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거기서 페리를 만나> | 포르투 편 : 5 화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 위압적일 정도로 검게 보이던 동 루이스 철교는 다가갈수록 초록빛이어서 첫인상보다 순하고 정겨웠다. 다리 위로 올라서자 아찔한 높이가 실감 났다. 모든 사람이 다리 난간 밖을 보고 있을 때, 페리는 발 밑의 철판 사이로 강을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제일 높은 지점입니다. 여기선 난간에 바짝 기대기도 쉽지 않죠. 사진 찍어드릴까요?”
다리 위에서 본 포르투, 두 절벽에 자리 잡은 도시.
루이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포르투는 더욱 원시적인 느낌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포르투의 사람들은 오랜 강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동안 꺼지지 않는 삶에의 열정을 불태워 온 것이다. 만만치 않았을 투쟁적인 현실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나는 포르투에 관한 것들을 물었고, 페리는 막힘 없이 설명했다. 그는 가끔 모든 것에 회의적인 사람처럼 말했는데, 무엇에 대한 불신인 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또 모든 것을 긍정하는 듯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어떤 것이 그의 진짜 모습인 지 헷갈렸다. 동쪽 절벽에서 서쪽 절벽으로 한걸음 씩 다가갈 때마다 해는 1초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다른 명암을 만들었고, 바람은 쉼 없이 불어 두로의 물을 다른 빛깔로 흔들었다.
“점점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석양이 본격적으로 저물어 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더라도 포르투를 찾는 사람들은 모두 이 절벽에 서서 이 석양을 기다리게 되어 있다.
“사람이 좀 적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페리는 대답 없이 미소를 띤 채 석양을 바라보았다. 괜히 못된 사람이 된 것 같아 머쓱했다. 이 지구에 사는 모두 아름다운 석양을 볼 권리가 있다. 좋은 것을 더 많이 나누는 것이야 말로 함께 행복해지는 일이 아닌가. 가장 아름다운 석양은 우리 모두가 볼 수 있어야 공평하다. 그러려면 포르투는 끊임없이 붐벼야 한다. 루이스 다리 위에서 고요를 바라면서 세상의 평화와 공의를 함께 외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사람이 훨씬 적었습니다.”
“마차가 다닐 때요?”
“그때는 뭐 다리도 없었죠.”
페리가 시계를 보는 순간 하늘의 색이 바뀌었다. 조금 더 눈을 들어 바라본 먼 하늘은 검은 보라 빛이 섞인 분홍색이 돌았다. 도시는 아직 오렌지 계열의 햇살 영역에 있었다.
“저 하늘색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오렌지 색인데…. 오렌지가 없던 시절엔 그걸 뭐라고 불렀을까….”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그곳이 페리와 처음 만난 두로 강의 마을이었음을 깨달았다. 석양이 짙어질수록 골목엔 그림자가 늘어졌다. 그것은 마치 페리의 노트에 쓰인 잉크 빛처럼 검고도 붉었다. 도시 뒤로 아직 붉은 노을의 박명이 남아 있었다. 이제 하늘은 진한 보라 빛으로 물들어 갈 것이다. 그러면 그 검붉은 메모가 말했듯 그림자들이 늘어져 쉬는 포르투의 밤이 온다. 12월 28일, 연말을 앞둔 포르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동 루이스 다리의 난간은 밤이 되어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페리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예약해 둔 레스토랑이 있어요.”
나는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면서 목적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먼저 걸었다.
페리가 안내한 가게는 메인 거리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골목에 자리 잡은 생산요리 전문 레스토랑이었다.
