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였던 엄마, 세상이었던 아빠

등지는 이야기_1

by 느루

1995년 10월과 11의 사이, 그날

내가 소음을 뚫고 태어났다,

아빠는 그랬다. 엄마는 나를 지워내려했다고

그걸 막은 아빠였다고 그 말을 할때면 늘 취해있었다.


그럼 나는 늘 아, 공짜로 사는 인생같았다

결국 태어나지 않았어야하는 삶이 태어나 사는

무료인생같은 날들이었다.


모두가 나같은 줄 알았던 유년기

마음 한 구석에 "안되면 죽지 뭐." 라는 말이 늘 함께 따랐다

모두가 나같은 줄 알았다. 무료인생이니까


고등학생이 되자, 담임 선생님들이 자꾸 자기들 아픈 사연들을 하나씩 내놓았다.

나는 기어코 그 사연들에 공감을 했지만, 대체 왜 자꾸들 꺼내지, 왜 나한테만 말하지라는 의구심이 들었었다.


지금은 안다, 나는 그때 충분히 힘들었어야 했다.

술에 취해사는 아빠

그런 아빠를 두고 간 엄마

혼자서 매일 집은 지키던 나,

밖을 배회하던 언니,

수학 속으로 도망쳐 세상에 없던 답을 찾으러 나선 나,


그걸 지켜보던 담임 선생님들,

아니 어른들은 내가 감히 죽을까,

감히 힘들다 못하는 건가봐 하고

조금 터놓으라고 자신도 이혼가정이다,

자기도 죽으려 는 고비를 넘긴적이 있다는 이야기들을

‘나를 살리려고'꺼내어 보였다



그들 덕일까,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 덕일까, 엄마는 그때부터 나를 뭐든 스스로 잘하는" "말 잘 듣는" 딸로 여겼고 새아빠에게 내보였다.

그 덕일까, 아빠는 내자랑이라면 둘째 서럽게 세상에 고해성 사를 해댔다. "나는 그저 해준 것도 없는데 잘 자란 둘째"라 고 둘째 서럽게


20살이 된 나, 어디 갈 데가 없었다.

그때부터 였나 내 집이 한국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

혼자 살기 시작한 나는 어디에서도 불편했다 굴을 팠다.

생각의 굴이었는데 파다보니 늪이었다,

하나의 생각을 떠올리면 꼬리를 물고 늪을 만들었다.

그렇게 10년을 팠다


그 사이 나는 더욱더 엄마의 방패가, 아빠의 세상이 되었다.

뭐가 그리 바빠, 뭐가 그리 휘몰아쳤는지 쫓기듯 일을 10년했다. 장소가리지 않았다.

지방, 수도권 그냥 나를 찾는데면 뭐가 그리감사한지 감사를해대며 일했다.

그 곳에 내가 있었던가,

그렇게 10년,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던, 10년 내가 만든 부모의 기대를 좇아 여기에 도착했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망신창이였다

몸이 고장났다

약을 먹어도 들지 않았다.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엄마를 찾아갔다.

내쳐졌다. "아픈게 다가 아니다"라는 피를 긁어내는 말을 듣

고 내쳐졌다.


그 말을 들을 때에도 난 아픈것도 내 잘 못 같았다.

다시 서울로 가서 의사선생님들께 빌어봤다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무료 인생이 아니었다. 살고 싶은 인생이다.


대학병원 입원때에도 어느 가족 하나 한명도 서울에 와보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스트레스'라며 마음을 비우랬다.

마음은 어떻게 비우는 거지, 스트레스가 사람을 죽인다는 기 사를 쓴적이 있는거 같은데 그 사람이 나였나


대학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는 병도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나온 날, 2024년 여름이었다.

한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 해 추석 아픈 몸과 함께 혼자서 다시 굴을 파다 살고싶었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혼자서는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아픈게 다가 아니다" 라는 엄마는 내 10년을 "허송세월"이 라 칭했고

아픈 걸 알릴 수 없었던 아빠는 울보가 됐다 "한번을 서울을 못가본 게 아프다"고 울기만 했다.


<폭삭속았다(2025)>를 보면 나는 내가 불쌍하다. 금명이 가 너무 부러워서 내가 불쌍하다. 다들 부모님이 생각나서 마음이 애린다는데 나는 어린 내가 애린다. 혼자 집을 지키 던 내가, 혼자 공부를 시작했던 내가, 혼자 서울에서 살겠다 고 바둥바둥 발버둥치던 내가, 애린다. 나도 사랑이란 걸 그 렇게 받아보고 싶었나 보다


그럼에도 갈 곳은 없었다. 어딜 가든 내쳐졌다. 처음엔 결혼 한 언니네, 다음은 이모네, 다음은 다음은


알았다. 아무도 나를 나로 봐준 이가 없었다.

태어날때 응애하던 나로 어린 나로 봐준 이가, 엄마도 아빠도 아빠도 엄마도 나도 내가 얼른 커서 비빌 버팀목이 되었으면 했었나 보다.

난 누구가 비빌 언덕이 아니라,

딸이었다.


그렇게 몸 둘 곳없던 환자1이된 나는 눈 떠보니 갈 곳 없는 혼자다. 그럼에도 다르다.

2025.04.24 새벽 6시 눈을 뜨자말자 꿈에 나온 아빠에게 제일 먼저

가족이 힘들다 토로했다. 그 첫번째가 엄마 언니가 아니라 아빠가 될줄은 나도 몰랐다.


그는 왜 가족이 힘드냐며 속상해하다가 "겨울에 같이 산에 가서 네가 좋아하는 나물을 캐자"고 미래를 다졌다 지금은 내게 없는 미래를 다지는 말이 아직도 사무친다.


엄마는 "그렇게 네가 힘들면 네가 괜찮을때만 가족을 찾으라

"는 말로 통화를 맺었다 그렇게 나는 가족에게서 떠났다.

떠남에 있어서도 안다. 나는 그들을 온전히 미워도,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어서 아팠다


어쩌면 IMF를 겪은 아빠,

그 아빠를 지탱하다 부러졌던 엄마,

그 가정에서 도망친 언니를 지키고 싶었나보다.

난 그럴 깜이 못되는데 공짜인생을 사는 주제에 하고싶은 건 많았나 보다.


이제는 공짜인생이 아니다. 두번째 인생이다.

스트레스가 오면 다 끊어낸다. 그게 무엇이든지.

직장, 가족, 친구, 전부 내게 어떠한 피해를 주는 것은 곁에 두지 않는다.


이 글의 첫 갈무리를 마무리 하며, 이 글 속의 두번째 인생을 함께해준 그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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