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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세하를베스의 기묘한 오후

소설 <거기서 페리를 만나> | 포르투 편 : 7 화 

by 성게 Dec 0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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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빌라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늘어선 오포르투의 동네길을 걸었다. 햇살에 바닥이 하얗게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타일을 바른 알록달록한 담장들. 빨간 공중전화 부스와 커다란 초록 네온사인을 건 약국이 나타났다. 주렁주렁 황금빛 열매가 맺힌 귤나무와 빤딱빤딱 빛나는 두꺼운 이파리의 관목들 사이로 페리의 회색 코트가 보였다. 그는 작은 파이 가게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리 이거 또 먹으려고요? 단 걸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은데.”


유리문 안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이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노트북은 대체 언제까지 노트를 대체하지 못할 는 지 학생들의 가방마다 종이와 책, 노트, 필통으로 불룩했다. 그러고 보면 페리는 언제나 차림이 가벼웠다. 가방 하나 없이 휴대폰과 문제의 검은 노트, 그리고 뚜껑 달린 연필이 전부였다. 이어폰을 꺼낸 적도 없다. 페리는 언제나 조용히 걷고 가만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었다. 


“하나 먹겠어요?”


“아니요.”


“여기 것은 조금 더 담백한 맛입니다. 생지 맛이 상큼하고 고소해요.”


상큼하고 고소하다는 말에 완전히 넘어갔다. 페리가 남은 파이를 건넸다. 배가 매우 불렀지만 파이를 하나 다 먹었다. 이 파이를 먹지 않으면 골목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좋은 집들이 많군요. 수영장이 딸린 거대한 빌라도 많고요.”


내 것이 아닌 이 수많은 고급 집들을 할 일 없이 지나가는 처지가 갑자기 불만스럽게 느껴졌다. 


“그러게요. 여긴 어느 골목이나 해가 잘 들어서 집짓기 좋겠습니다.”


페리는 그저 눈을 껌벅거리며 해가 잘 드는 모든 포르투 땅을 칭찬했다. 좋은 땅이 넘쳐나는 이 넓은 지구에 아직 내 집 하나 없다니 마음이 갑작스러운 패배감이 들었다.


“저기가 정문이에요.”


그는 햇볕에 찬란하게 반짝이는 고급 빌라와 수영장이 딸린 집의 광고문, 부동산 전화번호를 볼 때와 똑같은 눈으로 두툼한 이파리, 귤, 교회의 지붕을 바라보았다.


“유칼립투스 나무 냄새 맡아본 적 있어요?  벌써 코가 뚫리는 것 같군요.”


페리는 식물원처럼 보이는 넓고 붉은 토양이 카펫처럼 깔린 거대한 대문으로 꺾어 들어갔다. 높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자. 미술관 숲에 도착했습니다. 혼자 시간을 갖고 싶다면 그래도 돼요.”


왁스를 바른 듯 겨울에도 손바닥 만 한 초록 잎들이 가득한 커다란 나무 앞에 서 있던 페리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정문 오른편으로 공간감 있는 건물이, 왼편으로는 바람이 불어오는 숲길이 나 있다. 그는 검은 노트를 꺼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페리는 전에 없던 흥분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이곳에 무언 가 할 일이 있어 왔음을 알아챘다. 몰래 페리를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요? 그럼…. 한 한 시간쯤 뒤에 볼까요?”


페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 시간이요? 그건 너무 짧습니다. 여기 안에는 카페도 있으니까. 다 돌아본 사람은 거기서 기다리기로 하죠.”


“그렇지만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리고 있기에는….”


“그럼…. 숙소로 각자 돌아갈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생각하는 척 눈치를 살폈다. 나를 떼 놓으려 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페리는 아무 미동 없이 갈색 눈동자를 들어 여기저기 난 길을 살폈다.


"기다리죠 뭐. 페리는 여기서 무슨 할 일이 아주 많은 것 같습니다.”


태연하게 매표소 쪽으로 먼저 걸어갔다. 페리가 금세 뒤따라 와 유리문을 열었다.


“빌라 정원에 구석구석 전시된 작품이 많습니다. 전시실이나 영화 같은 걸 보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거든요.”