반짝이는 상아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홀에 비해 너무나 커다란 바에 우뚝 올라선 직원이 우리를 맞았다. 그 직원은 우리를 꼼꼼히 훑어보며 예약을 확인했다. 예약이 확인되자 지배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우리를 다시 한번 정중하게 맞은 다음 테이블로 안내했다. 말끔한 흰색 천을 깐 테이블들은 널찍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그릇과 식기, 샹들리에와 작은 꽃병까지 매우 정갈하게 닦여 있어 작은 불빛에도 영롱하게 반짝였다. 갖가지 잔과 접시, 냅킨으로 장식된 영업 전의 저녁 레스토랑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예약을 안 하면 먹을 수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텅 빈 홀을 본 몇몇 사람들이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예약 손님 명단 신원 조회를 통과하지 못해 냉정하게 쫓겨났다. 아무래도 곧 사람들이 즐겁게 먹고 마시는 소리로 메워질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메뉴 선택을 페리에게 맡겼다. 페리는 해산물이 가득 올라간 거대한 은쟁반과 알가르브 식 수프 그리고 굴을 시켰다고 설명해 주었다.
“저, 페리 마실 것은 포트 와인으로 하죠.”
나는 검붉은 잉크를 떠올렸다.
“좋습니다. 해산물이니 포르토 비앙코로 할까요?”
우리는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사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카페에서 보았던 메모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엔 포트와인에 들어가는 진한 셰리를 만드는 와이너리가 많다고 하던데요.”
일부러 셰리에 관해 물었다.
“두로 강 주변으로 오래된 포트와인 제조사들의 와인창고가 많습니다. 강변을 따라 쭉 늘어서 있었는데, 아까 봤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 만에 그 많은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투어를 하기도 하는데. 추천하고 싶진 않습니다.”
“왜요? 포트 와인에 취해서 길을 잃어버릴까 봐요?”
페리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것은 동물적인 느낌이 드는 움직임이었다. 눈치 빠른 강아지가 미묘한 주인의 표정 변화만으로도 대번에 마음을 알아맞히는. 너무 직접적이었나 싶어 일부러 다른 쪽으로 대화를 틀었다.
“그…. 포트 와인 하면, 레드가 더 맛있지 않나요? 아무래도 화이트보다는 맛도 향도 진할 것 같은데요.”
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해도 포트 와인은 다른 와인들 보다는 화이트와 레드의 차이가 덜 한 편입니다. 직접 마셔 봐요.”
페리는 내가 그 메모를 보았는지 상상도 못 하는 눈치였다.
“아까 말한 그 조각상 말인데요. 그건 정확하게 어떤 겁니까? 그걸 보라 왔는데 하필이면 없으니…. 다시 생각해 보니 참 아쉬울 것 같아서요.”
나는 공감을 통해 이것저것 알아볼 생각으로 조각상 얘기를 꺼냈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비슷한 게 있는 다른 박물관에 가면 됩니다.”
“특별한 조각이 아니었나요? 일부러 여기까지 보러 올 정도면….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까?”
페리는 대답하기 전에 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여전히 텅 빈 홀에 페리와 내 목소리만 울렸다.
“그건 말입니다. 공룡 화석을 보고 싶었는데, 무슨 이유로 갑자기 전시가 중단된 거랑 비슷합니다. 누군가 훔쳐 갔을 수도 있고, 그날 아침부터 복원작업에 들어갔을 수도 있죠. 좀 아쉽지만…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서 다른 공룡 화석을 보면 되는 겁니다. 만약 거기서도 실패한다면 이번엔 절대 옮길 수 없는 화석을 보러 가면 되죠. 거대한 바다 절벽에 남아 있는 공룡 떼 발자국 같은 것 말입니다. 확실한 것의 증거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아무래도 페리에게서 그 메모에 대한 얘기를 끄집어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갑자기 공룡을 예로 들고. 페리 공룡 좋아해요?”
“엄청 좋아합니다. 티렉스의 짧은 앞다리는 그 어떤 다른 동물이 흉내 낼 수 없는 매력 포인트죠.”
나는 대화를 더 끌어 가고 싶어 공룡의 이름들을 떠올려 보았다. 어릴 적에는 줄곧 잘 외웠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 반해 페리는 스피드 퀴즈를 맞히듯 공룡 이름을 줄줄이 댔다.
“그 목 긴 공룡 이름이 뭐 더라. 초식인데…”
“아파토사우르스요? 아니면 브라키오사우르스?”
