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베테

Meet Perry There | 7.

by 성게를 이로부숴

‘CAVETE’


오래된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루가 삐걱거렸다. 오래된 돌담에 난 검은 문 너머에서 나는 소리. 우리는 선실 같은 작은 창가에 붙은 테이블에 앉았다.


“여긴 오래된 대학생식당이에요. 여기서 직접 만든 그뤼네누델이 맛있어요. 면 요리가 별로 라면, 후추소스 슈니쩰도 맛있고요. 진한 란트비어로 만든 알트비어보울레로 할까요?”


“페리 추천대로 하지요. 전 그 면 요리로 할게요.”

“이런 날씨엔 치즈를 듬뿍 올려 오븐에 구운 초록색 면 만한 게 없죠.”


알트비어보울레란 거르지 않은 올드비어에 과일이 들어간 달콤한 맥주였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하고 향긋했다. 겨울에도 이 과일들이 달콤하게 익어가던 계절을 추억하게 하는 맛. 포르토의 셰리가 떠올랐다.


“봄이 되면 딸기를 넣은 알트비어보울레가 나옵니다. 그건 맑은 필스너로 만들죠.”


“그런 말을 들으니 봄까지 있고 싶어 지는데요. 여건만 된다면 말입니다.”


갓 딴 부드러운 딸기가 들어간 맥주를 마시기 위해 봄까지 여행을 하는 것. 여행을 하는 방법이란 여러 가지가 있다. 페리는 방금 전 통화에 대해선 전혀 묻지 않았다.


“조심하세요. 정말 뜨겁습니다.”


젊은 청년이 건장한 팔로 치즈가 넘쳐흐르는 접시를 내려놓았다. 투박한 오븐용 그릇에 담긴 질박한 음식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맛있게 먹어요.”


치즈를 살짝 걷어 맹렬히 김이 오르는 초록색 면을 맛보았다. 용암처럼 뜨거운 토마트 소스에 푹 담가진 쫀득쫀득한 면발이 얼었던 손 발을 푸근하게 녹였다. 페리는 입구 쪽을 바라보더니 손을 멈췄다. 곧 늑대가 으르렁대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야.”


건너편 테이블에 놓인 촛불이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졌다. 마룻바닥이 삐걱댔다. 온몸을 검은색으로 두르고 낮은 천장에 닿을 것 같은 커다란 체격.


“안녕 로키.”


페리는 침착하고 친절한 인사를 건넸다. 로키는 아무 대답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 옆 테이블의 의자를 정중하게 빼 페리와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 중간에 놓았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붙박이 의자의 틈을 반듯하게 막아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임은 씨도 오랜만입니다. 전화를 안 받기에 무슨 일이 있나 했습니다.”


그 말투가 매우 건방지게 들렸다.


“아까 골목에서 서 있던 놈이 너였어?”


녀석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무슨 골목이요? 그림자라도 봤습니까?”


페리는 별말 없이 앉아 있다가 점원을 불렀다.


“폿츠로 한 병! 샐러드 하나, 그리고 그뤼네누델 락스로.”


“정말 오랜만이야. 뮌스터엔 웬일이야?”


페리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움과 힘이 동시에 녹아 있었다.


“너야 말로. 브로콜리 교수님도 안녕하시고? 아, 이젠 나이가 더 드셨을 테니 블루멘콜이 되셨겠네.”

“그래, 잘 계셔. 종종 연락드리지 그래.”


“내 연락이야 달가워하지도 않으실 텐데.”


로키가 빈정댔다.


“두 사람. 서로 알아?”


페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로키는 비웃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잘 모릅니다. 이 녀석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몰라요.”


로키는 페리는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로키를 아세요?”


페리는 별로 놀랄 것도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둘이 친구예요? 고향친구?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너무 놀라 뜨거운 초록색 면을 아무 생각 없이 입에 집어넣었다. 입천장을 다 댔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달콤한 과일이 목에 걸려 마음대로 들이킬 수 없다.


“그러니까. 페리가 말을 좀 해봐요. 아니지 로키 네가 해야 되나?”


페리는 아무 죄가 없었다. 페리에겐 로키에 대해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으니. 그러나 로키 녀석은 잠자코 모르는 척 이야기를 캐묻고, 그림자에 관해 말했던 것이다.


“이 녀석한테 고향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


페리는 미동도 없이 식사를 했다.


“네 고향도 뮌스터는 아니잖아.”


로키가 코웃음을 쳤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로키의 태도가 함부르크에서 만났을 때와는 천지차이로 달랐고, 페리는 로키의 그 어떤 빈정대는 말에도 친절할 뿐이었다. 페리와 로키가 친구라면 페리 역시 나보다 한참 어리다는 말이었다. 가장 연장자로서 중재를 시도했다. 나는 어린 동생들을 타이르듯 말했다.


“일단 식사부터 해. 아니. 합시다.”


“그러죠.”


역시 페리 쪽이 고분고분했다. 최대한 근엄한 모습으로 로키를 바라보았다. 마침 로키의 요리가 나왔다.


“엄청 뜨거워. 조심하라고. 그래 로키, 너한테 하는 말이야.”


우리는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 로키가 일어서서 오래된 나무 창을 열었다. 차갑고 비릿한 바람이 들었다.


“뮌스터 날씨는 원래 이 모양인가?”


애써 대화 주제를 던졌다.