결국 매표소 앞에서 표를 끊고 헤어졌다. 나는 화장실에 들른다는 핑계를 댔다. 페리는 회색 코트를 맡기려 코트룸으로 가더니 코트 속에서 검은 노트를 꺼냈다.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지만 결국엔 같은 방에서 계속 만나고 헤어졌다. 앞 방에서 헤어졌던 페리는 커다란 거울과 우주 행성들의 궤적이 교차하는 작품 계단에 앉아 있었다. 손에 쥔 노트를 보는지 시선이 아래를 향해 있었다. 페리의 표정이 궁금해 살짝 돌아 그를 비추고 있는 커다란 작품의 거울 속을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골똘한 뒤통수를 하고 있었다. 역시 무릎 쪽으로 내려간 손에 들린 노트를 보고 있다. 조금 더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페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당황한 나는 재빠르게 작품 쪽으로 돌진했다. 페리는 작품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거기에 비친 허둥대는 자신을 발견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작품을 향해 돌진했기 때문에 미술관 안내원이 급하게 따라와 조심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아, 작품을 좀 자세히 보고 싶어서요.”


민망해 고개를 숙였다. 페리는 내게 손을 흔들고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놓칠 수 없었다. 안내원이 불안해하며 주시하고 있었지만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커튼이 처 진 어두운 전시실 몇 개가 동시에 펼쳐졌다. 결국 페리는 나를 따돌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연말연시에 미술관을 찾는 문화라도 있는지 건물 전체에 작품을 관람하려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꼭 학기말 전시장 같았다. 아이들과 어른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함께 모여 소감을 내느라 소란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커튼이 처진 어두운 방을 빠른 걸음으로 관람했다. 수많은 방을 누비며 어딘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 페리를 찾는 일은 어려웠다. 


12월 마지막 주, 연말이란 홀로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다. 


북적거리는 한국의 연말을 피해왔는데 여행지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서운할 정도로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소리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 졌다. 




지하를 포함한 다른 층의 전시실을 샅샅이 뒤졌지만 페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밖으로 나간 것이 분명했다.


“유칼립투스! 마노엘이 그 얘길 했지. 이 빌라의 정원엔 아마도 그 나무가 있을 거야.”


붉고 고운 토양이 깔린 정원으로 나갔다. 아무리 파내도 색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붉은 대지에 들어서자마자 향긋하고 상쾌한 냄새가 풍겼다. 페리는 이 길을 통해 유칼립투스 나무로 갔을까. 페리가 포르토에서 굳이 이 유칼립투스를 찾는 이유는 뭘까. 


그는 보통사람처럼 걸어 다니다 가도 보통 사람들이 지나쳐 버리는 것을 본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소박하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런 페리에게 탐욕스러운 경고문 같은 그 핏빛 글씨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더 깊은 정원으로 가는 길엔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붉은 삽이 나타났다. 붉은 토양에 깊인 박힌 빨간 삽은 마치 이 대지에 있는 비밀을 캐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 같았다. 몇몇 아이들이 커다란 삽으로 뛰어와 감탄사를 질렀다. 정원 구석에 난 작은 샛길로 접어들었다. 겨울에도 빽빽하고 딱딱한 푸른 잎이 자라는 나무로 울타리를 친 새로운 정원이 펼쳐졌다. 그 정원 너머엔 겨울 해를 듬뿍 받고 서 있는 핑크 빛 빌라가 서 있었다. 분홍 돌고래가 떠오르는 그 빌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점 더 향긋한 냄새가 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장미 빛 빌라는 그림자가 지지 않는 붉은 토양의 한가운데 있었다. 뒤 쪽으로 작은 관목을 손질한 미로 정원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햇살을 막지 못했다. 빌라를 따라 둘러진 흰색 모래가 햇살에 더욱 반짝였다. 따뜻한 햇살이 덥혀져 부드러운 홍조를 띤 듯한 빌라 내부로 들어섰다. 베이지색 대리석으로 꾸며진 내부는 파도 아래 밝은 모래 바닥이 물결무늬로 나눠지는 바닷속 같았다.


