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난 그림자

Meet Perry There | 6.

by 성게를 이로부숴

‘Freitag, 20:30, Magisches Theater, Café Pablo

– Mina’


보이지 않는 엷은 무늬가 비치는 그것은 아침에 본 것과 같은 종이였다.


“마술극장!”


이것은 엄연한 경고이자 초대장이었다. 뒷문으로 가까이 다가가 숨을 죽였다. 누군가 목재 계단으로 올라가는지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그 여자에게 그림자가 있었는지 확인하지 못했어.’


나는 두 개의 길 사이에 커다란 출입구를 낸 아케이드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카페 파블로와 연결되어 있지 않는 먼 출입구로 돌아갔다. 아케이드를 통과하는 다른 사람들과 섞여 느린 걸음으로 카페를 지나쳤다. 바에는 여전히 키 큰 남자가 홀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쪽지를 건넨 그녀는 없었다. 바의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시선에 걸음을 돌려 양장점에 들어갔다. 지난번 실내복을 샀던 가게였다. 이니셜을 물었던 할머니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뮌스터는 정말 작은 도시야.’


여기저기에 나를 아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바 안에서 우락부락한 사내가 끈질기게 양장점 쪽을 주시했다. 나는 일부러 웃으며 할머니에게 과장된 인사를 했다.


“그…. 지난번에 봤던 가운을 사려고요.”


“여기에도 이니셜을 넣어 줄까요?”


할머니가 온화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이니셜을 기억하세요?”


내심 기억하고 잊지 않기를 바랐다. 그저 익명의 여행자로 남고 싶었다.


“I가 들어갔던 것 같은데.”


할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R이에요.”


“지난번에 R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R 맞습니다.”


딱 잘라 말했다.


“뭐 좋아요. 어디 보자…. R 은 지금 없네…. 이틀 뒤에 찾으러 오겠어요?”


“좋습니다. 이틀 뒤에 오죠.”


얼떨결에 구매를 하긴 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일부러 영수증을 펄럭거리며 가게를 나왔다. 카페 파블로의 바에 서 있는 녀석에게 보여주기 위해 너풀거리는 영수증을 보란 듯이 접어 지갑에 넣었다.






‘검은 커튼이란 역시 검은 문이겠지.’


황야의 이리에 등장한 검은 문과 카페 파블로에 드리운 검은 커튼이 더 없는 짝이 되어 떠올랐다. 휴대폰이 울렸다. 로키의 메시지였다.


‘뭐 좀 많이 알아냈어요? 부디 좋은 여행 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곧 보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오페디아를 열었다. 류노스케 씨와 쳇 베이커 밑으로 파블로가 추가되어 있었다.

‘이 앱은 날 추적이라도 하는 건가.’


망설이지 않고 앱을 삭제했다. 어느덧 비가 내리고 있었다. 뮌스터 사람들처럼 비를 맞으며 걸었다. 축축한 공기를 빨아들이며 빠른 걸음으로 호텔로 돌아갔다. 라디에이터 옆에 의자를 끌어 놓고 앉아 느긋하게 책을 보다가 여섯 시가 가까워 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새 밖이 캄캄했다.


“페리? 접니다. 일은 끝났어요? 전 시내에 있는 호텔에 있습니다. 그래서 금방 나갈 수 있어요. 어디서 저녁을 먹을 건 지 혹시 정한 거면, 바로 거기로 가죠.”


페리는 지친 기색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무엇을 먹고 싶은 지, 뮌스터에서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지 친절하고 상세하게 물었다.


“아니요. 아무래도 페리가 좋은 곳을 더 잘 알 텐데요. 게다가 나는 페리를 믿으니까.”


금방 주소를 보내왔다. 마차를 타고 갔던 뮌스터 성과 가까웠다. 아직 가보지 않은 구시가지지 길을 골랐다. 낮보다 옅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름이 끼던 지, 비를 뿌리던 지. 오로지 그 둘 뿐인 날씨라니.”






뮌스터 날씨를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로지 구름을 떠올리면 된다. 가로등 불빛이 오래된 돌길에 반짝였다. 검은 성당의 첨탑에 세 개의 불이 밝혀져 있었다. 쇠창살 상자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불빛. 나는 도심의 회랑을 걸어 아아강을 건넜다. 민트색 뮌스터 돔이 어둠에 잠겨 있다. 지도를 따라 땀에 절은 등에서 나는 김처럼 거친 색소폰 소리가 흘러나오는 골목이 나왔다. 음악이 새어 나오는 창문 앞을 서성였다. 골목에는 오직 엷게 켜진 가로등 하나뿐이었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멀리 가로등 밑에 덩치 큰 인영이 잡혔다.


“포르토의 검붉은 그림자.”


본능적으로 숨을 죽이고 살펴보며 천천히 멀어졌다. 후리후리한 체격에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


“마티니 바…!”


“페리? 페리예요?”