“그 익룡 이름이…”
“프테라노돈이요.”
“코뿔소랑 비슷한 거, 그거는 트리….”
“아 트리케라톱스! 참고로 뿔 다섯 개는 펜타케라톱스.”
“대머리공룡인가? 그 박치기 공룡 있잖아요….”
“그건 파키케팔로사우르스. 아니면 스테고케라스.”
박치기 공룡의 종류가 둘이었던 것은 어릴 적에도 몰랐다. 페리는 더욱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머리에 돌기가 나 있으면 파키케팔로. 맨질맨질한 대머리 느낌이 강하면 스테고케라스입니다.”
공룡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중 얼음이 채워진 거대한 은쟁반이 등장했다. 홀 매니저의 팔에는 잘 다려진 직물 냅킨이 걸려있었다. 그는 우아하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움직임으로 은쟁반을 테이블 정 중앙에 조용히 내려놓은 다음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었다.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홀 매니저는 얇은 주름을 지으며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돌아갔다. 막 공룡 이야기를 마친 참이라 그런 지 얼음 위에 누운 커다란 털게와 새우, 조개, 거북손이 공룡의 어느 부위들처럼 느껴졌다.
“이 게살 샐러드가 맛있습니다.”
페리는 내가 손을 대기 전엔 음식을 먹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못 이기는 척 먼저 은쟁반에 손을 올렸다.
“야채 맛이 많이 나네요. 아삭아삭하고. 중간중간 게살 맛이 나긴 하는데 도무지 어디를 씹으면서 게 맛을 느껴야 할지 예상할 수 없는 느낌이랄까….”
페리는 내가 거북손을 집어 들어 능숙하게 껍질에서 살을 빼는 모양을 보고 있었다. 잘하려고 하니 거북손 살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포르투의 바다나 한국 바다나 거북손은 똑같은 줄 알았는데, 여기 것은 잘 안 까지네. 요런 녀석을 바위틈에서 잡으면 정말 재밌는데.”
“페리, 그거 알아요? 이 녀석들을 떼어내려고 살짝 힘을 줘서 당기면 은근히 바위에 찰싹 붙거든요. 그러다가 조금 더 힘을 주면 어느 순간 뽁- 하고 떨어집니다. 작은 빨판을 떼어내는 느낌이 들죠.”
채집하는 순간의 쾌감.
살아있는 고동은 모든 힘을 다해 붙어 있으려 했을 것이다.나는 손가락 두 개 만을 이용해 그 녀석을 떼어낼 수 있다. 일부러 느슨하게 당기면 기회다 싶어 더욱 찰싹 달라붙는 악착같은 고둥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 없다.‘손맛’이란 단어가 조금 잔인하게 느껴졌다. 살아 있는 것들이 몸부림치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다른 생명체.
“수렵이든 채집이든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에게는 기쁜 일입니다. 잡아 먹히는 쪽은 전혀 그렇지 않겠지만, 별 수 있나요. 맛있어서 그러는데.”
나는 거기에서 생각을 멈췄다.
“살아 있던 것들은 모두 끈적거려요. 생애의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페리는 그런 집착을 경멸하듯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 말을 들은 순간이 없었던 일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페리는 분명 혼자만 괴롭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내게 미룬 것이 분명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크바시르의 머리로 담근 걸쭉한 잔[1]을 기울인 것이다. 앞으로는 쑥을 뜯거나 잡초를 벨 때조차 배어 나오는 끈적거림을 씻으려 화장실로 달려가야 할 운명이 되었다. 두리우스[2]의 그물 모양을 한 뉴런들의 시냅스 사이에서 불쑥 ‘그 메모’의 한 줄이 튀어 올랐다.
‘태고의 희망을 간직한 포트 와인, 당신에게 남아있을지 모르는 ‘그것’의 흔적을 위하여.’
말을 멈춘 내게 페리가 보여줄 게 있다는 듯 레몬수에 젖은 손을 닦고 지갑을 열어 카드를 하나 꺼냈다.