안내원들은 커다란 유리문 밖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잔한 빙하 호수 빛 분수의 끝이 보였다. 커다랗고 검은 화려한 철문을 지나 안으로 계단을 올랐다. 넓고 얕은 계단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무릎을 많이 올리지 않고도 우아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것이었다. 위로 오를수록 점점 더 밝아졌다. 물속에서 밖으로 나올 때처럼 맑은 햇살이 흘러내렸다. 잘 닦인 유리문 안에서 넓은 정원과 분수를 바라보았다. 페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방향으로 난 창문을 찾기 위해 다른 문으로 들어섰다. 닫힌 문을 열자 온통 핑크 빛대리석으로 꾸며진 풍만하고 육중한 욕실이 나타났다. 세면대와 욕조, 바닥, 기둥이 모두 같은 곳에서 떼어 온 핑크 빛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반사된 햇볕에서도 붉은빛이 돌았다. 현실감 없는 욕실에서 보이는 창밖을 살폈다. 어디를 가도 분수가 보였기 때문에 빌라의 창이 어디로 어떻게 나 있는지 가늠할 수 없어 기묘했다. 해가 분수 끝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가 서쪽이리라 짐작했다. 


정원에는 한 갈래 한 갈래 바람에 뻗치며 나부끼는 성긴 나무들과 얇고 여린 잎을 가진 부드러운 소나무, 반짝거리는 두꺼운 잎을 가진 남방 잎나무들이 보였지만 정원에서 떨어진 숲에는 드문드문 앙상한 가지를 내민 나무들이 있었다. 파릇파릇한 포르투 역시 겨울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잘 가꿔진 도심의 나무들과 달리 야생의 숲은 계절을 치르고 있었다. 


새들이 분수의 잔잔한 수면을 부쉈다. 기울어가는 겨울 해의 황금빛이 반사됐다. 창 밖으로 붉은 흙을 가볍게 밟으며 페리가 지나갔다. 그는 검은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서둘러 빌라를 지나갔다. 재빨리 1층으로 뛰어 내려가 유리문을 밀었다.


“그 문은 열지 않습니다.”


불쑥 나타난 안내원이 주의를 주었다. 어쩔 수 없이 반대편으로 난 문을 통해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해가 빛나는 쪽에 분명 분수가 있다. 가로막힌 나무 울타리 때문에 방향이 헷갈렸다. 정원을 헤매다 다시 분수를 발견했을 때, 페리는 이미 어디론 가 사라지고 없었다. 화하고 향긋한 냄새가 더더욱 진해졌다. 곧 나무 꼭대기들을 연결한 공중 테라스가 나왔다. 구경이나 해 보자는 생각으로 테라스에 들어섰다. 지중해 소나무를 연결한 테라스에는 포르토의 숲에 자생하는 나무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발을 내딛을수록 테라스는 지상에서 높아졌다. 바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목구멍 안 까지 달큼하게 적시는 화한 향기가 진동했다.


유칼립투스 나무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가야 그 나무를 발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코알라가 좋아한다는 그 나뭇잎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아마도 그것이 페리를 찾을 수 있는 열쇠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껏 나무에 관심이 없던 나는 유칼립투스가 눈앞에 있다 해도 알아볼 수 없다. 


아주 멀리 포르토의 오렌지색 지붕들이 보였다. 빽빽한 풍경, 도시의 북적임이 주는 익숙한 향수. 먼 곳으로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감사할 거리를 찾게 된다.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지긋지긋할 정도로 낭만적이었던 일상을 발견한다. 나는 그것 때문에 계속 여행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페리에 대해 느끼는 편안함은 그것과 상관이 있을까. 그에게서 이 도시의 낯설고도 익숙한 북적임을 느꼈다. 페리는 그 무엇도 낯설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어떤 골목 앞에서도 두리번거리지 않았고, 귤나무의 종류와 계절마다 몰려오는 다양한 파도, 그리고 유칼립투스를 알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딘 가에서 돌아오듯 걸었다. 






공중에 떠 있는 테라스를 반쯤 넘게 걸어 큰 나무에 진 그림자가 떨어지는 곳에서 웅크린 페리를 만났다. 그는 바닥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줍고 있었다. 진하고 화한 냄새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페리, 페리 맞죠? 뭐 하는 겁니까?”


“생각보다 더 금방 만났습니다.”


“뭘 줍는 거예요? 나뭇잎인가?”


페리는 길쭉하고 빳빳한 이파리들을 모으고 있었다. 연신 잎을 코에 대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냄새 좋죠? 집으로 가져가도 향이 꽤 오래가죠. 렙터 발톱 같지 않나요?”


멀찍이 아찔한 숲이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 바닥에는 수양버들 잎을 닮은 날렵하고 빳빳한 나뭇잎이 온통 떨어져 있었다.


“이게 유칼립투스예요? 겨울인데도 꽃이 활짝 폈네요.”


