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고, 본인들의 과실을 인정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친목적인 대화의 분위기가 이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리 시설 담당관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 진행될 대화를 그려보면서 '그동안 미리 자재를 사왔다는 관습을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은 명백히 계약서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를 어떻게 영어로 표현할까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지는 내용은 계약의 취소가 아닌, 혹시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공사의 연기는 안되냐고 상대방이 간청해왔다. 그럴 경우 미리 사놓은 자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역시 우리의 권한을 벗어나는 내용임을 알려주었다. 물론 내년도에 예산을 또 신청하겠지만, 반영이 될지는 모르는 사안이었고, 나의 통역이 곧 한국군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설명하며 나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대략 한 시간에 걸친 업체와의 회의를 마무리했다. 뜨거웠던 맥심을 담았던 종이컵에는 어느새 이빨 자국만 가득 남겨져 있었다. 아직 10시 밖에 되지 않았건만, 현실부정, 간청, 흥분, 시인의 네 단계를 거치는 상대방을 대응하고 나니 정말이지 진이 빠졌다. 그래도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전달하였고,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통역 전 사전 준비도 잘했고, 회의의 내용도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나머지 업체도 좀만 쉬었다가 바로 하십니까?"

보아하니 큰 문제 없이 첫 회의를 마쳐서 시설 담당관 중사님도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아닙니다. 그냥 바로 하겠습니다. 당 떨어지는데 맥심 한잔 더하시죠?"


이후 3군데의 업체에 전화하여 설전까지 벌이며 모두 취소하였다. 한 업체와의 통화를 마치고 다음 업체로 넘어가면서 점점 팩트만 가지고 이야기 했고, 예의인 것은 알지만 피곤하여 전화를 걸자마자 바로 일 이야기로 넘어갔다. 갈수록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태도는 단호해졌다.


계속 말을 하는 것도 지쳐서 내 말만 대응하지 못하도록 계약서의 이야기만 계속 했다. 다음 업체에 전화를 걸수록, 반복할수록. 


마지막 업체까지 성공적으로 전화를 마쳤다.(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마지막 업체의 전화를 끊자 상대방의 프로필 사진이 여지껏 싸워왔던 화면 떴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아들을 안고 웃는, 방금까지 영상통화로 대화한 현실부정, 간청, 흥분, 시인의 남자 사장의 모습이 있었다.


만족스러운 마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순식간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저 사람도 부양할 가족이 있을터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군과 계약을 따내고 기뻐서 온 가족과 함께 즐거워했겠지. 늙은 어머니께 자랑도 하고, 또 어머니는 동네방네, 하다못해 길거리 아무나라도 붙잡고 자랑을 하셨겠지. 어린 아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아빠이고, 어머니에게는 대견한 아들이겠지? 나는 그런 사람을 그냥 빨리 해결해야하는 많은 업무 대상자 중 한명으로만 여겼구나. 그 사정 하나하나 말이라도 하고 싶었을텐데, 말도 안통해서 통역까지 구해왔던데 잘 듣지도 않고 내 말만 강하게 쏘아붙였구나.


오늘도 점심시간을 넘겨 업무가 끝났다. 식당으로 가서 남은 밥, 식어서 살짝 굳은 밥을 계속 씹었다. 힘들어하는 다른 업체들을 상대로 단호히 이야기 한터라 썩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너무 강경하고 단호하게 말했나. 달래듯이 말할 걸. 뒷 업체들은 사정을 듣는 시늉이라도 할걸. 

내 말만 쏘아붙여야 했을까. 아니다 예의는 다 최대한으로 지켰다. 단호하게 입장을 밝히지 않고 희망을 주는 것이 상대방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우리의 권한 밖에 있는 것을 약속했다면 언젠가 서로의 입장이 더욱 난처해질 수도 있다. 


스스로의 행동을 대변했지만, 그래도 표현은 좀 더 신경쓸 걸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밥맛도 없고, 혼자 식당에 있으니 뉴스나 봤다. 하필이면 이젠 지겹지도 않은 막말 논란과 공세들을 다루는 뉴스들이 자극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힘도 없고 짜증나 밥이나 마저 씹었다.


말을 강하게 하는 게 일을 잘하는 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은 일단 관심을 끌어야하니까 자극적이어야 하고, 그러면 말을 강하게 해야할 수도 있겠다. 일부 선배나 높은 분들 중에 '나는 말 세게 하고 성격 싸가지 없어도 일만 잘하면 인정해.'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종종 들었다.


글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적 활동인 일을 하면서 말을 사회적으로 하지 못하면 일단 그 자체가 실패하고 시작하는 것 아닌가. 


말을 세게 하더라도 맞는 말 아니냐는 팩트 폭행이라는 단어. 직관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은, 그래서 인기 있는 신조어. 근데 말이 너무 무섭다. 폭행이라니. 또 팩트 폭행이라는 단어를 사회적으로 기성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용하진 않는다. 수험생이나, 현실이 너무 힘들어 감히 직면하지조차 못하는 이들에게 쓰인다.

팩트를 부드럽게 말하는 게 말해주면 안되나. 부드럽게 말하니 못알아들어서 폭행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강력하게 팩트를 사용했다는 의미겠지. 

근데 팩트 폭행을 당하는 사람만 속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상처받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좀 더 다른 사람의 기분을 고려하라고. 우연히 영상 통화 후 꺼진 상대방의 프로필에 나타난 어린 아들이 점심시간 내내 생각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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