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거기서 페리를 만나> | 포르투 편 : 4 화
종탑에서 내려와 페리는 곧장 시내 쪽으로 난 횡단보도를 건넜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대로변에서 작은 골목으로 꺾어 든다. 초록색 타일과 밤색 테라스로 장식된 4층 건물 앞에서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을 올라갔다. 곧 작은 골목들이 한데 물린 작은 광장이 나타났다. 오후의 햇살 아래 하얀 파라솔과 흰 가구들을 벌여 놓은 카페가 보였다.
페리는 코트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수첩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가차 없이 세로로 접힌 수첩은 원래 상태로 펴지려 안간힘을 쓰는 듯 보였다.
‘스케치 노트를 저런 식으로 접다니.’
작은 바람에도 살랑거리는 속지 안으로 언뜻 낙서 같은 알파벳들과 도식 안에 묶인 몇몇 단어들이 화살표로 복잡하게 이어져 있었다. 조금만 더 바람이 세게 불면 곧바로 반동이 생겨 바닥으로 튕겨 떨어질 것 만 같았다. 종이들이 기지개를 켜려고 안달인 지 함께 내려놓은 볼펜은 이미 접힌 홈을 지나 굴러 내리고 있다. 마침 점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인사를 건넸다.
“비카 한 잔이요. 그리고 물도 한 병.”
페리는 메뉴를 다 아는 모양이었다.
“비카가 뭐죠?”
“포르투갈 식 커피예요. 에스프레소 방식으로 내리는데, 걸쭉하면서 향기롭고 가벼운 맛이 좋습니다. 사실 조각상이 아니라 이 커피를 마시러 왔어요.”
페리가 싱거운 농담을 하며 무심히 노트를 건드렸다.
“아, 그럼 다음엔 그걸 먹어봐야겠네요.”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노트로 계속 눈이 갔다. 곧 황금색 크레마 만으로도 군침이 도는 비카와 농후한 빛깔의 우유거품이 올라간 카푸치노가 나왔다. 파라솔 밑에 앉은 나와 달리 햇볕을 정면으로 맞던 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늘 자리를 눈치도 없이 그냥 차지한 건 아닌가 싶어 의자를 당겼다.
“너무 눈부시죠? 테이블을 조금 당길까요.”
“아니에요.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햇볕 때문에 다시 오는걸요. 사실은 이 해를 쬐러 포르투에 왔습니다.”
테이블에 작은 파이 두 개가 놓였다. 처음 보는 점원이 테이블로 다가와 시원하게 웃었다. 소리를 내어 웃지 않았는데도 하얀 이가 마치 파란 하늘에 채도 높은 새하얀 구름처럼 시린 색으로 빛났다. 보기만 해도 얼음을 가득 문 것처럼 이가 시린 느낌이었다. 그는 나와 페리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페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우리 가게 파스텔 데 나타는 포르토 최고랍니다.”
점원은 말을 하면서도 이를 드러낸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얀 이와 더불어 커다란 입모양이 눈에 띄었다. 몇 초 이상 바라보니 못내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알겠어요. 한 번 먹어보죠.”
페리는 즐거운 얼굴로 파이 하나를 집어 들고 내게도 한 번 먹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요 근래 먹은 것 중 가장 맛있습니다.”
파스텔 데 나타는 계란 노른자로 만든 커스터드 크림을 상아색 생지에 담아 구운 작은 파이다. 크림 중간중간 검게 그을린 곳에서 훈제된 캐러멜 맛이 났다. 입안에 풍성히 퍼지는 보드라운 단 맛이 기분 좋은 포르투갈의 파이는 커피와 아주 잘 어울렸다.
“파스텔 데 나타에서는 여러 가지 맛이 나지만 그 검은 그을음을 맛보지 않으면 이 도시에서 길을 잃을지도 몰라요. 그림자가 짙은 도시에서 길을 잃는 것은 좋지 않지요. 그러면 몇 번이고 다시 포르투를 찾게 되는 거거든요. 햇볕에 그을린 그림자의 맛!”
그는 페리의 어깨를 툭 치고는 페리를 응시했다. 페리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잔을 들어 비카를 마셨다. 점원은 이를 더욱 많이 보이며 처음보다 더욱 깊게 파인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시기를!”
점원은 접혀 있던 다른 테이블의 파라솔을 모두 펴더니 바쁘게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페리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햇볕에 눈을 비비더니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찰나의 순간, 페리는 미소가 싹 가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잊고 싶었던 고민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책임져야 할 스스로의 미래가 과분했다. 햇볕에 한들거리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 나와는 상관없는 동 떨어진 세계의 사람들이 바쁘게 거닐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평화롭다.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가볍게 느껴졌다.
‘돌아가면….’
여행이 끝나고 고향의 공항에 발이 닿는 시점부터, 여행 중 품었던 아름답고 건설적인 계획들은 싱싱한 힘을 잃고 차례로 시들어 간다. 우연과 낭만 속에 고무되었던 마음은 말라버리고, 굳게 마음먹었던 계획들을 실행해 볼 틈도 없이 팍팍한 일상이 꾸역꾸역 차오른다. 여행하는 동안 여유로웠던 나는 사라진다.
‘이번 여행이 끝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바람이 휙 지나갔다. 페리가 남기고 간 검은 노트는 테이블 끝으로 더욱 아슬아슬하게 밀려났다. 볼펜이 구르며 반동을 주자 접혀 있던 노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트는 펼쳐지며 뒤집어졌다. 몸을 굽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었다. 내리막 길을 굴러 내려가려는 펜을 다급하게 주워 탁자에 올렸을 때, 나는 어떤 진한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를 보았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반쯤 접힌 노트 안에 힘 있게 눌러쓴 어떤 메모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햇볕에 붉은 고동 빛이 되어 빛나는 것처럼 햇살을 받은 검은 잉크에서는 머리카락 같은 붉은빛이 돌았다. 훔쳐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강렬한 색감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소중한 비밀을 훔쳐보는 사람처럼 조용히 좌우를 살피고 단숨에 그 검붉은 메모를 읽어 내려갔다.