페리는 노트 사이에 잎을 모아 끼웠다.


“코알라 입에서는 아마 괜찮은 냄새가 날 거예요.”


그는 환하게 웃었다.


“유칼립투스는 냄새가 강해서 어디 에든 잘 배죠. 포르투갈 와인 중엔 유칼립투스 향이 나는 와인도 있어요. 그 와이너리의 포도밭에는 포도밭을 둘러싸고 유칼립투스 나무가 가득 자랍니다. 주인 말로는 포도주를 숙성시킬 때 유칼립투스 향이 배는 거라고 하더군요.”


페리는 노트를 꼭 쥐고 있었다. 장난처럼 노트를 홱 빼앗아 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구경은 좀 했어요?”


“페리는 뭘 했습니까? 처음부터 여기에만 있었던 건 아닐 것 같은데.”


노트 쪽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페리를 찾기 위해 이 넓은 미술관을 뛰어다녔다고 할 수는 없었다.


“독일의 린덴바움 숲은 빽빽하고 딱 떨어지는 경계선을 만듭니다. 여기 유칼립투스들과 비교하면 철옹성 같은 그림자를 만드는 어두운 숲이죠. 이곳의 유칼립투스들은 아무리 많아도 반드시 듬성듬성 엉성한 그림자를 만듭니다. 누구나 두려워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밝은 숲이라고 할까요. 나중에 비행기가 이륙할 때 포르투의 숲을 봐요.”


숲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다. 한국에는 경사진 산이 땅의 경계를 만든다. 나무들의 모양 때문이 아니라, 솟은 높이가 뚫을 수 있거나 없는 경계를 만들었다. 산 봉우리가 아니라 숲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땅들의 모양. 페리가 생각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페리는 이제 나를 따돌리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다음 길에 보이는 아무 빌라에 들어갔다. 한 남자가 레트리버를 사자라고 우기자 마침내 레트리버가 우렁찬 사자 울음을 우는 영상 작품이 상영되고 있었다. 화장실 채광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근사했다. 공간이 빛으로 가득 차오르는 충만함. 빌라 안에 이처럼 멋진 방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관람객이 없는 커다란 빌라의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아무 표시 없이 잠겨 있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낡은 가구들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길게 누운 오래된 가구의 그림자들이 가득한 그 방에서 나는 내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창 밖으로 하얀 이가 시원한 미소를 띤 사람이 언뜻 지나갔다. 어디에선 가 만난 적이 있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처음 본 외국인들은 모두 닮아 보였다. 안내원이 들어왔다.


“미스터, 여기는 들어오면 안 됩니다.”


그가 방 문을 열어 바깥으로 안내했다. 페리는 빌라 밖에서 유칼립투스 잎 하나를 코에 댄 채 냄새를 맡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페리의 손 어디에도 노트가 없었다.


“페리, 노트 어쨌어요? 어디다 두고 왔어요?”


페리는 그제야 노트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나는 빠르게 2층 필름 전시실로 뛰어 올라갔다.


“미안합니다. 잃어버린 게 있어서!”


거의 소리를 지르며 전시장 커튼을 열었다. 


고요하고 어두운 전시장에는 같은 필름이 상영되고 있었다. 벽을 따라 띄엄띄엄 높인 전시실에서 의자를 더듬었다. 바닥에 가느다랗고 따끔한 무언가 가 걸렸다. 화한 냄새가 났다. 유칼립투스 잎이었다. 그 주변에 펼쳐진 검은 노트가 있었다. 최대한 많은 잎을 모아 노트에 차곡차곡 담았다.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당신 발아래 떨어진 잎을 줍는 것을 도와주었다.


“고맙습니다.”


노부인은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괜찮아요. 어서 일어나요.”


할머니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곤 활짝 웃었다. 나는 내가 이 노트를 잡았기 때문에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다.


“시라는 건 아무도 없는 교회당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그런 기분 같은 거야.”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 지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필름을 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필름 속 장발의 배우가 자신을 노려보는 짜증스러운 무리를 외면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페리는 출구 커튼 앞에 서 있었다.


“이건 페리 거잖아요.”


나는 노트를 페리의 손에 넘겼다. 페리가 유칼립투스 잎을 하나 건넸다. 코에 직접 대니 부드럽고 달콤하면서도 더욱 은은하고 진한 냄새가 났다. 계속 맡고 싶은 향기. 페리가 왜 그렇게 코에 가져다 대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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