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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에서 아침을

소설 <거기서 페리를 만나> | 포르투 편 : 6 화

by 성게를 이로부숴



‘그것은 악몽이었을까?’


간밤에 꾼 꿈이 문득 떠올랐다. 검고 붉은 기운이 도는 어떤 것이 줄곧 그림자 같은 간격을 유지하며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뛰어도 멀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위협적으로 가까워 지지도 않는. 꿈에서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 무덤덤한 기분으로 내버려 두었다. 덜 말린 채 잠들어 군데군데 뻗친 머리도 괜찮아 보일 지경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거실을 빠져나가듯 호텔 로비를 통과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역시 페리는 도망가지 않았다. 포르투의 아침공기를 들이마셨다. 봄 같은 햇살로 가득한 12월의 마지막 주. 불 꺼진 공작새는 전깃줄이 훤히 보여 깃털인 지 꼬리 인 지 알아볼 수 없도록 흉측했다.






우리는 바닷물로 그린 듯 부드러운 푸른 아줄레주가 반짝이는 카타리나 성당 쪽으로 난 내리막 길로 간다. 서쪽 대륙 끝에서 갓 잡아 올린 오늘의 메뉴들이 레스토랑으로 배달되고 있었다. 커피 바와 빵집의 쇼케이스마다 갓 구운 파스테이 데 나타들이 가득 채워졌다. 아침으로 그 동그랗고 보드라운 파이를 하나씩 먹었다. 군것질을 손에 들고 길을 걸으니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카타리나 성당의 푸른 성모가 아침 햇살에 부드러운 명암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소박하고도 청초한 물빛 그림자. 러스킨이 아낌없는 애정을 담아 찬사를 보낸 아미앵 성모의 미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 사람도 모든 걸 다 보고 떠난 건 아니니까.”


미세한 금빛 가닥들이 유약을 입혀 구운 투명한 물빛 타일을 통과했다. 이른 아침 파도 속에서 갓 건진 동글동글한 유리 조각 같았다. 페리는 눈이 부신 지 반쯤 눈을 감고 걷고 있었다. 두로 강으로 가는 마지막 내리막이 활짝 열린 골목에서 페리는 더 내려가지 않고 오른쪽 길로 틀었다.


“페리 어디 가요? 강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전차 타러 갈까요?”


볼사 성을 지나 펠리페 2세의 동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름 없는 아담한 아줄레주 성당을 지났다. 같은 여행지라 할지라도 어느 쪽으로 걷고, 어떤 골목을 선택하는 가는 지극히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나는 페리를 따라 걷는 길이 마음에 들었다.


페리는 이번에도 일생일대의 낭만을 즐기기 위해 조급해하는 관광객들을 먼저 전차에 태웠다. 덕분에 맨 마지막으로 전차에 올랐다. 가장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들은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전차가 달리는 동안 왼쪽 창으로 두로 강이 보였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뒤 쪽 조종석 창으로 웅장한 도시의 서쪽 벽들이 흩어지며 멀어져 갔다.


“저건 베드로 교회예요.”


회색 빛 절벽을 모양대로 도려낸 것 같은 교회는 이 도시의 벽을 지키는 굳건한 성문처럼 보였다. 가죽 끈에 달린 금색 종으로 정차를 알리는 오래된 전차는 파쎄오 알레그레를 향해 운행 중이다. 어떤 곳인 지 전혀 알 수 없이 그저 간다. 여행의 설렘이 밀려왔다.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페리는 그저 말없이 강 쪽 언덕을 바라보았다.


“이 길은 아마 고속도로나 국도로 나가는 길이 있는 지점인가 봅니다.”


'Passeo allegre' 파쎄오 알레그레란 이정표 앞에서 넌지시 넘겨짚어 보았다. 페리는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것도 말이 되네요. 패스는 길이 되고 알레그로가 붙은 음악은 대부분 빠르니까요.”






우리는 가장 마지막으로 전차에서 내렸다.


오포르투라는 작은 항구 마을. 두로의 강물이 마침내 거친 대서양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펜스 없는 방파제로 몰려드는 성난 물보라가 일었다. 검게 물든 거대한 바위들 군데군데 바다가 손을 짚은 자국이 선명했다. 바닷가 테라스를 따라 걷다 보니 잘 구운 비스킷 색 바위들이 솟은 거대한 해안선이 펼쳐졌다. 물수제비 실력으로 커피 내기를 했다. 연습 없이 치러졌기 때문에 기본기에 승패가 좌우되는 시합이었다. 페리가 간단히 이겼다. 그런 건 자주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탱글탱글 한 잎을 자랑하는 붉은 동백과 노란 나리과의 식물들, 화창한 연두색 덩굴들이 어우러진 해변 테라스는 마치 봄 같았다. 포르투에서는 자꾸만 겨울임을 잊게 된다. 페리는 회색 코트를 벗어 오른손에 끼고 걸었다.