<페리 수첩 속 메모>
– 누구의 글씨체 인 지 알 수 없지만 페리의 노트 속에 있는 수많은 필체와 확실히 다르다
~
포르토에서는 그림자를 잃어버렸어요. 석양이 질 무렵 에야 모로 공원에서 찾을 수 있죠. 도시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찾지 못했던 걸 그때 잠깐 봤지. 찾았다고 하기보다 거기 있었어. 해가 졌을 때 다시 잃어버렸어요. 두로 강 속으로 흘러 들어가 버렸는지 어디로 늘어졌는지 모를 도시의 수많은 그림 자 속에 숨었는지. 아줄레주의 미세한 번짐 사이에 숨은 건 지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아 그만두었죠. 거기선 누구나 잃어버리니까 오히려 마음이 놓이더군요.
그림자를 잃어버린 자들의 도시. 그게 포르토의 다른 이름이에요. 뒤죽박죽 하지만 오히려 그게 마음 편하더군요. 거기선 다시 찾을 생각 따위는 도저히 들지 않으니까 마음이 놓였죠. 다만 강렬하게 해가 내리쬐는 오후에도 녀석을 찾지 못한다는 것에 실망하겠지만 뭐 어때? 어디서든 그 녀석도 바다로 흘러가는 포트강을 보고 있을 텐데. 낮 동안 어디서 무얼 했든 해가 질 때면 석양을 보러 모로 공원을 어슬렁거릴 테니까 그때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만약 그때를 놓친다면 포르토에 하루 더 머물게 될 거예요. 그게 이틀이 되고 삼 일이 되고 그런 거라고! 여행이란 게 그러다가 자꾸 길고 긴 일정이 되는 거니까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을 만큼 여행을 하는 건 위험해요. 어디든 똑같아 보일 만큼 긴 여행은 불행해지고 말지요. 돌아갈 수 있었을 때 돌아가는 것, 세상 이치가 똑같은 것처럼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이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안다고 해서 변한다면 어디 인간이게요? 그는 그 말을 하다가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포트와인이나 한 잔 더 하지요. 괜히 와인에 셰리를 흘려 넣은 게 아니라니까. 이렇게 해야 그래도 흔들리는 물살 위에서 와인이 푹 시어버리지 않고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향을 오래 간직할 수 있거든요. 어렴풋하나마 지닌 태고의 향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 그런 게 여기 있잖아요.
자, 한 잔 해요. 당신에게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그것’의 흔적을 위하여.
건배사로 이것보다 좋은 것이 없겠군요. 그렇죠? 해에 그을린 그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번져 들어갔다. 밤의 두로 강보다 짙었지만 파스텔 데 나타의 그을림 보다는 옅은 포르토 그림자들의 색이었다. 잃어버린 그림자가 얼굴을 덮을 만큼 길어진 밤이 오고 있었다. 낮 동안 신나게 숨바꼭질을 하던 녀석들도 밤에는 늘어져 잘 것이다.
추신: 포르토 숲에는 경계가 없다.
~
그 메모에는 묘한 이질감이 있었다.
‘페리일까?’
얼핏 살펴보아도 노트 속의 대부분을 차지한 다른 글씨 - 거의 악필에 가까운 - 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 검붉은 메모는 누구라도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반듯하게 쓰여 있으면서도 어딘지 위압적인 데가 있다. 그 글씨는 아주 옛날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에 비해 번지지 않고 선명한 잉크가 기묘한 느낌을 더했다.
오래된 비밀을 발견한 듯 가슴이 뛰었다. 흥분된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의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페리는 가게에서 나와 햇볕을 만끽하더니 한 모금 남은 비카를 털어 마셨다. 그리고 손에 있던 엉성하게 포장된 봉투를 건넸다.
“원두예요. 비카원두는 로스팅이 좀 다르거든요. 제가 사는 곳에선 구할 수 없어서 좀 샀습니다. 원래 파는 건 아니라는데 포르투 사람들은 정이 많군요. 다음에 포르투가 그리워지는 날 한 잔 합시다.”
“좋습니다.”
얼떨결에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머릿속에는 온 통 그 메모에 대해 묻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페리는 노트를 접어 안 주머니에 넣었다.
“천천히 루이스 다리 쪽으로 가 볼까요.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지만 아직 시간은 넉넉해요.”
우리는 아무 내리막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강 가에 도착하면 어디에서나 동 루이스 다리가 보인다. 그러므로 포르투에서 길을 잃기란 쉽지 않다. 포르투에서 가늠할 수 없는 것, 그것은 계절이었다. 이 도시의 소나무들은 겨울에도 하늘하늘하고 가느다란 연두색 바늘 잎을 새로 낸다.
“포르투는 몇 십 년이 지난 뒤에 와도 그대로 일 것 같습니다. 가로수 때문이라도요. 옛날 포르투는 어땠을까요?”
페리는 걸어가면서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익숙한 멜로디였다.
“O Tannenbaum O Tannenbaum Wie grün sind deine Blätter-.”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어느 나라 말인가요? 포르투갈 어는 아닌 것 같은데.”
“독일어입니다. 옛날 포르투라…. 마차가 다녔죠.... 길은 거의 비슷하지만.”
“독일 노래였군요.”
나는 페리의 유창한 언어 실력에 또 한 번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