“멘사? 페리 멘사카드가 있어요?”
“네, 멘사카드가 있죠.”
“우와, 이거 아이큐 엄청 높아야 되던데. 이런 사람이 있구나….”
페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미있다고 웃어 댔다.
“사실 이건 독일 대학 식당 카드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걸 보고 다 멘사? 하더라고요. 사실‘멘자’라 읽어요.”
정확히 무슨 말인 지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아서 카드를 다시 자세히 보았다. 엷은 파란색 명암 무늬를 뜯어보니 보일 듯 말 듯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혹시 이거 하나 더 있어요? 돌아가면 멘사회원이 됐다고 하게요.”
“제가 다니던 대학교 식당은 금요일이 생선의 날이었습니다. 피쉬데이가 되면 억지로라도 생선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날 메뉴는 인기가 없죠. 오랜만에 맛있는 해산물 식사를 했더니 그 시절이 떠오르는군요. 언젠가 시간 되면 한적한 금요일 식당에 같이 가죠? 이 멘사 카드를 들고요.”
나는 지금보다 더욱 앳된 페리가 학생 식당에 줄을 선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즈음의 페리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페리 혹시, 옛날 사진 같은 것 있나요? 왠지 그때의 페리가 궁금한데요.”
페리가 코를 찡긋하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쉽게도 없습니다. 그때도 지금이랑 비슷했습니다. 애늙은이 같단 얘길 많이 들었거든요.”
우리는 높은 선반 위에 서서 고블린 은행지기처럼 우리를 굽어보는 식당 지배인에게 저녁 값을 치르고 나왔다. 페리는 기분 좋았는지 팁을 후하게 계산했다. 그리고 팁만큼의 거스름돈을 자기 몫에서 빼고 팁을 계산하지 않은 만큼의 거스름돈을 돌려주었다.
“팁을 그렇게 많이 줄 필요가 있나요? 뭐 기분 내키는 대로 긴 하지만요.”
좀스러운 마음을 들키는 가 싶어 뱉자마자 후회했다. 페리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짓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어두워진 골목길을 돌아 나왔다.
아직도 몇몇 식당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군밤 장수들의 화로에서 어마어마한 연기가 치솟았다. 오래전 역 앞을 가득 메우던 군밤연기 같았다. 여행이란 경험해 보지 못한 미래를 만나게도 하고 잊어버린 것 같은 과거의 어떤 날을 무심히 눈앞에 펼쳐 놓기도 한다. 팽팽하던 눈가가 풀어지는 기분이 들어 싫었다.
“여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이라 불리는 포르투 중앙역입니다. 들어가 볼래요?”
우리는 포르투 중앙역 앞에 섰다.
페리의 머리 위로 군밤 화로에서 나온 연기가 뭉글뭉글 올랐다. 왠지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처럼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시야가 뭉겨지고 주변의 소리만 남았다. 저녁때 마신 포트 와인 때문인 지 오늘과 미래 그리고 과거의 시간이 동시에 떠오르는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중앙역 내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소리로 활기가 가득했다. 미학적 역할보다 삶의 현장으로써 역할에 더욱 충실한 역. 누군가 서둘러 군밤 한 봉지를 사더니 열차를 향해 뛰었다. 아름다운 아줄레주 작품을 감상하려 우뚝 선 관광객들을 요리조리 피해 뛰는 모습이 능숙했다. 페리는 구석에 서서 바쁘게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 다운 역이 맞는 것 같습니까?”
“이 커다란 작품들이 예쁘긴 한데…. 가장 아름답다는 소문 때문에 오히려 실망스러운 느낌이 있네요.”
페리가 뒤돌아 역을 나서며 말했다.
“아침에 보면 또 마음이 달라 질지도 모릅니다. 아줄레주는 햇볕이랑 가장 잘 어울리거든요. 그림자 하나 지지 않도록 밝은 해가 비치면 진가를 발휘하니까요.”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이란 말을 한 건.”
