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그늘 아래서

Meet Perry There | 10.

by 성게를 이로부숴

곧 아아 호수가 나타났다. 아무 빛이 없는 고요한 호숫가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들은 모두 그림자처럼 보였다.


“애초에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그림자가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어. 그럴 거면 빛의 근원을 찾는 게 낫지.”


물 위에 떠 있는 선착장 끝으로 가 앉았다. 바람이 찼지만 비가 섞이지 않아 상쾌했다. 밤이 되어야 포근한 이상한 도시. 그림자가 져야 할 낮에는 비로 뒤덮이고, 그림자로 뒤덮이는 밤이 되어야 비로소 맑게 갠다.


“미스트!”


어두운 물, 그 위에 둥실 떠 있는 선착장. 별 빛도 져버린 가장 어두운 시간. 저만치 앞에 검은 형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조용히 빠져나가기 위해 좁은 부표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림자? 드디어 내 눈앞에 나타난 건가!’


떨리는 마음으로 부표를 건너 뭍에 다다랐다. 검은 형체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무어라고 말하는 듯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도 침착한 목소리. 별안간 검은 형체가 부스러져 내려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호기심 때문에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정박된 보트들 사이에 엉거주춤 섰다. 그림자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인광. 사람의 피부였다. 작은 체구가 쏙 올라왔다. 나는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누군가 그림자처럼 늘어진 침낭을 능숙하게 정리하고 휴대폰 조명을 켜더니 물속을 살폈다.


“벌써 가라앉았겠지.”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

낯이 익었다.


“혹시.”


대뜸 말을 걸었다.


“누구세요?”


반항적이고도 당찬 목소리.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바로 밑에 물이에요. 그렇게 서 있다가 떨어질 것 같은데요.”


발음이 또렷해 더욱 냉정하게 느껴졌다.


“어디서 봤죠. 우리?”


방금까지 선착장에 웅크리고 있던 형체가 벌떡 일어나 배낭을 둘러메더니 빠른 걸음으로 나를 스쳐 지나갔다. 캄캄해서 발 밑을 보지 않으면 빠질 것 같은 부표를 내려 보지도 않고 날쌔게 건넜다. 보송보송하게 잘 마른 옷 냄새가 났다.


“어디서 뵀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보다 여긴 밤에 마약거래가 많아요. 조심하세요. 약 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거든요.”


찬바람을 머금은 냉랭한 목소리는 자전거를 타고 사라졌다. 단숨에 계단을 따라 올라갔지만 이미 어딘가 골목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갑자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자전거 라이트가 다가와 정면에 멈춰 섰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버금가는 밝기였다. 손으로 불을 가로막았다.


“공항 맞죠? 뮌스터엔 어떻게 오셨어요?”


그녀는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고 나를 빙빙 돌며 물었다.


“그… 임은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그 동생 분하고 어머님 하고…. 리무진 맞죠? 여기서 다 만나네요.”


자전거가 멈췄다.


“아까 한 말은 진짜예요. 이상한 사람들이 종종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참 저는 새오라고 해요.”


“겨울밤에 침낭 하나 가지고 선착장에서 자는 쪽이 더 조심해야죠. 여긴 별로 캠핑하기 좋은 곳도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지겹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정말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다분히 의심하는 투였다.


“친구가 있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근데, 엊그제 카페에 있었죠?”


“카페요? 무슨 카페….”


나는 이른 아침 카페에서 무언가 열중해 쓰고 있던 사람이 그녀였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 같아 보였는데.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고 해야 하나….”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본 것도 정말 신기한데…. 혹시 나중에.”


그녀가 한쪽 발을 굴렀다. 자전거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저는 그 카페에 자주 가요. 혹시 거기서 또 만나면 커피나 한 잔 해요.”


자전거 헤드라이트 불빛이 골목을 꺾어 사라졌다.




페리에게서 문자가 왔다. 해 없는 낮이 침침하게 밝아 왔다. 나는 페리에게 아침을 먹자고 제안했다.


‘뮌스터 구름처럼 축축한 회색 빵을 먹으러 갈까요? Rothenburg 53. 한 시간 뒤에 보죠.’


호텔로 돌아갔다. 1층 로비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로키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습니까? 방에도 없던 데요.”


“무슨 상관이야.”


녀석은 내 쪽의 의심이야 아무 상관없다는 듯 태연했다.


“제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건 어제부터 줄곧 물었는데.”


로키가 빙긋 웃었다.


“오리너구리. 거기 얼마나 많은 정보가 들었는지 알고 있어요?”


“친구 추가가 되어 있으면 언제든 동행할 수 있는 구조. 내가 비공개로 전환하면 아무 문제없고.”


로키는 잠자코 커피를 마셨다. 허리를 펴고 앉아 손바닥 반 만한 작은 커피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사나운 날짐승이 꽃을 뜯듯 우아하고도 어색했다. 목덜미를 물어 내장부터 뜯어먹는 육식 동물이라도 가끔은 새콤달콤한 풀을 뜯는다.


“해킹이라도 한 건가? 너 그거 범죄야.”


“그럼 고발하세요.”


한숨이 나왔다. 로키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도전적으로 말했다.


“그러면 앱을 가지고 있는 페리의 정체도 드러날 것 아닙니까. 저로서는 반가운 일이고요.”


“좋아.”


사실 여행자의 신분으로 경찰서나 법정에 드나들고 싶지 않았다. 개인의 권리가 침해된 시급한 상황이지만 내 입장에서도 포기해야 할 것이 많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미루다간 저를 피해 도망 다니는 재미있는 여행이 될 겁니다.”


“나를 따라다녀서 얻는 게 뭐지?”


언성이 높아지자 로비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를 낮추고 로키의 앞자리에 앉았다.


“내 여행을 망치려는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모르겠습니까?”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너 같은 녀석이 이 조그만 휴대폰으로 남의 정보를 마음대로 해킹하고 좇아 다니는 세상이야. 무엇도 숨기기 힘든 시대라고. 근데…. 그림자라니.”


“당신은 어디까지 연관이 있습니까?”


로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체 내가 어디에 무슨 관련이 있어. 너,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 이건 아니야.”


“참지 못하겠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수많은 이용자 중에 왜 난데?”


“포르토에서 그런 사진을 찍은 건 임은 씨 아닙니까? 직접 보여주셨는데요.”


“넌 정말 이상한 놈이야.”


로키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처음 보았던 반듯한 얼굴로 웃었다. 왠지 모를 망설임이 일었다. 나는 로키에게 마지막 경고와 함께 작별을 고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잠이 왔지만 곧 약속 시간이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짐 가방 속에서 옷을 꺼냈다. 전부 구겨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행이란 정말로 그래.”


빨래를 하려면 봇짐장수처럼 옷가지를 지고 비 오는 거리를 걸어야 한다. 그나마 구김이 덜 한 옷들을 꺼내 입었다. 다시 내려와 로비를 살폈지만 로키는 없었다.


“또 비가 오잖아!”


방으로 올라가기 귀찮았다. 호텔 카운터에서 우산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첫날 방을 내 준 직원이 벽 뒤에서 자주색 우산을 들고 나왔다.


“고맙습니다.”


직원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피곤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어느 정도 밝아졌다.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서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받는 게 분명하다.


페리는 창가의 높은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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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시간이 되시면 페리의 도시로 놀러오세요. 비가 많이 내리는 겨울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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