“네. 뮌스터의 겨울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그래, 맞아. 이 도시의 겨울엔 그림자도 안 지는 짙은 구름이 잔뜩 깔리지. 그림자가 없더라도 하나 거리낄 것이 없어. 정말 좋은 도시야.”


친절한 페리의 목소리 뒤로 로키가 이죽거렸다. 둘 다 얌전하게 앉아 보기 좋은 솜씨로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식사를 한다. 덩치만 컸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십 대로 보였다.


“그러니까. 편하게 말할게. 어차피 이렇게 됐고.”


“뭐가 이렇게 됐습니까?”


로키가 반항적으로 굴었다.


“너희들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투닥거리는지 모르겠지만…. 여행 중에 너희를 만난 건 참 대단한 우연이라고 생각해.”


“우연?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로키가 크게 웃었다.


“이게 우연이 아니면,”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페리를 노려보던 로키 말을 끊었다.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보다 너를 믿을 수 없어.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자를 놀린 거라면 용서해 줄게. 덕분에 재밌기도 했으니까.”


로키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드러운 면을 솜씨 좋게 모아 나이프로 잘랐다. 페리는 알트비어보울레를 한 잔 더 시켰다. 나는 달콤한 맥주가 물려 시원한 필스너를 시켰다.


“넌 말야. 분명 당뇨에 걸릴 거야.”


로키가 페리를 보며 악담을 퍼부었다. 페리는 빙그레 웃을 뿐 말없이 남은 식사를 마쳤다.


“니 피는 분명히 설탕물 일거야. 그렇지?”


여행과 우연은 뗄 수 없다. 모르는 기차를 타고 어떤 좌석에 앉아 처음 보는 사람들과 도착한 도시.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일들. 이 레스토랑에서 마주친 청년들, 아가씨들, 나오는 노래들과 함께 로키와 페리 역시 그러한 우연 중 하나일 뿐. 역시 크게 달라질 것 없었다. 류노스케 씨와 류노스케 씨의 아들, 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이해 못 할 일들이란 하나도 없었다.


“이 녀석은 하루 종일 하리보만 먹어요. 지금도 그래?”

“응, 종종.”

“넌 그대로야. 그때 그대로라고.”

“새로운 것도 있어. 요즘엔 럭비 클럽에 있거든.”

“럭비?”

“원래 축구보다 럭비가 재밌어. 너도 해봐.”


로키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앉아. 앉아…. 앉으라니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어차피 지난해에도 파울리눔이 이겼어. 올해도 가장 오래된 김나지움은 파울리눔이야. 열 낼 거 없어."


“뭐? 이 멍청이들.”


로키가 고개를 저었다. 못마땅해 자리에서 일어난 로키는 레스토랑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김나지움 이면 고등학교인가?”

“네. 비슷해요.”


페리가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뮌스터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거네요?”


“아니요. 로키는 오스나브뤼크 카롤리눔이에요. 매 해 두 학교 친선 축구 경기가 있거든요. 전통적으로 축구 경기에서 이긴 쪽이 그 해의 가장 오래된 김나지움 타이틀을 가져갑니다. 지난해엔 뮌스터 파울리눔이 이겼어요. 다음 경기가 열릴 때까지 카롤리눔 쪽은 아무 말도 못 하죠.”


“그 학교들은 언제 세워진 건데요?”


“797년입니다. 파울리눔은 아아 호수와 뮌스터 성 사이에 있어요.”


“천 년이 넘은 학교라….”


로키가 커다란 잔에 거품이 남실거리는 차가운 맥주를 들고 돌아왔다.


“카롤리눔이 더 오래됐어.”

“804년이야. 네가 세운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중요해.”


페리가 질 세라 잔을 들었다.


“로키는 수영을 한다면서. 축구 선수였어?”


“너야 말로 수영으로 전향했어?”


페리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잖아.”


로키는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너 같은 녀석에게 세 번이나 졌는데 접어야지. 별 수 있어?”


“하고 싶다면 하는 거야. 인생은 짧아.”


로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에게도?”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로 나무 홀이 가득 메워졌다.


“시간은 그런 거니까.”


“누군가에게는 어느 때에 멈춰 버려서 영영 가지 않기도 해.”


로키는 사나워져 있었다. 페리는 태연했다.






“화장실 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리와 로키에겐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한 건 그 중간에 내가 껴 있다는 사실이었다. 포르토에서 만난 페리와 함부르크에서 만난 로키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로키 쪽이 계획적으로 접근한 게 확실했다.


“이 여행을 계획한 건 나야. 함부르크로 갈 거라고 페리에겐 말 한 적 없는데….”


수도꼭지에서 얼음같이 찬 물이 나왔다. 화장실에는 장난 어린 낙서가 가득했다. 천 년이 넘는 학교가 있는 도시의 식당에는 대체 몇 년 전의 낙서가 남아 있을까. 유치한 그림들 사이 눈에 띄는 늑대의 발자국을 따라 화장실 마지막 칸 문을 열었다.


팔랑-


종이쪽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카페 파블로의 점원이 준 것과 같은 재질의 종이였다.


‘마술극장, 입장가능. 당신.’









작가의 말 : 저는 이 장면을 좋아합니다. 페리와 로키가 만나는 순간을요. 둘 중 누가 더 좋으냐면..... 글쎄요? 날씨가 좋으면 페리가, 날씨가 나쁘면 로키가 좋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날씨가 좋더니, 오후가 되니 안 좋아지는군요. 또 비가 내리려나 봅니다. 뭐, 뮌스터니까요.....


그럼, 다음 화를 기대해 주세요!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