미명의 가로등 밖으로 서서히 걸어 나온 그림자는 골목의 어둠에 잠겨갔다.


“당신 누구야?”


그림자 쪽으로 다가가자 그림자가 멈췄다.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숨소리가 들렸다.


“뭐야?”


골목 끝 음악 클럽에서 나온 취객일 수도 있었다. 발걸음을 돌렸다. 그림자는 더 이 상 따라오지 않고 어둠 속에 멈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페리 어딥니까? 주소가 잘못된 모양입니다. 여긴…. 어떤 클럽이 하나 있어요. 재즈 클럽 같은데….”


문득 낮에 보았던 조각상이 떠올랐다.


‘파블로? 색소폰 연주자?’


쇠를 걷어 차는 소리가 들리고 가로등이 꺼졌다. 나는 전화기를 든 채 뛰었다.


“페리, 듣고 있어요? 지금 그림자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 노트에 있던 그 메모! 그것 때문입니다. 페리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유언처럼 말을 뱉었다. 가로등이 있는 길 끝으로 달렸다. 자전거가 몇 대 지나갔다. 오렌지 빛 불이 켜진 가게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주렁주렁 걸린 소시지와 치즈, 돼지다리 사이에서 주인이 놀란 눈으로 걸어 나왔다. 겨우 1평 남짓한 가게 안에서 와인을 마시며 타파스를 즐기는 중년 남녀가 잠깐 쳐다보았지만 경계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전화는 끊겼다. 페리 쪽에서 끊은 걸까. 달리다가 전원을 눌러 버렸을 수도 있었다.


“혹시 유칼립투스 향이 나는 와인이 있나요?”


주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게 뭔 지 모르겠군요. 특별한 와인이라면 여기에도 많지만…. 이걸 먹어봐요. 이건 피레네 산맥의 멧돼지 고기로 만든 훈제 소시지랍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수상한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페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다 와 갑니다. 방금 말한 곳은 아마도 제가 보낸 식당 뒷골목 같은데요. 가로등이 있는 길 끝으로 나오면 핀쿠스뮐러란 양조장 레스토랑이 보일 겁니다.’


‘그림자 같은 미친 소리를 했는데…. 이토록 침착한 문자라니.’


코미디가 따로 없어 웃음이 나왔다. 스페인 식료품 점 주인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빙긋 웃으며 다른 하몽을 잘라 권했다. 나는 주인장이 추천하는 템파라니요 한 병과 그와 어울리는 햄을 샀다. 가위의 한쪽 날을 쓸어내려 꼬불꼬불하게 말아낸 노랗고 빨간 리본. 소박하고 촌스러운 포장이 마음에 들었다. 투박한 손으로 최대한 예쁘게 묶은 리본이었다.


“잘 가요. 겨울 뮌스터라니…. 이런 날씨엔 스페인을 갔어야지!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요. 이런 축축한 도시엔 오래 머무르는 게 아니라니깐.”


계산 대 겸 바에 앉아 와인을 홀짝이던 중년 남녀 역시 나의 여행에 축배를 들어주었다. 가게를 나왔더니 오렌지 색 가로등 불빛 밑에 낯익은 회색 코트가 보였다.


“페리. 잘 지냈어요? 아까는….”


빙긋 웃는 페리의 얼굴을 보니 그림자 같은 것이 주는 불안한 호기심이 싹 가셨다.


“별일 없으면 됐죠. 저 쪽 뒷골목으로 잘못 들어간 모양입니다. 역시 임은 씨가 저보다 겁이 더 많습니다.”


“내가 이상한 소리를 했죠?”


“겁이 많은 건 좋은 겁니다. 뮌스터 구경은 좀 했어요? 제가 말한 레스토랑은 바로 저기예요.”


우리는 빗방울에 매일매일 반들반들하게 닦인 돌들을 밟고 걸었다.













작가의 말 :

연재 일정이 이토록 밀린 데에 대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국시를 앞두고 마지막 여름 방학을 마음껏 쉬며 보내고 싶기도 했고, 졸업 전에 박사 논문을 쓰고 싶어서 연구실에서 실험을 시작하게 되면서 여러가지로 준비할 것들이 많았답니다. 그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니 아무쪼록 큰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그래도 쉬는 동안 흥미진진한 다음 부분을 구상해서 많이 써 두었답니다. 또 새로운 연재 구상도 마쳐 준비중에 있습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일 벌이는 데는 하여튼 일가견이....... 여러분의 응원은 타자치는 제 손가락을 춤추게 합니다.❤)


참, 제 닉네임이 성게를 이로부숴로 바뀌었습니다. (꽤 오묘하고 파괴적인 이름이죠? 사실 제가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것이긴 합니다. 좀 얌전하게 가려다가 이제야 마음을 정했습니다.)


똑같은 글이 한 번 더 발행되었습니다. (오류인지 브런치 북 연재 글로 발행이 안 돼서 다시 올립니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