페리가 노트를 꺼내 무언가 찾더니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자잘한 자갈이 깔린 해변 바닷가에 바로 테라스를 낸 레스토랑이 있었다. 원목으로 마루를 넓게 깐 2층 테라스를 얹은 운치 있는 건물은 흰색 천으로 만든 파라솔이 드리워져 초여름 분위기가 났다.






아무 음악 없이 파도 소리로 채워진 테라스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페리처럼 메뉴를 보지 않고 비카를 주문했다. 곱슬머리를 길러 묶은 멋진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주문을 받았다. 페리는 비카에 설탕을 넣어 마셨다. 나도 설탕을 넣어 보았다. 씁쓰름한 뽑기 맛이 났다. 커피 잔을 비우고 별말 없이 감상에 잠겨 각자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침 레스토랑인데 2층으로 옮겨 밥을 먹을까요?”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열어 별 점을 확인하려 레스토랑 이름을 찾았다.


“어차피 먹을 건데 알아서 뭐 합니까. 그냥 맛있게 먹죠. 실패하면 또 어때요.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추억이 될 거예요. 그리고 카타플라나 맛은 제가 보증합니다. 이렇게 하죠. 절대 실패할 리 없으니 걱정 말아요.”


페리는 이번에도 메뉴를 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카타플라나를 찾기 위해 고집을 부렸다. 페리는 먼저 계단을 올랐다. 곧 반들반들한 지중해 관목을 보느라 멈춰 섰다.


“애초에 낮인데 별 같은 걸 보고 미래를 알 순 없잖아요. 낮 동안엔 뭐든 이렇게 잘 보이고요.”


문득 꿈속에서 나를 따라다니던 것이 내가 바라보던 별을 몽땅 삼켜버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전 마노엘이에요. 어서 와요 친구!”


거의 페리만 보고 이야기하던 마노엘이 내게 고개를 돌려 전채 요리를 권했다.


“오늘 아침 들어온 신선한 굴이 있습니다.”


식욕을 돋우는 빵에 버터와 토마토크림, 마늘크림을 바른다. 바닷바람이 눈부신 햇살을 식힌다. 겨울에도 너울대는 야자수 잎. 파도는 푸르고 코앞에서 자갈 쓸려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해초와 보라색 샬롯, 빨간 파프리카 조각이 올라간 굴이 나왔다. 마노엘은 굴 하나당 4등분으로 쪼갠 커다란 레몬을 넘치도록 짜 뿌렸다.


“너무 실 것 같은데….”


나는 그저 설렁설렁 레몬을 뿌렸다.


“생각보다 안 십니다. 갈증이 싹 가시는 맛이죠. 레몬즙을 더 해 보는 건 어때요?”


포르투를 여행하면서 나는 페리의 말을 곧잘 듣고 있었다. 페리는 무엇이든 자랑삼아 늘어놓는 것이 없었다. 솔직하게 자기의 경험을 보여 주고 나의 의견을 물었다. 페리는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내버려 두었다. 겨우 이틀을 봤지만 나는 페리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굴 껍데기 아래에 깔린 얼음에 흘러넘칠 만큼 레몬즙을 마음껏 짜 넣었다. 마노엘이 갓 딴 레몬은 그렇게 시지 않은 법이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레몬임에도 여행지에서는 그런 것 마저 기쁜 모험이었다.


“알가르브 카타플라나! 맛있게 즐겨, 친구들!”


마노엘이 비장한 표정으로 간이 탁자를 옮겨 와 UFO처럼 생긴 커다란 검은 냄비를 가지고 나왔다. 비행선 두 개를 포개 덮은 모양의 거대한 냄비에서 달콤한 생선찜 냄새가 풍겼다.


“감동의 카타플라나!”


마노엘이 다시 한번 엄지를 세웠다. 감칠맛 나는 자작한 국물 소스에 담긴 쫀득한 생선 살과 커다란 새우의 오동통한 식감, 보들보들하고 쫄깃한 여러 가지 조개들, 포슬포슬하게 쪼개지는 감자, 국물을 잔뜩 머금어 입안에서 녹아드는 양파. 한 입 한 입 감탄하며 그릇을 비웠다. 나는 누군가와 입씨름 없이 오로지 나의 진실된 감상만으로 속에 떠오른 별 점을 쏟아냈다.






페리는 후식으로 바나나 까라멜로를 주문했다. 나는 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자, 이제 어디로 가 볼 생각인 건가 친구들?”


떠오르는 대답이 없어 머뭇거렸다. 페리가 말했다.


“세하르베스 빌라로 갈 계획입니다.”


마노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유칼립토를 찾으러 가는 군! 포르투갈의 숲에는 경계가 없어. 우리 숲에는 구석구석 해가 잘 들지.”


마노엘이 이별이 악수를 청했다.


“언제든 또 와. 좋은 여행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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