무심코 뱉은 말에 페리가 멈춰 섰다. 그러더니 소리를 내며 해맑게 웃었다.
“맞는 말입니다. 그림자가 없어야…. 그래야 해가 비치는 정면에서 이 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군요. 정말 좋은 말이에요.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라도. 아줄레주만큼은 누구보다 잘 감상할 수 있어요!”
나는 그림자에 관한 그의 노트 속 메모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페리의 얼굴에 떠오른 그리움의 빛을 꺼뜨릴 수 없어 그만두었다. 단지 여행 동행을 하는 처지에 그런 순간을 방해하는 건 매너가 아니니.
포르투의 밤은 매우 붐볐다.
거리에서 음식을 파는 모습이나, 밤이 깊어 갈수록 붐비는 맥주 집, 휘황하게 돌아가는 관람차,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빵집에서 빵을 사거나 먹는 사람들, 길가에 늘어선 택시, 어느 가게에서 들리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노래. 나는 루이스 다리의 그림자가 지는 조용한 두로의 야경을 보고 싶었다.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처럼 신난 페리를 이끌고 내리막 길을 걸어갔다. 찬란하게 빛을 뿜는 가게를 지나니 몇 개의 골목이 나왔다. 분명 도시의 야경 역시 그 다리에 묶여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골목을 골라 내려갔다.
“저 가게 신기하지 않아요?”
별 대답을 않자 호기심을 일으키고 싶은 지 집요한 투로 물었다.
“저 가게에서 뭘 파는지 압니까?”
나는 관심 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마 기념품이겠죠?”
그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건 통조림 가게입니다. 오징어, 대구, 새우, 청어, 가오리…. 이 바다에서 잡히는 모든 생선 종류가 다 있죠. 아, 갈치 통조림도 있었던가? 장어 통조림도 있던 것 같고.”
오렌지 빛 불을 가득 켠 그 상점이 밤의 포르투에서 가장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오늘 저녁은 생선 이야기로 풍성하군요. 예쁜 생선 통조림이라니, 조금 신선합니다.”
조금 관심을 내비치자 페리가 다시 점잖은 목소리로 묘사를 이었다.
“페리스 휠에 달려 돌아가고 있는 게 뭔 지 압니까?”
“설마, 통조림?”
“그렇죠! 정답!”
형형색색의 아르누보 글씨체에 앙증맞은 빈티지 디자인 생선그림이 아롱진 캔들이 관람차에 매달려 돌아간다. 그러나 나는 그 앞을 매우 매정하게 지나쳤다. 이 도시를 방문한 모든 사람들이 가는 가게다. 낮에 렐루서점을 포기한 뒤로, 사람이 많은 곳을 미련 없이 지나치고 싶은 자존심이 생겼다.
드디어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이 오래된 돌길을 비췄다. 나무에 맺힌 귤들이 그 빛을 반사해 사방은 온통 오렌지 색 필터를 댄 사진 같았다. 골목은 비록 버려진 듯 보여도 화사한 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페리가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왜요 페리, 무서워요? 겁이 많은데요.”
수상쩍은 눈으로 방금 돌아 내려온 모퉁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페리를 따라 덩달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뭔 데요? 누가 따라옵니까?”
“겁이 많은데요? 고양이나 너구리인가 보죠. 그런데, 여기로 내려가면 뭐가 나옵니까?”
“나는 페리가 아무 말 없이 따르길래 뭐가 나오나 했죠…. 그런데 길을 잃은 걸까요?"
“길을 잃으면 어때요. 뭐라도 나오겠죠. 내려가 봐요.”
페리가 앞장섰다. 나는 괜히 뒤통수가 당겨서 뒤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가로등 밑으로 그림자가 휙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메모 때문에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게 확실했다. 대수롭지 않은 척 급히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정수리를 비추며 차례차례 멀어져 갔다. 버려진 높은 담 들 이 촘촘하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나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아, 다시 강이 나오는군요.”
환한 불빛을 향해 서둘러 나왔다. 동 루이스 다리 밑으로 포트 와인을 선적했던 옛날 배들이 매여 있었다 낭만적인 감상이 드는 오래된 풍경이다.
“이 배들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요?”
“모든 사물에는 수명이 있는 법이에요. 박물관의 유물들을 보다 보면 차라리 흙이 되어 바스라 지길 바라는 듯한 것들이 종종 있지요.”
나는 왠지 자꾸만 그림자를 확인하고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있어야 할 그림자가 없어 놀랐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가니, 그림자는 두로 강 위에 있었다. 강이 계속 움직여 그림자가 일그러졌다.
“페리, 포트와인 한 잔 더 할까요? 날씨도 좋고, 이대로 들어가긴 아쉬워서요.”
우리는 두로 강 변에 마루를 낸 바에 앉았다. 우리는 토니와 루비를 주문했다.
“포르토의 셰리에는 무슨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페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밤에 보니 루이스 다리는 에펠탑이 누운 것처럼 보이는군요.”
나는 포트 루비를 닮은 그 검붉은 잉크를 떠올리며 고대 도시의 술맛을 상상했다.
“끝없이 여행해야 하는 인생과, 여행을 결코 떠나지 못하는 인생 중에서 골라야 한다면 페리는 어느 쪽을 고를 겁니까?”
페리가 잠시 숨을 골랐다.
“한 번이라도 떠난 사람은 그리움이 한이 됩니다. 끊임없는 여행은 피곤한 법입니다. 어느 순간부턴 어디를 가나 다 똑같이 보이거든요. 차라리 어디로도 떠나지 않고 인생을 끝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며 슬픔을 무덤까지 가져가리….”
좋아하는 구절이 떠올랐다.
“전 별 고민 없이 이런 자유로운 여행을 실컷 하다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행의 끝. 누구나 언젠간 여행을 끝내고 반드시 그의 무덤에 도착해야 하는 겁니다. 늘 그게 문제죠.”
알 수 없는 나무 향이 섞인 향긋한 두로의 밤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졸음이 밀려왔다.
호텔 앞에는 롤렉스사의 간판을 꾸민 화려한 공작새 모양의 램프가 휘황찬란한 불빛을 내며 번쩍거리고 있었다. 고즈넉한 도시의 사람들에게는 저런 램프가 구경거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지났음에도 캐럴이 흘러나왔다. 야경을 보고 싶어 창가 방을 골랐으나 번쩍이는 램프의 불빛과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캐럴에 묵직한 나무 덧문을 닫아 버렸다. 시침이 자정을 넘었다.
“설마 밤새 저럴까?”
어쩔 수 없는 것 때문에 기분 좋은 여행의 밤을 망칠 순 없었다.
‘좋아.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이라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샤워를 하자. 누구나 즐거울 권리가 있어. 저 공작새와 캐럴이 몇몇 사람들에게 행복을 준다면….’
작은 스탠드만 켜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높이 달린 커다란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여행의 피로가 씻겨 내려갔다. 페리와는 내일의 계획에 대해 의논하지 않고 헤어졌다. 아침에 로비에서 만나자는 막연한 약속을 했지만 페리가 나를 피해 도망갈 것 같지 않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까끌까끌한 듯 부드럽고 찹찹한 시트가 발등에 닿았다. 공작새가 부르는 캐럴을 자장가 삼아 기분 좋게 잠들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세수도 하지 않은 채로 남이 내린 따뜻한 커피를 입에 넣는 행복을 만끽했다. 방 문 앞에 준비된 아침 식사가 차려진 작은 식탁을 끌고 들어와 덧문을 연 창가에 놓고 소파를 끌어다 앉았다.
[1]
Kvasir 북유럽 신화의 지혜의 신
[2]
Durius 두로 강의 신
성게의 말: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5화가 업로드되었습니다. 벌써 반이나 왔네요. <거기서 페리를 만나> - 포르토 편은 총 10화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연말의 포르투에서 계속 되는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FOR THE HAPPY FEW! 읽어 주시는 분들께 기쁜 인사를 전합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